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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가성의 여인 (요 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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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성의 여인 (요 4:3~19)


아주 오래된 미국 영화로 “진홍의 추락”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을 하던 한 미모의 여배우가, 미국에 있는 어떤 부호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가 미국에 가까웠을 무렵에, 엔진에 화재가 나서 그만 추락을 하게 됩니다.  승객들은 추락하는 그 비행기 안에서 구명의를 입으면서 당황해 합니다.  

한 천주교인은 묵주알을 돌리면서 거듭거듭 기도문을 외우고 있습니다. 
한 기독교인은 의자 위에 엎드려서,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습니다. 
이때 이 미모의 여배우는,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어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그 진한 화장을 지우기 시작합니다.  깨끗이 화장을 지운 후에, 속눈썹도 떼어 내었습니다.  의치를 뽑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가발도 벗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아름답던 얼굴이, 흉칙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이것이 바로 내 모습인데.  이것이 진실한 나의 모습인데.”
“그렇다면, 내가 누구냐?  진실한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자신을 잃어버린 채 평생을 살아오다가, 죽음 직전에야 비로소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다 나름대로의 인생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로인해 고민도 하고, 때로는 그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오늘 우리에게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바로 알지를 못하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죽음 직전에 가서야,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는 이 영화배우처럼, 우리는 자신의 참 모습을 모르는 채 그냥 살아갑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타난 결과만 두고 걱정을 합니다.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남편이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자녀가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가난이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여러 가지 문제 속에 둘러싸인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이런 질문을 던져 보게 됩니다.
“내가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평소에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그러한 질문들을, 고통을 당할 때마다 마음속에 한번씩 던져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을 볼 때에,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자신만이 아는 그런 갈등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잘 다닙니다. 교회에 봉사도 잘합니다. 또 전도도 잘 해옵니다.  그러나 자신만이 아는 나름대로의 불만이, 여전히 그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게 닥쳐진 모든 문제들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 그 근원은 바로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고, 남편이 바뀌고, 자녀들이 바뀌기 이전에, 내가 먼저 바뀌어야,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한 문제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게 되셨습니다.  수가라는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에 예수님 우물곁에 앉아 잠간 쉬셨고, 제자들은 동네 안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우물에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 여인은 제 육시에 물을 길러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으로는, 아침 해 뜰 때가 한시요, 저녁 해 질 때가 열두 십니다.  그리고 제 육시는 햇볕이 제일 뜨거울 때, 정오 낮 열두시입니다.  뜨거운 사막 지대에서 이 여인은 열두시에, 혼자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풍속으로는, 물은 아침저녁 선선할 때 길러 나옵니다.  
그리고 또 이 우물은 수가성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혼자 다니기에는  심심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여자들이 함께 무리를 지어서 물을 길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햇볕 뜨거운 그 시간에, 혼자서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왜 그 시간에, 그것도 혼자서 물을 길러 나온 것입니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물가에 여자들이 물을 기르면서 조용히 있었겠습니까?  
이런저런 대화들을 많이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화의 내용이라는 것이, 주로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주로 남을 험담하고, 비방하고, 흉보는 말들이 주된 대화의 내용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자리에 이 여인은, 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자신이야말로 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그런 부끄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뜨거운 시간에 사람들을 피해서, 혼자 물을 길러 나온 것입니다. 
이 여인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이 여인은 부끄러운 가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중에 누구와도 같이 살지를 아니하고,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실이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난, 그런 여자였습니다.

