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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질과 신앙 (마 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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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신앙 (마 6:19~34)


요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경제와 건강입니다. 그 중에서도 경제에 관한 관심이 더 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경제에 관한 관심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물질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합니다. 예수님도 물질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가 38개입니다. 그 중에서 16개 이상이 물질에 관한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6분의 1이 돈과 소유에 관련된 말씀이고, 예수님이 하신 가장 위대한 산상설교의 3분의 1이 돈과 소유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기도보다 물질에 관한 관심이 더 큽니다. 성경에 기도에 관한 언급이 5백번 정도 나오는데 비해 물질에 관한 언급은 2천 번이 넘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물질이 신앙생활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물질관 즉 하늘나라의 경제관을 가져야 합니다. 

한번은 침례교 신자가 주머니에 지갑이 있는 것을 깜빡하고 침례를 받으려다가 갑자기 지갑생각이 나서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 주머니에 지갑이 들어있는데 지갑을 빼고 침례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그분에게 “당신의 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진짜 신자, 진짜 신앙의 시금석은 그 사람의 경제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갑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물질관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서 물질과 신앙을 연결시켜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늘나라의 물질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1.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십시오.

10절에서 주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아야 할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땅에 쌓는 것은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9절에 보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야 할 이유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보물로 간주되었습니다. 

첫째는 옷을 보물로 여겼습니다. 이 시대는 옷이 흔하니까 아무런 보물이 되지 않지만, 옛날에는 옷이 매우 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보관 방법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입지 않고 보관해두면 좀이 먹었습니다. 옷을 쌓아 두는 것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금과 같은 보화가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보화를 주로 어디에 감추었습니까? 마13:44에 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밭에 보화를 감추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낮에 나가서 밭의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밤중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 가서 밭을 깊이 파고 그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 열어보면 보물들이 녹이 슬어 있는 경우가 흔했던 것 같습니다.
 
셋째는 그 당시에는 곡식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든 때였습니다. 그래서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곡물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창고에 곡식을 쌓아두는 것도 그리 안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그런지 도둑이 많았습니다. 창고에 곡식을 쌓아 두면 도둑이 들어서 훔쳐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는 것이 안전하고 자기에게 큰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위하여”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막 10:29-30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은행에 저축을 하면 이율이 얼마나 됩니까? 한 4.5%나 됩니까? 4.5%도 굉장히 센 것입니다. 또 이율이 어느 정도 된다 하더라도 물가상승률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경우는 이율은 백 배라고 했습니다. 10,000%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보다도 더 확실하고 수지맞는 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하늘나라 은행은 안전합니다. 결코 부도가 나는 법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게 될 경우에 만기가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금세에는 백 배나 받고, 내세에는 영생까지 겸해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확실한 투자입니까?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영락 교회를 설립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영락 교회를 건축할 당시에 교인들의 수가 대략 150명 가량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서 성전기공예배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은 그 당시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우리의 물질을 바쳐야 합니다. 십일 먹을 양식만 남기고,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위해서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 기공예배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뒤에 기공예배를 드리는 날 150명의 교인들 가운데 53명이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십일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 뒤 30년이 흘렀습니다. 교회설립 30주년이 되었을 때 목사님이 한 번 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십일 먹을 양식만 남기고 다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십일 동안 먹고 난 뒤 그 뒤에는 다 굶어죽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53명이 하나같이 한국의 300대 재벌 속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970-,80년대에 한국에 현신애 권사라는 유명한 신유사역자가 있었습니다. 현신애 권사님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 속에서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자기가 있을 집을 보여주는데 자기의 집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왜 자기 집이 이렇게 초라하냐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기를 현권사님이 세상에 있을 때 하늘로 올려 보낸 것이 너무 보잘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현 권사님은 너무 놀라서 자기 이름으로 가지고 있던 기도원과 재산을 팔아서 북한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21절에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가면 물질이 가게 되어 있고 물질이 가면 마음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남자 집사님 두 분이 함께 차를 타고서 기도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운전을 하는 집사님이 실수를 해서  자동차가 미끄러져서 실개천에 기우뚱하게 기울어졌습니다. 밤중이라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두 집사님은 그냥 차를 두고 걸어서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두 집사님이 밤을 새워 기도를 하는데 기도의 내용이 서로 달랐습니다. 자동차 주인 집사는 앉자마자 “하나님, 제 차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꼭 좀 지켜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밤새도록 계속 그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같이 간 다른 집사님은 탄광을 운영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밤새도록 “하나님, 우리 탄광에 물이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답니다. 이처럼 물질이 있는 곳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이 쏠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땅에 보물을 쌓아두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가게 되겠습니까? 땅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게 될 경우에는 자연히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게 마련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게 되면 영적인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물 이야기를 하시다가 22, 23절에서 갑자기 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지만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영적인 눈이 어두어지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영적인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물질에 욕심을 부린 사람들은 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불행을 경험했습니다. 롯의 처는 물질의 욕심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고, 아간은 물질의 욕심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고, 게하시는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물질의 욕심을 버린 사람들이 영적인 눈이 열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졌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엄청난 돈을 드려서 방주를 지었기 때문에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잡은 고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를 수 있었고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물질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물질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모든 재산을 헌금하거나 성 프란시스처럼 옷 한 벌만 남기고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 청지기로 사는 것입니다. 물질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게 100만원이 있다면 그 돈을 다 헌금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용도에 맞게 쓰는 것입니다. 다 헌금하기를 원하신다면 헌금하고, 다른 용도에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면 다른 용도에 맞게 써야 합니다. 


