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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간 점검 (잠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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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점검 (잠 16:1~9)


우리의 삶 가운데 목표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인생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표만 있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자기 관리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앞만 보고 나갑니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려 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저마다 너무나도 바쁘게 살아갑니다.   자신을 한번 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냥 앞만 보고 달려  나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뛰고, 또 정신없이 달리고 있지만, 정작  자기의 현재 위치를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목표에 다다르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수시로, 자주자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아직 가지 않은 남은 길을, 효과적으로 달려갈 수 있고, 또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완주하도록, 페이스를 잘 조절할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 있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중간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무엇을 살펴보아야 할 것인가?   세 가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줄로 압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현재에 내 신앙의 모습을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무엇이 되어야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향한 믿음, 이것이 지금 내 신앙에 있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삼 1 : 2절에 말씀하지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네 영혼이 잘 됨같이....  우리의 육신보다는 영혼이, 언제나 먼저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모습이 어떠한가?  그래서 지혜로운 성도들은, 자신의  인생에 문제가 생길 때에, 먼저 이것을 살펴볼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영적인 데 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꾸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찾게 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다른 환경들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모든 노력이 결국은 다 허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인생의 문제를 푸는 키가, 그런 것에 있지를 않기 때문이지요.  어디에 있습니까?  인생의 문제를 푸는 키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하지요?  시 18 : 1 - 2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할렐루야!!!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간절합니까?   참으로 많은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이 모든 표현들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인생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으로,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며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모습이, 지금 내 신앙 가운데는 나타나고 있는가?  특별히 올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에, 지금 내 신앙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올 2008년도도, 이제 절반이 지나나고 있지 않습니까?   
벌써 6월 달이 다 지나가고, 이제 곧 7월 달을 우리가 맞이합니다.  
한 해의 절반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데, 과연 나는 이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는 동안에 무엇을 하였는가?  올 해가 시작될 때, 나름 신앙의 목표를 새롭게  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목표들이, 지금 현재 얼마나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세운 그 목표에, 얼마나 가까워져 있습니까?  얼마나 이루어 놓고  있습니까?   지금 나는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지금 하나님 앞에 제대로 예배하고 있고, 또 하나님 앞에 바르게 기도하고 있는가?  봉사나 헌신도 마찬가집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런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는, 중간 점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결코 남은 6개월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 하다가, 여느 해와 다름없이,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만, 발견하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치, 그런 자신의 모습이 정상적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판단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아멘!! 오직 신앙의 판단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세요.  같이 읽어 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아멘!!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내 신앙의 모습이 내가 생각할 때는  괜찮은 것 같애도, 하나님 보시기엔 전혀 괜찮지 않게 보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내 신앙을 판단하실 때에 괜찮은 신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이 판단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한 두 사람의 판단이 아닙니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판단하는 소리를 들어 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성도들이 입술에서 나온 평가는, 곧 하나님이 나를 향한 평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  하시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나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똑바로 해라.  내가 지금 너를 향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 배려인가?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음성을 들려  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죄악 중에 죽는 것입니다.  