흔히 이 여인이 과거에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다는데 대해서, 남편을 다섯 갈아치운 것이라고, 해석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남자와 결혼을 하면 행복할까 해서 결혼을 해보니, 막상 행복이 없어서 이혼을 하고, 또 잘생긴 남자와 결혼을 하면 행복할까 해서 결혼을 해보니, 행복하지 못해 또 이혼을 하고, 이제는 부자와 결혼을 하면 행복할까 해서 결혼을 해보니 행복하지 못해 또 이혼을 하고, 이렇게 해서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고, 결국   행복을 찾지 못해, 이제는 결혼도 안하고, 또 다른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이야기로는 재미도 있고 좋습니다만, 현실성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세상에, 어느 나라 관습에 여자가 남자를 옷 갈아  입듯이, 다섯이나 갈아치울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이야 혹 주위에서 돈도 많고, 미모도 있고, 자유롭게 사는 여자라면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주님 당시에 유대 나라에서 여자가 남편을 갈아치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유다 관습에 의하면, 이혼에 권한은 오직 남편에게만 있었습니다.
여자에게는 이혼의 권한이 전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가 이혼을 당하면, 그것은 곧 그 여자에게 흠이 있는 것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부도덕하거나, 부끄러운 과거가 있거나, 아니면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으로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했는데, 그 중에 혹 몇 사람 죽었다고 해도, 분명히 이 여인은 몇 사람으로부터는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모든 사람에게, 부도덕한 여인으로, 부끄러운 여인으로 낙인이 찍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뿐만 아니라, 온 마을에서 소외를 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왕따를 당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자의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팠겠습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가 하는 것은, 주님이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이 여자의 대답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자가 물을 길러 왔는데 우물가에 왠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우물가에서 물 긷는 여자에게 물 좀 달라고 하는 것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물을 주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렇게 선뜻 물을 주지 못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여러분, 이 말이 주는 어감이 어떻습니까?  이 여자가 정말로 자기는 사마리아 여자이기 때문에,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물을 줄 수 없다는 뜻이겠습니까?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이방인이라도, 나그네가 물을 좀 달라 했을 때 물을 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지금 이 여인은 일종의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당신은 거룩한 사람인데, 어찌 천한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그럽니까?”  비아냥거리며, 시비쪼로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마을에서의 소외감과, 또 이 뜨거운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와야 하는 짜증이, 이 대답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불평스럽고, 만사가 다 짜증스러울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이 여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요, 바로 현대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오늘 말씀의 여인처럼 나름대로의 상처를 안고 있고, 소외감을 느끼고 있고, 또 여러 가지 부끄러움을 갖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피곤하고 지친 삶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를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병들고, 짜증나고, 탄식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음으로 점점 더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더욱 더 반항적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자신에게 다가오기라도 하면, 마치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짜증스럽게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 조차 알지를 못한 채, 그저 힘들고 짜증스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현재 대다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까?
한 번 따라 하실까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예수님 한 분 뿐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조선말을 끝까지 들어봐야 된다고, 그런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있다면, 지금 이 설교를 끝까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제 이 여자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자가 주님을 만났는데, 문제가 처음부터 쉽게 잘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못 주겠다고 대꾸하는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말을 들은 여인이 대답하지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도대체 어디에서 생수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말씀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말을 들은 여인이 놀라서 다시 말을 합니다. “선생님, 그런 물을 제발 나에게  주십시오. 그래서 나로 하여금 다시는 여기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여러분, 이 대화의 내용을 잘 들어보세요. 이 대화의 내용이 어떻습니까?  핀트가 도무지 서로 맞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영적인 샘물, 영생의 생수를 말씀하고 계시는 데, 지금 이 여자는 그 뜻을 생판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여자는 무슨 마술적인 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 당장 눈에 보이는 것, 그래서 나로 하여금 이 짜증나고, 고달픈 물 길러 나오는 일을 제발 좀 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려는 사람과 받으려는 사람이,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참 답답한 모습인데, 바로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꼭 같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시려는 주님과, 받으려는 우리 사이에 손발이 맞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고 있습니까?  영생의 생수를 주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원하고 참된 신령한 물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물 길러 나오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수고를 덜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금 당장의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소원성취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입니다. 

자녀들이 공부 잘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남편의 사업이 잘되 집안 사정이  좀 나아지고,  이러한 세상적인 욕구를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뭔가 자신의 욕구가 해결 되, 더 이상 피곤한 생활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아주 힘 있고 우렁찬 목소리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앞에 계신 할머니가 목사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목사님이 큰 소리로 외칠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듣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생각하기를 “얼마나 설교에 은혜가 되셨으면, 저렇게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가?” 감격을 해서 예배를 마친 다음에 인사를 할 때, 그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아니, 할머니 무슨 말씀이 그렇게 은혜스러워서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송아지가 죽었는데,  목사님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 송아지 울음소리가 생각이 나서 눈물이   저절로 났습니다.” 하시더라는 겁니다.  설교하는 사람과 설교를 듣는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도, 신령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듣고 있습니까? 

