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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드온(Gideon)① : 큰 용사여! (삿 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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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Gideon)① : 큰 용사여! (삿 6:1~16)


I.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버렸을 때

오늘의 가치관은 한 미치광이가 주인없는 백화점에 들어가서 정가표시를 뒤죽박죽 해 놓은 것과 같다고 누군가 얘기했습니다. 1억짜리 골동품이나 보석에 있는 정가표시를 1만원짜리 티셔츠에 갖다 붙이고, 1백만원짜리 양복에 있는 정가표시를 수천만원 짜리 상품에 갖다 붙이고, 그것을 떼어다가 100원 200원 짜리 학용품에 갖다 붙인 꼴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위기가 바로 가치관의 혼란이었습니다. 
유목민 생활이라는게 젖 짜서 데워서 먹으면 그만이고 광야생활이란게 매일같이 만나를 먹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옷 한 벌을 입고 살았지만 40년동안 그 옷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았더니 가나안 사람들은 비단옷을 입고 사는 겁니다. 패션이 다릅니다. 먹고 사는 모양이 다릅니다. 양을 잡아 포도주를 곁들여서 먹는가 하면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서 올리브에 찍어 먹습니다. 저녁에 되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산당에 올라가 마음껏 쾌락을 즐깁니다. 눈이 뒤집혀 질만도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본받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부수고 좇아내고 물리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고 그들과 싸워서 좇아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들은 우리가 친하게 지내야될 친구들이 아니고 무당이고 창기요 마귀 사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이 왕되신 약속의 땅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약속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민족적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과 위기를 치료하시기 위해 따로 준비된 영웅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로 준비된 영웅이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의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기대하지 못했던 약자를 불러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자신은 아무래도 적임자가 아니라고 항의하는 인간들을 당신의 사역자로 쓰셔서 당신의 사역을 감당토록 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토록 연약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쓰임받을 때에 이토록 멋진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돌아올 때에 이 가나안 땅에서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중에서 중병든 이스라엘을 살려내기 위해 다섯 번째 사사로 등장하는 인물은 유명한 기드온입니다. 기드온하면 주일학교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신나게 들었던 이야기, 삼백명의 군사로 그 어마어마한 미디안을 물리쳤던 용장 중에 용장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어떤 집안에 아이들의 이름을 기드온이라고 짓는 집안이 있더라구요. 뭐냐고 물었더니 기드온을 한자로 쓰면 기돈이 된다고 그럽니다. 사실 기드온이란 이름의 뜻은 "나무 베는 자" "곡식 자르는 자"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드온을 성경 무대에 등장시키는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영웅도 용장도 아님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시킵니다. 

본문의 문이 열려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을 섬겼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번에는 미디안과 아말렉의 손에 넘겼습니다. 

미디안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이 구절을 통해서 이런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장격인 사람이 낙타 등에 앉아서 진두 지휘를 하고 진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면 낙타떼가 엄청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마을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겁에 질린 이스라엘 백성은 들에서 일을 하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해 보지만 약대 낙타 발굽에 수 없는 양민들이 짓밟혀 죽어갑니다. 그 뒤에 짐승 양과 소떼를 몰고 뒤따라 오는 수십만 메뚜기떼 같은 미디안 족속들이 대이동을 시작합니다. 추수된 곡식들은 낙타등에 실어지고 덜익은 곡식과 야채들은 짐승들이 다 뜯어먹고 짓밟아 순식간에 한마을이 토초로 변하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미디안이 어떤 족속인가? 성경속에서 우리는 미디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에 그의 후처로 그두라라는 여인을 맞이합니다.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 미디안입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과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요단 동편으로 그두라와 미디안을 좇아냅니다. 그들이 바로 미디안 족속입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갈 때에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가지요. 모세가 광야로 도망하여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서 양을 칩니다. 그리고 이두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게 되지요. 미디안 족속 가운데 이스라엘 족속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이 있었고 심지어는 이스라엘로 귀화한 미디안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미디안은 베두인과 같은 말입니다. 유목민, 유랑민이란 뜻입니다. 낙타는 물을 먹지 않고도 4일을 여행할 수 있는 짐승인지라 미디안 사람들은 낙타를 이용해 가나안 이마을 저마을을 휘젖고 다녔습니다. 때문에 도시에서 자리를 잘 잡고 정착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못했고 뒤늦게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새롭게 정착해서 촌락을 이루고 농사를 짓고 살던 이스라엘 몇몇 지파에게 큰위협이 되었던 족속이지요.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살던 지파가 이스르엘 세겜평원에 살던 므낫세 지파였습니다. 오늘 기드온이 바로 므낫세 지파의 사람으로 사사의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미디안과 함께 이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힌 족속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3절에 보면 아말렉 족속입니다. 아말렉은 누구인가? 이삭의 아들 가운데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이 약속의 아들입니다. 이 에서가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밖에 나가서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엘리바스입니다. 이 엘리바스가 결혼을 한 다음에 또 후처를 얻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아말렉입니다. 출애굽하는 과정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해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여호수아 사령관이 전쟁터에 나가서 진두지휘합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적군이 이기잖아요. 바로 그때 이 적군이 아말렉 족속들입니다. 아말렉 역시 유랑민 베두인들이었습니다. 주변 부족들과 힘을 합쳐서 심심찮게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왕궁이 건설된 다음에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에게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시켜라. 이 아말렉을 진멸시키지 않으면 두고두고 이스라엘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사울 임금이 불순종하여 아말렉의 씨를 남겨둡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힌 족속이 아말렉족속입니다. 

