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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삿 16: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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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삿 16:18~22)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다 위대해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인 어떤 새로움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위대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위대한 사명에 붙잡힐 때에 위대한 생애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누구나 좋아하는 '성공'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깨닫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위대한 사명감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 속에 삶의 더 높은 차원의 가치 있는 사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명에 눈을 뜨게 되면 세상에서 할 일이 그렇게 많아집니다.  사명에 눈을 뜰 때 갑자기 살맛이 납니다.  자기 가치를 알게 됩니다.  자기 위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사명적 존재로 자신의 사명에 눈을 뜨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가지고 새로운 결의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서 자기 사명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리고 선언하십시오.  자기 사명이 없는 사람은 썩게 됩니다.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뜻과 환상을 붙들고 사명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백성이 살맛을 잃어버리고 이곳 저곳에서 불평과 한탄만 한다면 그 사회는 통제 불가능한 사회가 되고 맙니다.  살맛 없는 사람을 보면 자기 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백성들이 자기 썩어짐을 막는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신바람, 살맛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늘 살맛이 납니다.  학식이 없어도, 지위가 없어도 그분이 내 속에 계시니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일어나 이 백성의 자기 썩어짐을 막아야 합니다.  자기 타락과 무너짐을 막아야 합니다.  이 어려운 난국의 시대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 희망을 주고 살맛을 주는 사명자로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께서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맡기십시오.  다 맡기고 그분만을 붙드십시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 지난날이 후회스러운 사람도 있고, 섭섭한 사람도 있고, 답답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잊어버리고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만을 붙드십시오.  그분만을 신뢰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지혜와 총명으로 일을 성취하려고 하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아직도 무슨 힘이 남았는지 여전히 자신의 지혜와 총명과 경험을 의지해서 일을 성취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자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맡기면 아무리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라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손을 내미십시오.  손을 내밀면 아무리 깊은 수렁에 빠진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 건져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지식이 있는 자의 것도 아니고, 기회가 온 자의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환경이 좋은 자의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지칠 줄 모르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자의 것입니다.  열정이 없이는 어떤 위대한 업적도 성취시키지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영혼에 열정이 없는 자, 그 영혼이 잠자는 사람은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단잠을 자고 있을 때에 꿈을 머금고 일어나 괴로움을 이기고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내 영혼에 열정이 불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목하시고 바라보시는 그 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내가 걸어가는 그 인생 길을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축복하시기를 원하는 그 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나는 너에게 이 땅을 향한 나의 희망을 걸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인생의 실패와 성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의 생에는 성공의 전성기를 거쳐서 처절한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두 눈이 뽑힌 채로 감옥에서 맷돌질을 하고 있는 삼손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눈에서 떨어지고 있는 처절한 피눈물, 복수심과 호기심으로 들뜬 군중들 앞에 불려 나와 곡마단의 어릿광대처럼 재주를 부리는 삼손의 비참한 보습을 보십시오.  삼손의 당당했던 첫 출발과 기적으로 일관했던 삶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삼손의 실패를 보면서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실패를 막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거셨던 희망을 철수시키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한 사람을 통하여 이 땅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희망을 버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해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삼손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걸고 계셨던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희망을 저버리는 반복적인 죄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6장 1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영어 성경으로 보면 삼손이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가서 잤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기생을 음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음녀에 대해서는 관계하거나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혜서인 잠언에 보면 이것을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음녀를 가까이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삼손은 분명히 기생을 멀리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 앞 뒤, 그 어디를 살펴보아도 삼손이 주저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삼손은 이미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삼손은 한 두 번의 경고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거의 반복적으로 죄악을 저지릅니다.  삼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정적인 원인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한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릴라 이전에 삼손은 벌써 두 명의 여자를 거쳐온 상태였습니다.  첫 번째는 딤나의 여인이었습니다.  삼손은 이 여자 때문에 아주 곤욕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봉독한 16장 1절 이하를 보면 삼손은 두 번째의 여인을 찾아갑니다.  1절에 가사라는 곳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블레셋의 5대성 가운데 제일 남쪽에 있던 전략적인 성읍입니다.  삼손은 기생과 불륜을 행하기 위해 이스라엘 영토를 한참이나 벗어난 적진의 남단까지 들어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기생과의 불륜을 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릇 죄는 미끼와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달콤합니다.  재미가 있습니다.  환상적입니다.  그러나 그 미끼 속에는 바늘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으면 죄의 끝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서운 사망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끼가 아니라 그 미끼의 끝에 숨겨져 있는 우리를 낚아채는 바늘을 보아야 합니다.  미끼는 항상 아름답습니다.  먹음직스럽고 탐스럽습니다.  