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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마 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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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마 6:19~24)


현대인의 우상, 맘몬

제가 청년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아는 믿음의 동역자 중 하나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특심했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가 다니던 학교 캠퍼스 정문에 대장군 장승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우상으로 생각했던 이 형제가 밤중에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과 함께 그 장승을 톱으로 절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캠퍼스가 발칵 뒤집혔고 이 때문에 이 형제가 속해 있던 선교단체가 동아리 방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은 80년대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요즘도 심심치 않게 장승을 절단하거나 단군상이나 불상을 훼손하는 열심당과 같은 행태가 종종 일어납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기드온을 비롯한 사사와 엘리야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 우상숭배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바벨론 포로기 이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어겨서, 가장 대표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우상 신을 섬겨서 이렇게 패망했다고 뼈저린 반성을 하였습니다. 포로 된 땅에서 이스라엘은 말씀을 모으고 말씀을 연구하며 말씀을 마음판에 부지런히 새겼습니다. 그 이후에는 선지자들이 더 이상 우상숭배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상이 이스라엘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우상에 대해서 비판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독수리 상과 로마 황제의 얼굴이 화폐에 새겨져 있다하여 데나리온이라는 로마화폐도 들고 다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성전에 환전상이 있었던 이유도 이런 불경한 화폐인 데나리온을 이스라엘의 화폐인 세겔로 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우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우상은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 때문입니다. 더욱이 현대는 이성과 과학이 발달한 시대입니다. 물론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곳에서는 우상을 여전히 신처럼 섬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승이나 석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거나 상징물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신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우상은 없는가? 아닙니다. 우상은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우상을 그렇게 싫어하셨는가를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마치 사랑과 같습니다. 사랑은 한 사람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 신을 섬겼기 때문에 우상을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에도 우리 중심에 하나님 대신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우상을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네가 너의 심장을 걸어놓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본질적으로 네 하나님이다.” 옛날에는 보이는 우상이 신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신들을 현대인들은 섬기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맘몬이라는 물질신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24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 하여 “재물”로 번역된 맘몬을 분명히 “주인”의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주인은 헬라어로 ‘퀴리오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물질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놓습니다.

서신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우상은 맘몬입니다. 우리들 마음판에 이 맘몬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장승이나 신상 등 보이는 우상은 이제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상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는 우상은 차라리 보이기 때문에 배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심이라는 우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독버섯처럼 교묘히 자라나 어느새 우리 마음판을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장승을 우상이라 하여 자르는 사람들은 진짜 우상은 보질 못하고 힘을 잃은 가짜 우상만 상대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맘몬은 이제 종교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행복을 결정합니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불행합니다. 동창회에 가서도 돈이 있으면 기가 살고 돈이 없으면 기가 죽습니다. 돈은 권세입니다. 돈 있는 자 앞에서는 모든 권력이 숨을 죽이고 비굴해집니다. 돈의 능력에 대해서 유물론을 만들어낸 칼 맑스는 이렇게까지 말을 했습니다. “나는 못생긴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못생긴 사람이 아니다.” 돈은 생명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기도 하고,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도 합니다. 돈은 부적과 같은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으면 힘이 있고 없으면 불안해집니다. 돈은 거룩합니다. 너무 거룩해서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가 가진 재산을 잘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식들 앞에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돈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부부 단 둘이서 은밀히 상의합니다. 

돈이 얼마나 위대한지 돈을 찬양한 시편 23편이 나올 정도입니다.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안락한 침실에 눕게 하시고 달콤한 술집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호주머니에 돈이 있음이라.
돈의 권세와 보호가 나를 안전케 하는도다.
돈이 원수를 만들고 나를 괴롭게 하니
내 머리에는 항상 돈 생각으로 근심의 잔이 넘치는도다.
나의 평생에 욕심과 정욕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돈을 믿고 살다가 죽으리로다.”