6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또 악을 행했다. 다시 악을 행했다. 야샵. 상투적인 문구입니다. 2절에 보면 상투적인 문구 다음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한 설명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고양이를 보고 겁에 질린 생쥐새끼들이 굴속에 숨어들 듯이 미디안과 아말렉을 보고 놀라고 또 놀라서 쫓기고 쫓겨서 깊은 산속 토굴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숨어서 살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민이 가장 초라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거둔 곡식을 다 빼앗아 가더니 이젠 3절에 아예 파종을 못하도록, 파종을 해 놓고 나면 싹이 파릇파릇 올라올 때 짐승떼를 몰고 들어와서 그 싹을 다 뜯어먹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사라지라는 겁니다. 지구를 떠나라는 겁니다. 마귀는 우리가 저들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도망가면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몰아 죽이겠다고 덤빕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겪을 때에 그것을 헤쳐나가고 문제를 짓밟고 일어서야지 문제에 짓눌리고 파묻혀 살아갈 때에 우리를 막다른 골목, 저 산속으로 몰아서 지구 밖으로 몰아내려고 하는게 마귀의 전략입니다. 믿음과 성령의 능력을 우리가 발휘하지 못하면 우리를 아예 이 땅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회가 조금 위축되는가 싶으면 온갖 잡귀들이 덤벼들어 교회를 박멸하겠다고 덤벼듭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세상이 우리를 변질시키기 위해서 온갖 것들이 다 일어나 교회를 짓밟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곳 저곳, 이산 저산으로 쫓겨다니라고 가나안 땅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산도 정복하고 들도 정복하기 위해서 보냈습니다. 가나안의 주인 패권자가 되라고 보낸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버렸더니 정복자가 정복을 당하는 꼴입니다. 적을 쫓아내야 할 주인이 쫓겨다니는 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교회가 권세와 능력을 잃어버리면 이꼴 된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세상을 복음의 능력으로 감동시키지 못하면 저들은 우리는 격력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구촌에서 몰아내려 합니다. 우리의 영향력을 소멸시키고 박멸시키려 덤벼듭니다. 오늘 이 현장의 모습은 오늘 우리시대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우리교회의 모습이요, 우리 가정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I. 애처로운 부르짖음

이 엄청난 위기속에서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어덯게 돌파했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중병환자가 된 이스라엘은 이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부르짖었다는 말이 두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통이 심했다는 뜻이고 부르짖음이 처절하고 애처롭게 들렸다는 얘기이지요.

이곳저곳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100년전 두배나 악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 이 백성을 구원한 옷니엘 같은 사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거구 에글론을 단칼에 죽인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라도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철기군 600명을 때려죽인 삼갈같은 사사를 이 땅에 보내주십시오.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철병거 구백대를 기손 강에 수장시키고 시스라 대장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버린 드보라와 바락과 야엘이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그날은 하늘의 별들이 일어나 우리를 대신하여 싸웠고 강물이 벌떡 일어나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 애처롭게 처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이 애처로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한 자루의 칼이지요. 힘쎈 장수가 필요합니다. 한 됫박 쌀이 그립습니다. 
7절 "부르짖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쌀을 가정마다 말로 가마니로 갖다 주었다 이런 말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8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이름없는 무명의 선지자를 이스라엘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무기를 싸 짊어지고 온 것도 아니고 군사를 모아준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위해서 이름없는 한 사람의 설교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설교자를 보내서 애굽에서 너희들을 건져내면서 얼마나 엄청난 기적으로 함께 하지 않았느냐. 다 잊어버렸느냐. 수많은 적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몰아내지 아니했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아니했다. 하나님을 버렸다. 약속의 땅에 와서 약속을 잊어버렸으니 하나님의 약속을 너희들이 먹고 살수 없게 된 것이 아니더냐. 이 메시지입니다. 