인생을 걸 만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삼손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바른지 그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본능대로 행동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과 사리 분별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나약합니다.  더구나 우리 인생은 언제나 죄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 하나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자의 모습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멀리하십시오.  죄와는 피 터지게 싸워서 이기십시오.  하나님은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짓는 자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에게 거셨던 기대와 희망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걸고 계셨던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로,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신앙을 버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잘 알 듯이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나실인은 하나님 앞에서 평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신분에 속한 사람입니다.  사사기 13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아버지에게 임하셔서 이제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는 나실인이라고 하시면서 나실인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나실인 삼손, 그는 성결된 삶을 위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되었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헌신한 상징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삼손은 하나님께 구별된 상징으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한 약속은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성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께 헌신한 표시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면서 실제 그의 삶은 술을 마시고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정욕의 지배를 받아 생활하는 블레셋의 타락한 문화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사자의 시체를 만졌습니다.  14장 8절 이하에 보면 삼손은 죽은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 꿀을 떠서 마셨으며 그의 부모에게도 주어서 먹게 합니다.  그러나 9절에 보면, 삼손은 그 꿀이 죽은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 알리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죽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삼손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따로 국밥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경건의 모양만 유지했을 뿐 경건의 내용은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나 자신의 삶은 어떠한지 깊이 성찰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여 한 주간에 단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 생활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삼손과 같이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혹여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술에 취하여 세상 문화에 빠져서 그 문화를 즐기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블레셋의 타락한 문화에 빠졌던 삼손과 같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순히 교회에 나간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종교인은 다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신분은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삶의 내용이 그 신앙의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할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삶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가정과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답게 말씀의 원리를 따라서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사업 경영을 정직하게 하십니까?
이웃과 동료를 사랑하며 진실 되게 살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신앙 생활에 만족하며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다면 당신은 삼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전혀 구별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형식적인 삶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역겨워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손은 약점도 있었지만 장점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삼손은 힘이 센 장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도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수께끼도 낼 줄 알았고, 장난칠 줄도 알았습니다.

16장에 보면 삼손은 들릴라와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매수당한 들릴라는 삼손을 무릎 위에 잠재우면서 그 큰 힘의 비밀을 캐묻습니다.  들릴라와 삼손이 머리 싸움을 합니다.  삼손은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넝쿨 일곱 가닥으로 나를 묶으면 나는 꼼짝 못할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들릴라는 칡넝쿨로 삼손을 묶은 뒤 블레셋 사람들이 온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삼손이 쉽게 그 밧줄을 끊어버렸습니다.  여자는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따지면서 다시 한번 그 힘의 원천을 묻습니다.

삼손은 이번에는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묶으면 나는 꼼짝을 못한다"라고 말을 지어냈습니다.  이렇게 몇 번 당하고 나서는 눈물로 애원하는 여자에게 삼손이 결국 진실을 밝히고 맙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전인 17절에 보면 삼손은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을 기생 들릴라에게 다 말하고 맙니다.  결국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르지 말라고 하신 머리카락을 들릴라에 의해서 잘렸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정욕 때문에 하나님과 한 서약을 어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언약을 어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 생활보다 언제나 직장의 일과 가정사를 더 먼저 처리했던 불신앙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마치 옆집에 놀라가듯이 교회에 나오고, 신앙 성숙을 위한 진지함 보다 이웃들과의 친교에 더 힘을 쏟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겠다고 고백했으면 실제 생활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말씀대로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일 낮에 예배드리고 성경 조금 읽고, 기도 잠깐 하면 형식은 유지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내용을 만들어가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런 생활은 결코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움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도 없는 냉랭한 삶이 됩니다.  그런 삶은 결국 삼손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삶이 됩니다.  이런 빈 껍데기에 불과한 신앙을 바라보셔야만 하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던 그 아픔보다 더 큰 아픔으로 당신에게 거셨던 기대와 희망을 거두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희망을 꺾는 신앙인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서 교회와 하나님의 일이 다른 일들 앞에서 항상 다음 순위로 밀려나는 신앙은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우리 주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걸고 계셨던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으로, 영적인 것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잔의 커피에는 집을 40cm 두께의 안개로 감싸고도 남을 수분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적은 양의 물이 얇게 퍼지면 시야를 온통 가릴 수도 있습니다.  안개가 길을 가로막으면 당황해 하면서 태양이 위에서 안개를 말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왜 당황해 할까요?  바른 시각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실의 벽은 직접적인 성격 때문에 사실보다 높게 보이게 마련이다."
