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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자가 안 되면 나머지가 됩니다(2) (롬 1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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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가 안 되면 나머지가 됩니다(2) (롬 11:7~12)


얼마 전에 집에서 교회로 출근하는 길에 눈에 띄는 상호명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막 개업을 한 것으로 보이는 상호의 이름은 ‘돼지 능지처참’이었습니다.
보는 순간 막 웃었습니다.
아무리 말 못하는 돼지라고 해도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개업하는 그 가게를 한 번은 꼭 가보려고 합니다.
적어도 이 불황의 터널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 정도의 열정만 있다면 성공할 것 같은 예감 때문에 그 주인을 한 번 보기 위해서라도 그 매장을 가서 능지처참된 돼지고기를 한 번 먹어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적인 문화도 열정을 가지면 무언가를 해 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한 열정이 있습니까?
조금 더 세밀하게 확대하여 말씀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그 열정을 가진 한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바울의 유대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거부하여 구원의 반열에 서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남은 자를 예비해 두셔서 그들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또한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의 밑바닥에는 철저한 유대민족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이 기초되고 있음을 저는 또한 강조했습니다.
동시에 바울의 이러한 열정적인 유대인들을 향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중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십자가 구속을 받아들이는 영적인 남은 자들임을 역설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담임목사의 아주 강력한 신학적인 기초를 근거로 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자가 구원을 받을 남은 자입니다.
육비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 전체를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것이라는 주장은 정말로 무책임한 주장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주장처럼 유대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을 대상자는 유대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받아들인 영적인 남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 중에 그릇된 선민의식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본문 7절을 주목합시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본문 7절 후반절에서 표현된 ‘남은 자’라는 번역은 헬라어 ‘loipoiv’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5절에서 똑같이 ‘남은 자’라고 번역한 헬라어 ‘leimma’하고는 완전히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똑같이 우리나라 성경의 번역에서는 ‘남은 자’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원어적인 의미는 다릅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5절의 남은 자로 번역된 ‘레임마’는 은혜로 선택된 남은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 중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남은 자입니다.

그러나 7절의 ‘로이포이’라는 남은 자는 예수의 은혜를 거부한 남은 자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7절에서 ‘남은 자’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7절의 ‘로이포이’의 올바른 해석은 ‘나머지’가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남은 자들의 반대적인 의미를 갖는 나머지들입니다.
나머지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거부합니까?
그 이유를 추적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본론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선언하는 내용은 멸망을 받는 나머지들의 자아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설교를 들을 때 받아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역발상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로 들어선 나머지들의 신앙적인 양태와는 정반대로의 신앙적인 삶을 결단하는 우리 교회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나머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거부하였습니까?

1. 하나님의 은혜에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7-8절을 주목하십시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나머지들의 특징을 영적인 둔감함으로 정의하였습니다.
영적인 둔감함의 형태가 어떠했습니까?

* 혼미한 심령이었습니다.
* 보지 못할 눈이었습니다.
* 듣지 못할 귀였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하여 본문에서는 ‘우둔하여졌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사용하던 개역판에서는 이 부분을 ‘완악하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의 대부분은 ‘눈이 멀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다 통하는 말입니다.

영적인 민감하지 않고 우둔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에 둔감하여져서 완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영적으로 둔감한 자는 하나님의 영적인 부분을 볼 수 없는 소경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둔해졌다’, ‘완악해졌다’, ‘눈이 멀었다’는 말은 서로 상통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본문의 8절 말씀인 ‘혼미한 심령’,‘보지 못할 눈’,‘듣지 못할 귀’ 는 바울의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나머지들의 영적인 둔감함을 지적하기 위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29:10절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그렇습니다.
영적을 둔감한 자들은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이 임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이 감긴 자들입니다.
이사야의 에언 뿐만이 아니라 바울의 인용 구절은 또 하나의 구약 말씀의 인용입니다.

신 29:4절을 주목하십시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당연히 영적으로 둔감해 집니다.