왜 더 열심히 일하지 않았느냐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무기를 다듬고 국방을 소홀히 했느냐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악과 싸우라고 가나안 땅에 들여보냈더니 악과 한통속이 되어버렸고 우상을 파괴하라고 가나안 땅에 들여보냈더니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가나안의 가치관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 했더니 아예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이 먹고 사는 것을 너희들이 먹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III. 큰 용사여!

이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한 다음에 여호와의 사자가 말라흐 야훼입니다. 출애굽할 때 함께 하셨던, 광야 여행에 함께 하셨던,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말라흐 야훼가 기드온을 찾아왔습니다. 말라흐 야훼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왔을 때 기드온은 포도주틀 속에서 나락을 까고 있었습니다.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부지갱이로 밀 한 다발을 들고 톡톡톡 두드리며 타작이라고 하고 있는 꼴을 하고 있습니다. 밀 타작은 타작마당에서 하는 것이지요. 왜 조그마한 포도주 틀에 들어가서 타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보라는 듯 타작마당에서 타작을 하고 싶지만 미디안 군대가 와서 다 빼앗아 가니까, 그러다가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우니까, 이 얼마나 비참하고 어이없는 꼴입니까? 포도주 틀은 밀 타작장이 아니지요. 굴욕감을 느끼는 이 꼬락서니. 이게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기드온의 모습이요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너의 모습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평화로울 때면 이곳에서 포도를 떨며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포도주를 담그는 그릇이었습니다. 지금 그 행복 어디 가고, 기쁨은 어디 사라지고 이꼴을 하고 있냐는 것이지요. 

여호와의 사자가 이 초라한 꼴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찾아와서 뭐라고 부릅니까? 야 이놈아 이게 무슨 꼴이냐? 이러구 머리를 쓰다듬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가슴을 좍 펴더니 "큰 용사여!" 그럽니다. 놀리는 얘기이지요. 비꼬는 얘기 이지요.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 - 깁보르 헤 하일. 능한 용사여.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약 오르라고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장 영광스런 이름으로 그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큰 용사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타고난 용사기질이 있어서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큰 용사로 쓰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큰 칼을 휘두를 때 큰 용사여~ 이렇게 불러주셨으면 얼마나 폼이 났겠어요. 부지갱이 들고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나락단 톡톡톡 두드리고 면도날로 밀알 까고 있을 때에 큰 용사여!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얼마나 자기 꼬락서니가 우스웠을까요? 

큰 용사여! 이 말씀은 듣기 좋으라고 한 덕담 정도로 한 얘기가 아닙니다. 아마 기드온은 이 어르신이 시국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고 세상물정을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 있을까? 우리 민족이 당한 위기를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 있을까? 지금 덕담할 때냐? 가슴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겁니다. 

하나님이 큰 용사로 지금 기드온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들어서 큰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기드온이 본문 15절에 보면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겸손떨기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희망을 가질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나는 비천하고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입니다.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기드온을 놀리기 위해서 큰 용사라 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기드온의 모습은 작은 자입니다. 초라합니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꼬락서니를 하고 있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을 구원하는 큰 용사로서 너는 쓰임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큰 바위 앞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고 있었습니다. 이보게 친구 지금 뭐하고 있는가? 보게나 지금 저 바위안에서 춤추고 있는 다윗왕이 보이지 않는가? 법궤가 도착했을 때 바지가랭이가 내려가도 모를 만큼 너무 기뻐서 춤추고 있는 다윗 왕이 보이지 않는가? 아니 바위속에 무엇이 보이는가? 나는 이 바위를 다듬어서 춤추는 다윗 왕을 만들 것일세. 길바닥에 버려진 바윗덩어리 하나에서 춤추는 다윗을 미리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춤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큰 용사여! 이 초라한 기드온을 들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실 것인가 미리 보았기 때문에 큰 용사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기잡이를 하던 시몬이란 젊은이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를 반석이라 부르겠다. 베드로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배운게 많은 사람이 아니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헌신과 눈물과 땀과 피흘림을 통해서 앞으로 교회에 엄청난 반석의 역할을 할 것을 우리 주님은 미리 보시고 그 이름을 반석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는 걸핏하면 넘어졌고 걸핏하면 변덕을 부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베드로, 반석이라고, 게바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남자 품에서 내일은 저 남자 품에서 밤을 지새우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려 했던 뭇 남성들이 떠나고 난 다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자기를 창녀라 생각하고 살아가던 여인에게 아니다. 너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면 성녀가 될 수 있다고 주님께서 그를 보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을 쓸때마다 하나님 앞에 그 교회를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려고 하니까 감사 제목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단에 오염되어 있질 않나? 교회는 갈기갈기 분열되어 있질 않나?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는가 하면 음란이 교회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었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광스런 모습을 할 그날을 바라보며 그날에 이미 이루어 진 줄로 믿고 끌어다가 감사를 가불해 다가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눈이라 하는 것입니다. 