2. 물질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25절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염려는 해롭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는 신앙생활에 해롭습니다. ‘염려’라고 하는 헬라 원어는 ‘메린나우’인데 이 말은 ‘마음을 나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마음이 하나님과 재물로 나뉘게 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배우자가 몸은 여러분에게 있는데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 가정생활이 계속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물질에 가 있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염려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자신에게 해가 됩니다. 염러라는 말에는 ‘물어뜯는다’ 또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는 무서운 의미가 있습니다. 염려는 염려하는 사람을 질식시켜 버리는 무서운 것입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자기 목을 조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 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무익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합니다. 27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키 작은 사람이 염려한다고 키가 커지는 것이 아니듯 우리가 염려한다고 상황이 염려 때문에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은 염려하는 것은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고 가속페달을 밟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밟아도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엔진이 죽어라고 돌아가도 자동차는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소리는 요란하게 나고 기름은 소비되지만 자동차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아서 랭커라고 하는 사람은 조그만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잘 안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매일 불안하고 걱정으로 하루하루 고민하며 사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래가 밝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내가 이렇게 매일매일 염려에 시달리며 살게 아니라, 염려하는 날을 정해서 그 날만 염려를 한꺼번에 하고 평소에는 염려를 하지 말아야 되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랭커’는 한 주간의 수요일을 염려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염려하는 날 박스’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평소에 염려거리가 생기면 그 염려의 내용과 그 염려가 생긴 날짜를 쓴 카드를 그 함에 집어넣는 겁니다. 당장 염려가 되지만, 수요일에 한꺼번에 염려하기로 하고 그 쪽지를 집어넣고 잊어버리는 거예요. 날마다 그렇게 하고 수요일이 되면 함을 열고 자신의 염려거리가 뭔지 한꺼번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불과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거의 다 이미 해결이 됐거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문제로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아서랭커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와 같이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일로 염려하고 살고 있으니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26, 28-30절). 공중의 새를 보십시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먹이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제비를 생각해 봅시다. 제비가 하루에 줄잡아 7000마리의 곤충을 갖다가 새끼들에게 먹입니다. 그래서 새끼를 키우는 3주간 동안에는 약 15만 마리를 먹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제비가 한 두 마리입니까? 그 많은 제비를 하나님이 먹이시고 키우십니다. 제비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친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벧전 5:7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내가 맡기느냐 맡기지 않느냐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 중심으로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봅시다. 

