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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들의 힘을 신으로 삼는 자 (합 1:5~11, 마 23:12)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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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의 힘을 신으로 삼는 자 (합 1:5~11, 마 23:12)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 왕자가 자기별을 떠나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임금님의 별이었습니다. 임금님은 ‘내 가신이 왔다’며 좋아했습니다. 어린 왕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 생활이 따분해졌습니다. 어린 왕자는 임금님께 작별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이 때 임금님은 어린 왕자를 법무장관에 임명할 테니 자기별에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어린 왕자는 “여기는 아무도 없는데 법무장관이 왜 필요하지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임금님은 “그렇다면 너 자신을 재판하라. 남을 재판하는 것보다 자기를 재판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네가 훌륭히 자기를 재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참으로 현명한 인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자신과 화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재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은 영원한 명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남의 흠을 지적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교만은 주변 사람을 모두 병들게 만드는 병균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성경 잠언 16:18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합니다. 교만은 반드시 망합니다. 교만은 자기 사랑이며 자기 신격화를 의미합니다. 교만은 가장 늦게 제거되고 가장 먼저 재발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교만을 미화하거나 긍정적으로 말하는 곳은 어느 한 곳도 없습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교만을 권력의 교만, 지식의 교만, 덕의 교만으로 분류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만 가지고 있으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권력도, 지식도, 덕도 남보다 조금만 더 있으면 우쭐대고 힘이 들어갑니다.

  전도서 12:3에는 말합니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집니다. 힘 있는 자들이 쓰러집니다. 힘 있는 자들이 결국 실패합니다. 그 힘을 의지하면 패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자랑하고 의존한다고요? 그 힘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은 비교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문법에서 비교급과 최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비교급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입니다. 절대자와 상대자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조금 나은(better) 사람, 조금 더 가진(more)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으신(best), 모든 것을 가지신(most)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입니다. 힘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힘이신 하나님입니다.

  영성가 존 클리마쿠스는 “교만한 천사에게는 귀신이 필요 없다. 그 자신이 귀신이며 곧 자기의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귀신, 자기가 원수인 어리석음을 교만한 사람은 이미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기를 바라며 오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첫째,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옵니다.

  7절에는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라고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은 자기를 믿고 당당합니다. 고개를 바짝 세우고 다닙니다. 교만의 극치에 삽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은 자기 잘난 맛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우리 교회의 사진작가인 어느 교인이 참여하는 슈퍼모델들의 자선행사에 초대받아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이들이 안내하고 행사를 하는데 키가 얼마나 크고 다들 늘씬한지 평소보다 제가 작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사회자가 이홍렬씨였습니다. 또 그날 초청되어 온 사람 가운데 윤정수씨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작은 남자들만 초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모델들의 워킹 자세가 당당합니다. 걸음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어깨를 쫙 펴고 앞을 보고 걷는 것이 멋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외모 채용’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위풍당당’이란 말은 아주 옛말입니다. ‘여풍당당’도 지나간 옛말입니다. 이제는 ‘얼짱당당’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합니다. 성악가나 가수들도 그렇습니다. 당당한 자신감을 가져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당당함과 위엄이 없으면 노래가 안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런 당당함은 자기에게서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자세는 반대입니다. 고개 들고, 어깨 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기도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는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세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서는 것이 아니라 엎드립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엎드려 경배하고” 혹은 “엎드려 절하고”라고 합니다. 직분을 받아 안수를 받을 때에 고개를 바짝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서품할 때는 땅에 납작 엎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을 할 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세가 낮아야 하고, 힘을 빼야 하고,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힘이 들어있으면 안 됩니다. 야구선수가 배팅이 안 되는 날에 해설자가 말하기를 “저 선수 오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힘을 빼면 그 때부터 잘 맞습니다. 힘을 빼는 것이 운동입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5달란트 받은 사람이 5달란트를 남겨서 가지고 왔을 때에 주인은 종에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것으로 주겠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입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6,000날 동안 일해서 쓰지 말고 모아야 1달란트가 됩니다. 요즘 돈으로 계산하여 하루에 5만원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1달란트는 3억 원입니다. 5달란트면 15억 원입니다. 그런데 15억 원을 가진 종이 15억 원을 더 만들어서 30억 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은 15억 원을 주면 15억 원을 남겨서 30억 원을 만들 수 있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인간의 눈에서 볼 때는 엄청나게 큰일이지만 하나님은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시는 일에 비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힘에 비해보면 힘도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지혜는 하나님 앞에 명함도 못 내놓습니다.