이만큼 돈의 위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루터는 인간에게 세 가지의 회개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회개가 필요하다. 가슴의 회개(통회의 눈물), 정신의 회개(가치관의 전환), 그리고 돈지갑의 회개이다” 어떤 분이 침례를 받으려다가 하다가 자기 호주머니에 돈지갑을 그대로 둔 채 침례탕에 들어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목사님 돈지갑을 빼놓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가만 두시오. 그 돈지갑도 세례를 받아야합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지갑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열리는 순간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할 것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주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보물은 소중합니다. 제가 돈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인 면만 말씀드린 것 같은데 재물은 정말 소중합니다. 우리는 물질이 없어서 불편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이 없어서 내 마음에 불안이 있고 가정에 불화가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물질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쌓아두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쌓아두더라도 그 물질을 지혜롭게 쌓아둘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이 땅에 쌓아두는 것은 좀이 먹거나 녹이 쓸거나 도둑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재산을 주로 곡간에 보관하거나 땅에 묻어 두기 때문에 실제 이런 일들이 발생을 했습니다. 그러면 현대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나? 아닙니다. 아무리 은행이나 금고가 발달해도 우리 돈은 어느 새 사라지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식을 투자했는데 다 날려버리기도 합니다. 부동산에 투자했는데 집값이 떨어져 손해가 나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물가가 뛸 때는 그냥 앉은 자리에서 돈을 잃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닐지라도 열심히 돈을 벌었다가 사업 실패로 다 거덜 내기도 하고, 자녀들이 솔솔 빼어 먹거나, 아니면 병이 들어 병원비로 소진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렵게 모은 보물들이 너무 쉽게 빠져나갑니다. 주님은 이런 보물을 더 지혜롭게 더 소중하게 간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하여 전혀 통장에 잔고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위험을 대비하여 보험도 필요하고 연금도 필요합니다. 노년을 대비하여 적당한 재산도 필요합니다. 이것은 겨울을 대비하여 여름에 부지런히 식량을 모으는 개미와 같은 지혜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위한 양식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쌓는 영원한 양식이 필요합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믿는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영원의 때를 준비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보물을 땅위에 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물질에 매여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물질로 더 좋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데 그렇게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주는 맹목적인 미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많이 쌓아야 행복하다는 맹신입니다. 물질이 주는 맹목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물질이 없으면 내 인생은 불행해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주님은 이런 공포와 미신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질의 이런 권세에서 자유하는 방법은 물질을 주는 것입니다. 물질을 사용하고 나서도 풍족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알고 나면 우리는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십일조가 바로 하나님의 물질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십일조가 마치 군대에 가면 유격훈련 중 ‘헬기레펠’ 훈련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헬기레펠은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기 위한 예비훈련으로, 지상 11m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입니다. 이 11m 라는 것은 인간이 가장 공포스럽게 느끼는 높이입니다. 이 높이에서 뛰어내릴 수 있으면 어떤 곳에서도 자신 있게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실제 훈련장에 가면 헬기 레펠 높이는 약 10m 쯤 되고 여기에 사람의 눈높이를 더해 11m 가 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11이라는 숫자나 십의일조 라는 숫자가 유사하기도 하거니와 그 의도하는 바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에 성공한 사람은 어떤 물질문제에 있어서도 주인이 분명한 인생이 됩니다.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을 부리고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인생이 됩니다. 주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십일조 훈련으로 단련 받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진정한 정수를 맛보는 사람도 물질문제에 있어서 분명한 헌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물을 사용하는 곳에 실상 우리 마음도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색하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인색하다면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단체도 물질의 헌신이 있을 때 그 단체가 견고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22절과 23절에서 갑자기 눈에 대한 비유를 들어 보이십니다. 눈을 등불에 비유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눈이 성하면 마치 밝은 대낮을 걷는 것과 같이 우리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마치 깜깜한 밤길을 헤매듯 걸려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눈이 의미하는 바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라 할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자기 몸을 망치고 맙니다. 동서고금에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망한 사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들 중에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바흠이라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바흠은 평범하면서도 행복하게 살던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흠은 우연한 기회에 땅을 조금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얻은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욕심이 생겼습니다. 땅을 계속 넓혀가야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지방에서 땅을 싸게 준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땅을 파는 방식이 대단히 독특했습니다. 하루 종일 자기 발로 걸은 만큼의 땅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해가 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효가 됩니다. 