신 4 : 33절 말씀을 보세요.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누구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진노 가운데 듣고 산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사람의 입술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아멘!!!   
그래서 우리가 주변 사람들이 나를 향해 좋지 않게 평가하는 그 소리에 발끈하며 성을 내고 받아칠 것이 아니라, 그 소리가 곧 하나님의 소리인 줄 알고, 오히려 겸허하게 낮아진 가운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미워합니다.  배척합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자기 고집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여전히 예배도 잘 안 드립니다.  기도도 잘 안 합니다.  
그렇다고 봉사를 합니까?  헌신을 합니까?  전도를 합니까?  아무것도 안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신앙인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 외에는, 별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낼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나름 신앙생활 잘 하는 줄 알고, 자신에게 닥친 신앙의  위기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모습, 성경에도 나타나 있지요?  어디서 이런 모습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 3 : 15, 16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미지근한 신앙, 죽도 밥도 아닌 신앙, 이런 신앙이 결코 주님이 기뻐하지를 않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책망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정작 자기 스스로는, 정말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주님이 바라보실 때, 그들의 실상은 너무나도 형편없고, 초라한 신앙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탱해 주는 신앙의 두 기둥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한 기둥은 예배이지요.   그러면 또 한 기둥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인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예배와 기도는 그 성격이 좀 다릅니다.  예배와 기도를 옷에 비유를 했을 때, 예배는 겉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언더웨어, 속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멋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옷을 잡 입는 사람,  이 겉옷과 속옷을 잘 갖추어 입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멋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속옷을 잘 갖춰 입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말 멋쟁이들은, 겉옷보다 속옷에 더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덜 멋진 사람들은 겉옷에만 신경을 쓰지요.  속옷은 별로 신경을 안 씁니다.  
왜요?  안 보이니까?    그래서 속옷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안 가집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의 사람들, 완전 못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속옷도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드러나 보이는 겉옷도 형편이 없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예 옷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겉옷과 속옷이 형편이 없는 사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좋겠습니까?   옷만 더러운 것이 아니지요.  
옷을 더럽게 입는 사람들은 또 냄새도 고약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게 되고, 그 사람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 주변에 있는 성도들이, 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고, 나를 멀리한다면, 그 원인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 이것은 사실 신앙의 기본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기본적인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 겉옷인 예배는,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입고 들어가는 예복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는,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채,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예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고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 그들의 결국이 어찌  되었습니까?   여러분, 마 22 : 12절 이하를 보세요.  한번 찾아봅시다.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런 성도들의 인생에, 결국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나는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여러분, 이 말을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다 주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원으로의 청함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사람들은, 청함이 아닌, 택함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무슨 택함입니까?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성도로서의 택함,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기에 합당한 성도로서의 택함...  
이런 택함을 받는 성도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기위해서는, 우리가 무슨 예복을 입어야 한다?  예배의 예복을 입어야 한다. 씨에프에 나오는 어느 모델과 같이, 예복 잃어버리고, “내일은 뭐 입지?”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찾아 와도, 내가 입고 있는 이 예배의  예복을 언제든지 보여 드릴 수 있는 신앙.  그런 신앙이 지금 나의 신앙인가?  
우리가 이것을 중간 점검을 통해,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기도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앙의   진정한 멋을 드러내는, 속옷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의 신앙생활이, 지금 여러분 가운데,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것을 또한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중요한 인생의 때에, 낭패를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 친구의 경험담 하나를 이야기 하지요.  정말 중요한 회식자리에 그 친구가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친구는 회식이 있는지도 모르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여서 가보니까, 회식자리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회식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데 하나 같이 다  양복을 벗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양복 윗도리는 벗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안에 입은 와이셔츠를 다려 입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완전 꾸짓한 옷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앞에만 다려 입었기 때문에, 팔이나, 와이셔츠 뒷부분은 그대로 꾸겨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차마 벗지를 못하고, 그냥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식당이 또 얼마나 더웠는지...  땀은 흐르지, 벗자니 챙피하지요..  
하여튼 죽을 맛이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  
“아니 김 선생도 옷을 좀 벗지 그래?”  “제가 좀 몸살기가 있어서.. 저는 좀 춥습니다.”  “땀 흘리고 있는데?”  “아, 이거요.  식은 땀 입니다.”  

그런데 진짜 웃기는 것은, “아, 그래, 그러면 무리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  그래서 그 회식 자리에서 맛있는 것도 못 먹고, 그냥 그렇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결국 제외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성도들의 인생이,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에 중요한 순간에, 낭패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은,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인생입니까?  
지금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솔직하게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간 점검이 필요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새롭게 점검해 봄으로, 남은 6개월은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축복 속에 올 2008년도 한 해를 마감하고, 이후로도,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런 귀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택함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우리는 또 무엇을 중간 점검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까?  
현재 자신의 생활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내 생활 속에서, 얼마나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있는가?  
지금 나는 주변의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냉철하게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에 대해 생각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신앙생활은 그저 교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도들에게 신앙을 인정받고, 목사님에게도 칭찬 듣고...  
그러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신앙생활 하지 못하는 성도들도 많이 있지요.  그 분들에 비하면,  이 분들은 정말 좋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도 엄밀히 말하면, 반쪽짜리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른 신앙생활을 말씀하실 때, 십자가를 지는 신앙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눅 9 : 23절에 보세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날마다 무엇을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했습니까?  제 십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날마다  지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 22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시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믿습니까?   

두 가지의 계명을 주셨다는 겁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의 이웃들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관계를, 신앙으로 잘 맺어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두 막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까? 