고아원에서 살던 어린아이가 좋은 가정에 입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입양한 양부모님은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자기의 친자식처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먹을 것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만이 아는 곳에 몰래 숨겨둡니다. 그래서 양부모는 방청소를 하든지 또는 빨랫감을 찾기 위해서 구석구석 뒤지다가 보면 숨겨놓은 음식물을 발견하고는 했습니다. 고아원에서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그렇게 음식물을 감출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 밑에서 그렇게 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사랑으로 잘 돌보아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음식물을 계속해서 숨긴다는 것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섭섭하게 만드는 불신의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궁급해주시는데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공급을 믿으시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E.M. 그레이라고 하는 교수가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비결을 연구해서 공통점 몇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게으른 자에게는 성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운이 좀 따랐습니다. 이분이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리스도인이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을지도 모겠습니다. 아무래도 인간의 힘만 가지고는 안 되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같이 인간관계가 좋았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원수지고 비방하고 그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세 가지 특징보다 더 중요한 것,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습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 소중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거기에 정력을 쏟았습니다.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실천을 했습니다. 그것이 성공한 사람들의 강력한 특징입니다. 

산을 올라갔다가 조난을 당했다고 합시다. 내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자꾸 산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가면 안 됩니다. 등산 전문가들은 ‘길을 잃었거든 올라가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저 밑을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정한 다음에 내려가라’했습니다. 조난은 이렇게 해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무조건 움직이기보다 먼저 가야할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은 반드시 필요하고 유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내가 추구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것을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33절에서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4무(四無)주의 시대’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네 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첫째, 무감동의 시대입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를 일컬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마 11:17)’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감동을 잘 받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이 시대는 무책임의 시대입니다. 정치인도 경제인도, 그리고 지식인도 모두가 책임을 회피합니다. 자기는 책임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킵니다. 다윗은 위대한 성군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밧세바입니다. 

어떤 문헌에서는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단 한 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에 여러 번 참회의 시가 나오는데 거기서도 단 한 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그 일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셋째, 이 시대는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입니다. 서로가 아무런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모두가 나만을 생각합니다. 내 유익, 내 편안함, 내 행복에만 집착한다. 넷째, 이 시대는 무목적의 시대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세상적이요 욕망적이요 마귀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현수막에 쓰여 있는 글귀처럼 목숨을 걸만한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이 피곤하고 손해를 보는 듯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사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준비하고 그 사명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생의 방향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사명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이 무엇인지를 획인하고 인생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스티븐 코비는 정북향의 원칙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길을 가다가 방향을 잃으면, 정북향을 바라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북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행동하면 방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길을 잃으면 사명을 찾으십시오. 사명감을 회복하고 다시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를 부른 부름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명에 인생을 거십시오.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사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함이 되어야 합니다. 
주후 1141년 중세 시대에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바바리아 제국의 울프 공작은 와인스버그에 있는 자신의 성 안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스와비아 제국의 콘라드 왕이 형 프레드릭 공작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와 울프 공작이 살고 있는 성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포위를 당한 울프 공작은 마침내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신들이 오가고 항복 문서가 전달되었습니다.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조건들이 정해졌습니다. 

울프 공작과 여러 신하들, 그리고 성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의 문제는 완전히 콘라드 왕의 손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와인스버그의 여인들이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콘라드 왕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성 안에 있는 여성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성을 떠날 때, 두 팔로 안고 갈만큼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안고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도 요구하였습니다. 여인들의 이 요구는 쾌히 받아들여졌습니다. 마침내 성문이 활짝 열리고 여인들이 하나씩 걸어 나오는데 나오는 여인들의 팔에는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한 아름 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금은보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남편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온 힘을 다하여 두 팔로 자기의 남편들을 안고 나왔습니다. 그 뜻밖의 모습을 지켜 보던 콘라드 왕은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콘라드는 그 자리에서 여인들에게 그들 남편의 자유와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그들 모두를 연회에 초청하고,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바바리아의 울프 공작과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 성은 그 이후 ‘여인들의 헌신’이라 불려지게 되었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무엇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미래, 가정의 미래, 교회의 미래, 세상의 미래,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가 달라질 것입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들고 달려갑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합시다.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물질과 신앙에 관련하여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십시오.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사용하십시오. 둘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요즘은 경제가 나무나 어려워지고 있어서 걱정이 많으실 텐데 모든 염려를 주님에게 맡기십시오.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이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셋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만한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십시오. 사명을 위해 준비하고 사명을 위해 공부하고 사명을 위해 돈을 벌고 사명에 모든 것을 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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