바흠은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계속 걷다보니 비옥하고 탐스런 땅들이 많아서 조금만 더 하다 보니 반환점을 돌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바흠은 마음이 급해 장화도 옷도 벗고 달렸습니다. 땀이 비오듯 했지만 조금이라도 멀리 가기 위해 마구 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겨우 해가 막 질 무렵 출발점에 도착했지만 바흠은 그만 심장이 터져 그 자리에 피를 토하며 죽고 맙니다. 바흠의 하인이 바흠을 땅에 묻었는데 그 땅은 겨우 2m 가 조금 넘는 규모의 땅이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한 평 남짓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물질을 절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무엇을 말할까요? 성경은 그것이 선행이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에서 주님은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나아온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가난한 자를 위해 베푸는 선행을 할 때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2장 33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재물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물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벌 수 있는 만큼 벌고, 저축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고, 줄 수 있는 만큼 주라”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부를 움켜쥐고 있으면 죄가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 왔던 부자들은 그들이 부자라서 그렇게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자로서 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해에 소출이 많아서 곡간을 넓히고 이제는 편히 잘 수 있겠다고 하던 부자에 대해서 주님은 어리석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물질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하늘에 쌓은 상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럽게 그 목숨을 잃고 나면 그 재산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나오는 부자가 심판받았던 이유도 그가 단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고 호의호식했기 때문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내어 놓았고,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 주어진 부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죄가 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돈을 많이 버십시오. 그리고 그 돈을 이웃을 위해서 잘 사용하십시오. 돈은 소유한 자가 아니라 잘 쓰는 자가 주인입니다. 돈을 소유할 때보다 잘 쓸 때 행복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은 단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대비하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을 유용하게 사용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곧 우리의 보화입니다. 

저는 지난 주에 “크로싱”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차인표 씨가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북한을 탈북했던 어떤 사람의 실화를 모태로 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떻게 하늘 아래 같은 땅에 살면서 저렇게 힘든 상황에서 살아야 하는지 가슴이 아팠습니다. 김용수라는 탈북자는 북한에서 어렵지만 그래도 단란하게 살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결핵에 걸렸는데 그 약이나 약을 구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쪽으로 탈북하게 됩니다. 국경선을 넘다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잡혀서 강제교화소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김용수 씨는 벌목 공장에서 일하다 중국 공안에게 쫓기다가 독일 대사관을 넘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동안에 아내는 결핵으로 죽게 되고 아들은 거지가 되어 헤맵니다. 영화 속에는 굶어죽는 아이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김용수씨는 한국에서 번 돈을 아들을 구하는 데 다 사용합니다. 아들을 강제수용소에서 구해내어 몽골 국경을 넘게 하지만 결국 아들은 몽골 광야를 헤매다 죽음을 맞고 맙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김용수씨는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는 남조선에만 산단 말입니까?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는 겁니까? 하나님도 잘 사는 나라에만 사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왜 북조선은 저렇게 내버려 두는 겁니까?”

마치 이 소리가 제 가슴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을 통하여 그들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같은 하늘 아래 우리 북쪽에 있는 우리 동포가 이런 처지에 있습니다. 금년에도 60만 가까운 사람이 기근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며칠 전에는 금강산에서 우리측 민간인이 북한 경비병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북한의 태도에는 우리가 이해 못할 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북은 이런 식으로 늘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남북 분단사에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들을 생각한다면 이번 사건은 정말 작은 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답답하고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큰 비극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한 형제요 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가 굶어죽고 있는데 우리가 외면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형제들이 죽어갈 때 너희는 무엇을 하였느냐고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좀이나 녹이나 도둑이 없는 영원한 하늘에 재물을 쌓는 현명함도 필요하지만, 네가 이 땅에 쌓은 보물이나 쓸데없이 낭비한 재물 때문에 정작 도움 받지 못하고 죽어간 형제들의 고통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썩고 있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침대 아래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그 신발은 신발 없는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장에 쌓여 있는 그 옷은 헐벗은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금고에서 값이 떨어지고 있는 그 돈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한 주 내내 묵상하다 “쉰들러 리스트”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는 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이 영화는 더 유명해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쉰들러는 폴란드에서 그릇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이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인정을 받아서 유태인들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쉰들러는 한 사람의 유태인이라도 더 고용하기 위해 자기 돈과 물건을 팔아 독일군에게 뇌물로 줍니다. 이런 덕분에 이 공장에서 일했던 1100명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지막 장면에서 쉰들러는 유태인들을 돌려보내며 한탄을 합니다. 그는 울면서 자기의 승용차를 팔았더라면 유대인 10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자기의 시계와 결혼반지를 팔았더라면 유태인 2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의 재물이 이처럼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이 된다면 얼마나 큰 보람이겠습니까? 하늘에 쌓이기도 전에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만족과 보람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채 다 못 사용하고 온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매우 부끄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냥 가만 있으면 자본주의의 물결이 우리를 정신없이 떠내려가게 만듭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결단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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