  사람들의 당당함이 자기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당당함은 나의 힘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우리 자신의 당당함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당당함은 쉽게 사라집니다. 공회 앞에서 선 베드로와 요한을 보세요. 얼마나 당당합니까. 세상의 힘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과 전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이 당당했습니다. 우리들도 지금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있지만 굴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최근 SBS 방송이 ‘신의 길, 인간의 길’이란 4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하여 기독교가 상당한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는 데서 이 작품은 시작이 됩니다. 방송국 측은 방송을 취소하라는 말도 듣지 않습니다. 4부작에 대한 반론을 방송해주겠다던 원래의 약속도 파기했습니다. 방송국측은 종교 간의 화해를 모색했다는 말로 변명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간의 화해를 하는데 예수님이 신이 아니라는 논리가 왜 필요합니까? 어제 날짜의 ‘기독공보’의 사설을 제가 썼습니다. 저는 맨 먼저 SBS가 타종교의 기본 절대 진리에 대해서도 4부작을 만들 용기와 자신이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왜 기독교만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지 아십니까? 원래 진리는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선거 때도 보면 2등과 3등은 공동으로 1등을 공격합니다. 언론중재위원회가 개인의 인격이나 재산의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는 중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세계인구 3분의 1에 대한 인격과 자존감의 말살이며 엄청난 재산의 손해를 입혔음으로 중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가 사회운동에 대한 방향이나 정책은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 신이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기총은 이렇게 열심히 SBS에 맞서는데 왜 NCC는 가만히 있습니까?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신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리고 천주교도 이에 대하여는 같은 소리를 내야 한다고 봅니다. 나아가서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차제에 기독 언론에 투자하여 더 좋은 방송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종교의 기본진리에 대하여 이런 방송을 만들었으면 문제가 컸을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3, 4부를 공격적으로 편성하여 방송한다고 합니다. 그 당당함과 오만함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인간적인 당당함은 진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기들에게서 나온 당당함을 역사적으로 보면 얼마 가지 못합니다. 세상 권력의 무상함을 잘 알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아합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나 다리오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지만 마지막이 비참했습니다.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려 했지만 자신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히틀러는 세계 정복을 꿈꾸고 유대인을 학살했지만 자신이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얼마 전에는 독일의 밀랍 인형 박물관이 문을 열자마자 히틀러 인형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권력이고 세상적 당당함입니다.

  “로마인의 이야기”라는 책에 복음이 로마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의 열정입니다. 둘째는 부활신앙입니다. 셋째는 도덕적 순결성입니다. 넷째는 순교를 감당할 복음의 당당함입니다. 복음 외에 우리가 당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당당하게 합니다. 세상적인 자신이 주는 당당함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밥 브리너는 “거만함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당당함 때문에 거만함의 함정에 빠집니다. 이것을 복음으로 배격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습니다.

  11절에는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삽니다. 자기들의 힘이 무엇입니까? 물질의 힘입니다. 지식의 힘입니다. 육체의 힘입니다. 미모의 힘입니다. 이것들이 그들의 신입니다.

  오래전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에 가서 비스마르크를 만났습니다. 독일 육군의 사열을 받으면서 비스마르크가 이토에게 “우리 독일 군대는 하나님 외에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토는 일본군이 더 용맹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우리 일본군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인 줄 압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진짜 강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힘이 있는 나라들은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군사력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한 미국이나 테러로 미국을 공격한 탈레반, 둘 다 하나님과 알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23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흔히 하는 말대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것을 자랑하는 것은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격입니다.

  하늘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옛날의 권력을 보세요. 다 찾아볼 수 없습니다. 3공화국 때에 청와대에 권총을 차고 들어간 사령관도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6공 황태자도 요즘은 돈 때문에 소송이나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 실세라고 하던 이도 요즘에는 초라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습, 세상의 권력에 의존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면 웃으실 것입니다. 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힘입니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꾀, 자기의 힘,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고 산 결과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사야 40:24에는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라고 합니다.

  열대 아메리카 산 짖는 원숭이는 정글에서 가장 소리가 큰 동물이지만 가장 힘이 센 것은 아닙니다. 겁이 많을수록 소리가 큽니다. 옛날의 어느 괴변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없고, 죽은 이후에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사실은 가장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두렵지 않은 자는 아예 그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습1:7)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합2:20)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37:7)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사41:1) 성경은 반복해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소리칠 자격조차도 없습니다.

  마크 애터베리가 쓴 ‘삼손 신드롬’이란 책에는 “삼손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의 충동을 통제할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강한 남자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혼자 강한 사람은 실패합니다. 혼자 성공하려면 실패합니다. 삼손은 혼자서 싸울 때는 멋지게 해치웠으나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을 과신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실패의 원인입니다. 마틴 루터는 사면초가의 어려움 가운데서 찬송합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이 찬송은 자기 고백적 찬송입니다. 이 찬송이 우리의 찬송도 되기를 바랍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순례자’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인 힘 외에 우리 곁에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두 개의 힘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천사와 악마입니다. 천사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악마 역시 일종의 천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롭고 반역적인 힘입니다. 자신의 힘을 신으로 삼는 자는 자신도 모르게 악마의 앞잡이 됩니다. 항상 선한 생각, 선한 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힘을 신으로 삼겠다는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아예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유혹을 물리치는 힘을 가진 자가 진정한 강한 자입니다. 시편 147:17에는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힘과 위대하심을 인정해야 진정한 강자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참된 겸손은 참된 지혜입니다.


결론

  중국 현대 작가인 쟈핑와의 ‘친구’라는 책을 얼마 전에 읽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 책에 보면 “말 주변이 뛰어난 사람은 하늘이 그 재주를 무디게 하고, 안하무인인 사람은 귀신이 그를 훼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교만하고 자신의 힘을 믿고 사는 사람의 인생의 끝은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믿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당당함과 위엄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은 자기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자신을 고백하고, 자신의 힘을 부인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길과 우리의 길은 방향이 다릅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삶은 역주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나는 벌레 같다고, 힘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때문에 당당하고 위엄 있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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