영적인 둔감함이라는 부분에 집중하겠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무엘하를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윗의 결정적인 범죄 사건인 밧세바의 간음사건이 아주 세밀하게 고발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빠르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의 군사들이 영토 확장을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어간에 다윗은 궁전에서 여유 낙낙한 쉼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왕궁 지붕에 올라 주변을 보았는데 한 곳에서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갖고 있는 다윗은 순간 욕정의 노예가 되어 그녀를 왕궁으로 데리고 오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 여인은 자신의 영토 확장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다윗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장군 우리야의 아내였음을 알고도 그녀를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취하게 되었습니다.

하룻밤의 욕정의 대상으로 남의 아내를 취하게 된 다윗은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급해진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불러 올려 아내와 동침하게 하였는데 그의 완전범죄를 꿈꾸는 계획은 우리야가 아내와 동침을 하지 않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방법은 다윗의 권력으로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게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요압에게 왕령을 내려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이제 완전 범죄의 구성요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우리는 이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잘 압니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거의 웬만한 크리스천들이라면 지식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목할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우리야를 죽게 하는 데 성공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삼하 11:26-27절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 내어 우니라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우리는 이 기사를 읽을 때 마다 항상 집중하는 것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이런 극악무도한 일을 행하다니 기가 막힌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고도 성군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분노합니다.
물론 후에 다윗의 이 범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를 받은 것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저는 본문에서 다윗이 아닌 밧세바에게 시선을 돌리려고 합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자기의 남편 우리야가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전사 통지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이미 남의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고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의 죽음을 통보받고 울었습니다.

본문은 소리 내어 울었다고 말합니다.
‘소리 내어 울었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dps;’(싸파드)는 원어적인 의미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극도의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격한 감정의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 사용하던 개역성경에는 이 부분을 ‘호곡하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남의 남자의 아이를 배에 잉태한 후에 진짜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운 밧세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슬퍼서 울었습니까?
저는 이 성경의 부분을 여러 번 읽었지만 도대체 그렇게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문자적인 문구를 보아서는 밧세바의 울음은 슬픔의 울음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의 울음으로 보입니다.

이제 왕의 아내가 될 수 있음에 대한 기쁨의 울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과대한 해석입니까?
너무 과장된 해석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호곡한 뒤에 어떤 일이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습니까?

삼하 11:27절 전반절이 증언입니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분명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일들이 자행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한다면 답이 이렇습니다.
있을 수 있다.
어떻게요?
영적인 부분이 마비되어 눈이 멀어 완악해지고 우둔해지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영적인 부분이 둔감하여져서 행한 소위들이 자신들이 볼 때에는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정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삼하 11:27절의 후반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영적으로 둔감한 자들은 나머지들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합니다.
정말로 큰 문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영적으로 둔감한 나머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역발상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까?
당연히 영적으로 민감한 남은 자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발상의 은혜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부여 받습니다.

본문 11-1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바울이 본문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보고 샘이 나서 깨달음으로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방인들이 풍성해지는 은혜로 인하여 유대인들도 깨닫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간절함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한꺼번에 묶어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민감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제목에 의해서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둔감한 나머지가 되지 않고 영적으로 민감한 남은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 중요한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민감함은 어디에서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들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을 강해할 때 교우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롬 10: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지난 주에 새신자 가정을 가정 심방하였습니다.
심방을 하고 대화를 하며 교제를 하는 어간에 아주 깊은 교훈을 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나오게 된 동기가 이사를 하고 교회를 정하지 못하는 어간에 교회 소개를 받고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 설교를 듣고 교회에 나와 출석하게 되었고 정착하게 된 젊은 부부 가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교회를 결정할 정도라면 말씀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출석하게 된 부부 중에 아내 되는 자매가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사님의 설교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어떤 정치적인 부분이나 일반적인 틀을 깨는 그런 강한 설교였습니다. 등록한 지 2개월 동안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집에 돌아오면서 항상 느꼈던 생각은 ‘찔린다.’였습니다. 그리고 약 2개월 동안 저와 싸웠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뒤에 집에 와서 이렇게 되 뇌이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옳습니다. 전에 배웠던 너무나 원칙적인 말씀인 것을 알아요. 그런데 목사님,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게 그 다음의 부분은 아직 저는 아니잖아요. 아직 저는 거기까지는 못 미치잖아요. 아시잖아요. 를 외치면서 이성으로 말씀 그 다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싸우면서 2개월을 버텼습니다. 그런데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 그 다음의 부분을 어느새 가슴에 담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제 스스로도 저의 자아를 보면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제가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 것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심방을 하러 간 목사가 이 고백에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충만한 은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재확인했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민감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난 주에 정말로 감동적인 말씀사경회를 마쳤습니다.
명명된 이름이 연합성회였지만 이름이 어떻든 간에 분명히 지난 주에 우리는 말씀사경회를 은혜 중에 경험하며 마치는 쾌거를 누렸습니다.
기도한 대로 집회의 횟수가 진행되면 될수록 줄어드는 집회가 아니라 집회 참여 대상이 많아지는 집회를 경험했습니다.
부흥회에 늦으면 자리가 없을 것 같아 부흥회 사상 처음으로 자리 좋은 곳을 잡으려고 일찍 집회에 참여했다는 권사님의 감격의 보고도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영적인 대각성의 은혜를 받아 결단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강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짓는 교우들도 여럿 보았습니다.