큰 용사여! 라고 불러주셨다면 기드온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아버지에게 달려옵니다. 아빠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어요. 어머니 드디어 하나님이 나를 불러 쓰시겠대요. 친구들아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 우리 함께 가세 달려나가세. 저 미디안을 물리치세. 이래야 될텐데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겨있던 불평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면도날로 밀알 떨고 있으니까 부지갱이로 타작하고 있으니까 우습습니까? 나라고 이꼴 하고 싶겠습니까? 보란 듯이 타작마당에서 태산처럼 쌓아놓고 타락하고 싶습니다. 나락가마를 어깨에 걸머지며 콧노래를 부르며 내 창고에 알곡을 쌓고 싶습니다. 어지간하면 이꼴을 하고 살고 있겠습니까? 나를 놀리니 좋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 꼴을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하고 광야를 여행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며 수많은 이적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 조상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기적이 왜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 꼴을 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제가 하나님 같으면 알았다 이놈아. 나도 너 같은 놈 쓰기 지긋지긋하다. 어지간해야 너를 쓰지. 이쯤되면 기드온을 하나님께서 버리실 만도 한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IV. 이 너의 힘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이토록 비참한 일이 우리에게 왜 일어났느냐고 항변하는 기드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출애굽할 때 있었던 이적이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오늘은 왜 이런 이적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반항하는 기드온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의 항변에 아랑곳하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너의 힘으로 가라. 그리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내라" 

포도주 틀속에 숨어 밀알이나 까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자에게 오셨다면 그리고 그를 큰 용사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셨으면 - 아멘! 감격해 하며 울며 일어났어야 옳았지요. 그런데 기드온은 지금 여호와의 사자에게 덤벼들고 있습니다. 미디안에게 당한 고통을 분노를 하나님께 터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드온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미디안을 무찌르는 일을, 저 고통가운데 백성을 일으켜 세워서 구원하는 일 - 네가 해라" "제게 그런 힘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 이것이 너의 힘이니라" 네 힘이 무엇이냐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힘 말고 무슨 힘이 필요하느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능력 말고 무슨 능력이 너에게 더 있겠느냐? 이적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는 이것이 이적이니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는 이적을 네가 보면 네가 가는 곳곳마다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리라.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16절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삼갈이 육백명을 죽였다고, 에훗이 악한 왕을 단번에 칼로 찔러 죽였다고, 드보라가 1만명으로 싸워 이겼다고, 너는 한명을 무찌르듯이 메뚜기떼 같은 저 미디안을 물리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여기 기드온은 당시에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부지갱이로 낱알를 떨고 있는 이 꼴이 이스라엘의 꼴이요 큰 용사가 되어 단 300명의 군사로 수십만의 미디안을 무찌르는 이 모습도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초라한 꼴을 하고 오늘은 여기서 짓밟히고 내일은 저기에서 깨지고 모래는 저기에서 조롱받는 이 초라한 꼴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기드온의 모습이요 민족을 구원하고 북녘의 동포를 살려내며 실크로드를 지나서 예루살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아멘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이 지구촌을 송두리째 구원하는 그 날의 영광스런 모습도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초라한 모습 오늘도 실패하고 내일도 빛은 꺼져가고 있고 소금은 맛을 잃어가고 있고 영광스런 빛을 잃어버린 이 초라한 모습도 나의 모습이요 큰 용사여!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연약한 나도 약점 많은 나도 큰 용사로 쓰임받는 그 빛나는 황홀한 모습도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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