신령한 진리의 말씀을 듣는데도, 관심은 세속적인데 만 있고, 보이지 않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들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문제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이 해결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왜 내 주변에는 그렇게 불만스럽고, 불평스러운 일들로 가득 차 있을까? 
가정의 병만 고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물론 그 병 때문에 가정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만 좀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가정이 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까? 
물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 가정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돈 없는 고통이 클 것입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다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여자에게 있어서도, 뜨거운 대낮에 혼자 물 길러 나오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것 해결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입니다. 하나의 결과.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전부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 여자가 정말 자신이 요구한대로,  마술적인 물을 얻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조금은 편해지겠지요. 
그러나 그것 외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 되어야지만,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겁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자식이 원하는 대로 고기만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우리에게 왜 축복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요, 주님의 사랑스런 신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장의 요구대로만 해 준다면,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당장의 문제의 해결보다는, 우리의   환경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소원하며 기도해야 할 제목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이제는 부끄러운 것이 문제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그 여자가 혼자 물을 길러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부끄러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놀림이 싫어 혼자 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을 바로 만나게 되니까, 그런 자신의 부끄러움,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핸디캡이 문제가 되질 않더라는 겁니다.  그 환경을 이제는 자신이, 남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이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질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도 주님의 관심은 알려고 하지 않고, 내 관심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겁니다.  주님은 근본적인 것을 해결해 주시고자 말씀을 하시는 데, 우리는 결과만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과정은 생략한 채로, 무조건 결과만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알고,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고침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 여인과 대화가 통하지 않자, 예수님이 이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아니 물 마시는 데, 남편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아픈 곳을 찌른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핀트가 맞지 않는 대화를 아무리 계속해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 지적해 버리시고, 이제는 여자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도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네가 지금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무엇이냐?”

그 여인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간음죄였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남의 남편과 같이 사는 정부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 여인의 괴로움이 있고,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렸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형편을 살펴보면, 도무지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은혜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의 성장도 없습니다. 여전히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주님을 바로 만나지를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형식적인 만남이 아니라, 그저 몸만 만나는 메마른 만남이 아니라, 영과 영이 만나는 신령한 교제, 서로의 마음으로 전할 수 있는 솔직한 만남을,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원하시고, 매 주일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하셨지만, 주님과  여러분이 나누는 대화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처럼, 서로 간에 핀트가 맞지  않은 대화였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계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  “네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무엇이냐?”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문제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의 해결책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끗함을 받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에는 관심도 없는 채, 회개하고 죄 용서는 받지도 않은 채, 날마다 소원만 기도하고 있으니, 이제는 예수님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자가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대답에서 진실성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대답이 옳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여인의 대답은  주님을 속이거나,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가책을 가지고, 아픔을 가지고, 고통을 가지고, 자기 진실을 주님 앞에  고백한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이야기지만, 이 여인은 솔직히 자신을 주님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 장면 때문에, 이 여인은 비로소 참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예수가 아닌, 한 유대인의 청년이 아닌,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으로부터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내어   놓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 문제, 내 고통을 내어놓기 이전에, 내 모습,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다 내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간사하고, 죄악 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이, 주님 앞에 다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을 만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스스로 외친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 나의 나됨을 아는 사람. 나의 진실을 아는   사람.  내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그 분. 그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더러운 나를 알고도 만나주셨고, 대화해 주셨고,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의 이 처지를 알고도, 나의 이 부끄러운 모습을 알고도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을 알고, 믿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생수를 마시게 되며,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예수님을 한 유대 청년정도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왜 내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세상에는 예수님을 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내가 물 길러 나오는 이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분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 가면 내 고통이 없어지고, 내 병이  낫고, 내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는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으로는, 결단코 영생의 생수를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단점도, 내 거짓도, 내 위선도 다 알면서도, 그러고도 나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분. 그 분을 내가 만날 때, 그 영원한 생수를 맛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분의 이런 사랑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어느 누구가 이런 사랑을 줄 수가 있습니까? 그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어떤 조건이 맞아야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면,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를, 다 받아 주셨기에, 너무 감격해서 이제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달려가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 여인은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건 여섯이건, 이제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 모든 것을 아시고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 앞에   감격해서 가슴이 벅찰 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가 무엇이지 아십니까?  이런 뜨거운 감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것이 없다면, 아직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뭡니까?  그저 예수님을 아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아마, 남달리 불행했기 때문에, 남달리 큰 은혜와 큰 사랑을 입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부끄럽고 추한 삶을 사는 우리들이지만,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고자 원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무엇을 원하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주님의 뜻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이 지적하시는 그 음성, “네 남편을 데려오라.” 
“네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무엇이냐?”  “그것부터 해결하자.”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그 음성을 들으시고, 자신의 모습을 하나도   더하거나 빼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을 수 있는 귀한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이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 여인처럼, 영생의 생수를 마시고, 삶에 기쁨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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