집회를 끝난 뒤에 지인으로부터 집회의 승리의 소식을 듣고 ‘목사님, 목사님이 계셔서 이 지역의 영성이 깊어지고 영적인 기류가 깊어지고 있음에 감사한다’는 어부지리의 극단의 격려 메시지도 기분 좋게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 한 분으로부터 이런 메일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에 차목사님과 같은 분이 계시기에 미래가 있음에 큰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흥회를 마친 뒤에 이런 감동의 보고를 얼마 만에 드리는 것입니까?
부흥회를 마친 뒤에 이런 감격의 메아리가 또 그 얼마 만입니까?

어떻게 이런 승리가 있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 교우 중 또 한 분의 메일이 그 정답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목사님, 말씀만을 증거 해주신 강사 목사님에게 존경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승리의 관건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승리의 영적인 샴페인은 터트리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인 민감함으로 남은 자의 승리를 맛보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은혜의 삶을 살겠다는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또 하나의 구약적인 말씀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이 바울이 인용한 다윗의 이야기는 시편 69:22-23절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다윗이 쓴 시 69편은 다윗이 너무나 힘이 든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 기록한 시입니다.
주석가들마다 다윗이 기록한 원수에 대한 저주 내용이 기록된 내용들을 보면서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둘 중의 하나의 시대적인 배경을 두고 있다는 데에는 거의 일치합니다.

하나는 압살롬의 반역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사울의 핍박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다윗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께 원수들의 방향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시편 69편이고 그 중의 한 부분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69:22-23절을 다시 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배경을 이래하고 나니까 다윗의 선포가 그림이 그려지실 것입니다.

밥상에는 무엇이 올라와야 합니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올라와야 합니다.
우리들의 육신을 건강하게 해 주는 육의 양식들이 올라와야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밥상이 도리어 자신을 헤치는 올무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평안 대신에 덫이 놓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눈은 어두워서 못 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리는 항상 굽어 있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을 다시 묶어서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입니까?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열정을 없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능력한 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어찌 보면 철저한 원수들을 향한 저주의 탄원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비극은 열정이 사라질 때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사탄이 공격하는 공격이 노출되어 무방비로 당하는 패배의 결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고 자포자기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영적인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는 열정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는 열정이 사라진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을 말할 때 우리가 흔히 아는 성경적인 배경은 누가복음 5장입니다.
하루 종일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겠다는 바로 그 기사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갈릴리 해변가에 정말로 많은 어부들이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베드로의 배에 올라탔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서는 누가복음을 통해서는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기사를 보면 적어도 베드로의 배에 주님이 타게 되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마 4:18-20절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누가복음의 같은 기사에 비하면 아주 간단하지만 마태의 보고를 통해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습니다.
우리 주님은 먼저 갈릴리 해변을 다니셨습니다.
‘다니셨다’는 단어는 헬라어 ‘peripatew’(페리파테오) 의 번역입니다.