하나는 종으로 된 막대이지요?   이것은 우리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횡으로 된 막대이지요?  이것은 우리 성도들과, 세상의 이웃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막대가 잘 역어져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십자가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가는 것이, 온전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두 막대 중에 종으로 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는 막대가, 횡으로 된 이웃과의 관계를 뜻하는 막대보다 긴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횡으로 된 막대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으로 된 막대에 더해야, 비로소 온전한 십자가가 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신앙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거의 교회 안에서만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지, 결코 생활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은 무엇입니까?  주일이 아닌, 나머지 6일 동안에 우리의 신앙을 힘써 표현하는 것이,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잘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신앙생활이라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 7절을 보세요.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무엇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까?  사람의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행위입니까?  

이웃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행위, 어떻게든지 이웃들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들어 가려는 행위, 이런 행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롬 12장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산 제사요,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렐루야!!!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대하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들에게 언제든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활 속에서 드리는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과의 관계를 좋게, 아름답게, 덕스럽게 잘 맺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이웃들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서먹서먹한 정도가 아니예요.  원수처럼 지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서로 헐뜯고, 싸우고, 비난과 욕설이 난무한 그런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런 싸가지 없는 사람들은 교회 안 나와도 되요.”  “괜히 그런 사람 교회에 오면 교회 분위기만 흐려져요.”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보세요.  바로 그 사람이, 저와 여러분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무슨 교회에 나올 자격이 됩니까?   천국은커녕, 교회에 조차 나올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그런 죄 많은 우리들이었지만, 우리가 지금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 하고 있고, 또 영광스런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인 줄 믿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가 교회 나올 수 있고, 또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 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기회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요?  이웃에 대한 미움으로, 이웃에 대한 시기심으로, 이웃에 대한 악감정으로, 그들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을 훼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비하심으로, 은혜의 기회가 그들에게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정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의 편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내가 미워하는 이웃의 편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편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믿는 내 편을 들어주시지요.”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불신 이웃의 편을 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그들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무식하고 패역하게 행동할 뿐이지, 알면 그렇게 안 할 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알면서도 안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안 합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고,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셨는데, 분명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누구의 편을 드시겠습니까?   당연히 불신 이웃의 편을 드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억울해서 기도하지요?  “하나님 네 원수를 갚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어찌 저 마귀의 자식에게 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가 응답 되겠습니까?   응답 될 리가 없지요.  계속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면, 아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쯧쯧, 저렇게 철이 없나?  그렇게 못 깨달아?  내가 저만의 하나님인가?  네 이웃이 어찌 마귀의 자식이야?  그들도 내가 사랑하는, 내가 택하시기로 작정한 내 자녀들이야. 내가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데, 네가 초를 치고 있어.  그러니 네가 정신 차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들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잘 맺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들도 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다만 탕자와 같이 집을 나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웃을 무시하고, 불화한 것은,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을 무시하고, 불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 아버지인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부모인 입장에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싸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형과 아우가 싸웁니다.  누구를 나무라겠습니까?  철이 든 형을 나무라겠지요. 바로 그와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인내하며, 불신 이웃을 자비함으로 대하게 되어지면, 오히려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 주시고, 화목을 이룬 노력을 인정해 주셔서, 큰 상급으로 내 인생에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귀한 상급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점점해야 될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세요.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하는 이 말씀은,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이 열악하고, 남들과 비교해 보아 좋지 못하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있으면, 믿음 없이  부요한 환경에 처한 것보다, 결국에는 더 나을 수 있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입술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실제 그들의 삶 속에서는, 믿음을 도무지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자신의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고, 손해가 나타나면,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이제까지 있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이런 어려운 순간에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럴 때 보면, 언제 저 사람에게 믿음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신앙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잃어버린 손해를 만회하고, 세상과 짝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더 많은 소득을 얻기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입니까?  불신앙인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는, 교회를 출입하면서도,   이런 불신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어떤 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의 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의입니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아갑니까?  
이것을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에는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나는 부족해도, 나는 실패해도,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고, 나에게 주신 환경과 역량을 따라 최선을 다하게 되면, 얼마든지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이런 믿음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또 9절에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아멘!!!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실수나 연약함 때문에 두려워 마십시오.  연약한 내 모습만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히려 선포하십시오.  “나의 능력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이런 믿음의 선언과,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신뢰만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믿음과 신앙으로, 남은 일 년의 절반을 보내시고, 또 이런 중간 점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해 지고, 또한 인생에 필요한 믿음도 지금보다  더 커져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장래의 꿈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성공적인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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