마태복음 4:18절은 다니셨다고 번역했지만 원래 이 단어는 ‘함께 살다’라는 원뜻을 갖고 있습니다.
원어적인 부분을 대입하여 해석하면 주님이 갈릴리 해변을 다녔다는 말은 그냥 갈릴리 해변가에 관광을 나왔다가 우연히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를 타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갈릴리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베드로의 어부로서의 삶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드로를 제자 삼으시겠다고 결심하신 것은 그가 밤을 새면서 까지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치며 돌아오는 것을 본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왜요?
그날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는 많은 어부들이 그날따라 허탕을 치며 고기를 못잡고 투덜거리며 일찍 뭍으로 철수를 했지만 유독이 베드로는 고기를 잡겠다는 한 가지 열정을 갖고 철야 작업을 하는 열심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저 놈 베드로가 고기를 잡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지만 밤을 새워 자기의 일을 하는 열정을 보니까 잘 훈련을 시켜 양육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일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셨고 그 이유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탔고 그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순종의 명령을 내렸고 순종하는 베드로를 하나님의 나라에 일군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고린도전서 4:1-2절의 말씀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교우 여러분!
혹시 요한계시록 2:10절 후반절을 아십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지난 주에 연합성회의 강사로 온 친구목사를 보면서 참 많은 부분에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서울신학대학 재학 시절 식권이 없어 밥을 굶던 간증을 들었습니다.
마지막 날 간증을 듣기 바로 전날 청풍 리조트를 안내하고 구경도 시켜주면서 차를 한 잔 마시며 교제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21년이나 되었네. 그 때는 왜 그리 삶이 어려웠는지 몰라. 교육전도사 사례비 11만원이 전부였는데 십일조 빼고, 감사헌금 빼고, 건축헌금 빼고 나니까 남는 것이 없었어. 그래서 밥 먹듯이 굶었어. 기숙사 의무입사 때는 점심시간에 성주산에 올라갔다. 친구들 점심 먹는 데 영적인 양식까지 굶을 수 없잖아. 그런 영적인 오기가 있었어. 그래서 점심에 성주산에 올라가서 죽어라고 울면서 기도하면서 울부짖었던 시기가 있었어. 저녁에는 안성탕면을 김치 없이 3개월 동안 먹는데 참 많이 서글펐던 때였지. 그런데 그때를 지금 생각하면 은혜야. 그 때가 있어서 그런지 성도들 중에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거든.”

강사목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 그렇게 어려웠을 때가 있었네. 내일 내가 후편 간증할게.”
그 다음 날 친구 목사의 후편을 들었습니다.
들으면서 옛날 생각이 나서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헤어지면서 이렇게 농담했습니다.
“어이, 성주산 정기 받은 동기, 초심과 열정 잃지 말고 승리하자.”

친구는 도서관에서 독일어 사전을 보면서 씨름을 했습니다.
구약학 교수가 되겠다는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친구의 옆 좌석에서 부족한 종은 그 때부터 설교 준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고난의 굴이 아닌 터널에서 고지를 바라보며 고지론에 입각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하나님의 선지동산과 영계에서 영향력을 제시하는 열정적인 사역자로 우뚝 섰습니다.
부족한 종은 미답지론에 근거하여 아무도 밟지 않은 그 곳을 향하여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열정적으로 사역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은혜의 사모하는 열정으로 사로잡힌 남은 자이십니까?
아니면 은혜의 열정이 사라진 나머지입니까?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 가운데 예배를 드리면 그냥 우는 자매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울고, 기도하다가 울고, 찬송하다가 울고, 나누다가 울고, 다른 사람이 은혜 받은 것을 이야기 하면 감격해서 울고 그냥 우는 자매가 있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을 했습니다.

왜 울까?
너무나 단순합니다. 
은혜 때문에 웁니다.
그냥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 
주님 만 생각하면 너무 감사해서 울음이 나옵니다.
저는 이런 성도를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남은 자이기에 그렇습니다. 

옛날에 학생회 시절에 많이 하던 레크리에이션이 있었습니다.
20-30명의 공동체 원들이 원을 돌다가 자리를 찾는 게임입니다. 
의자에 앉는 게임인데 항상 자리는 하나가 모자랍니다. 
그래서 자리를 못 잡는 자는 탈락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을 할 때마다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자리가 없습니다.

불행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자리가 없는 자가 차지하게 됩니다.
더 늦기 전에 남은 자의 반열로 돌아오십시오.
나머지는 은혜에 대하여 둔감합니다.
나머지는 은혜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은혜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21세기의 남은 자들입니다.

명심하십시다.
남은 자가 안 되면 나머지가 됩니다.
나머지들이 되지 말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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