문제와 근심은 우리의 현실 상황에 마치 안개처럼 작용하여 사물을 바른 시각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 우리는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처럼 모든 것을 30초 만에 해결하려고 허둥대며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당황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에는 돌발 사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영적으로 민감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짙은 안개에 가려서 갈 길이 막막합니까?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실패하도록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은 우리가 의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뚜렷이 드러내시려고 마련하신 기회입니다.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는 자만이 이런 기회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삼손의 세 번째 어리석음은 그가 신령한 것을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을 가지고 장난을 쳤습니다.  영적인 것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6절에 보면 들릴라가 와서 삼손의 힘의 원천을 캐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원래 그가 지닌 힘의 원천은 나실인의 서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에 힘의 근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만큼 신령하고 귀중한 것입니다.  삼손이 그것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당신은 몰라도 됩니다.  굉장히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물어보면 안됩니다"라고 처음부터 말문을 막아버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토록 신령한 것을 가지고 여자와 말장난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다같이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을 잘 따르고 믿는 사람이었으나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밥이나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말씀을 사모할 줄 알고 그 말씀 앞에 신중하게 설 줄 아는 신자였습니다.

결국 삼손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비극적인 구절은 20절입니다.  본문 20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미'  삼손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을 사용하지 않으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몰랐기 때문에 삼손의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인생에서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빨리 깨달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정을 바치지 않고 주님께 온전한 삶을 바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 조금씩 조금씩 주님 곁에서 멀어지는 것이 바로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 안 가도 별 탈이 없다고 느끼고, 기도 안 해도 잘만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서서히 신앙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징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 부분에 민감하셔야 합니다.  시간마다 때마다 영적인 부분을 개발시켜 나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개발되지 못하면, 그래서 영적인 부분이 민감하지 못하면 어느 한계에서 영적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흔히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는 것을 보고 다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내가 방언을 받고, 치유의 은사를 받으면 신앙생활이 다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부분은 가면 갈수록 더 오묘합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신비하고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보면 우리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선 순위가 나옵니다.  영과 혼과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혼이고, 그 다음이 몸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몸이 영과 혼과 몸으로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과 혼과 몸은 분리할 수 없는 전인적 존재로서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영적인 것, 신령한 것,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의 훈련은 범사에, 그리고 금생과 내생에 유익이 있지만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고, 이 땅에 사는 동안만 유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도 요한삼서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먼저 영혼이 잘 되셔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되셔야 합니다.  먼저 영적 훈련이 잘 되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이 거룩해지면 그 다음에 마음이 거룩해집니다.  마음이 거룩해지면 지적으로 느끼고, 감정적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이 거룩해집니다.  한 마디로 영적으로 거룩하고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면 몸은 자연히 좋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먼저 개발되어야 할 것이 영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태 신앙으로 자라는 것은 매우 축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모태 신앙이지만 어려서부터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것만 훈련시켰다면 커서도 그것밖에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영적인 체험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때에 그 삶에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을 그렇게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현대 크리스천의 최대 위기는 영적 위기감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 비극이 있습니다.  자신의 메마른 영혼에 대해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적당히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삶을 헌신하는 신앙 고백이 없는 이 세대는 삼손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삼손처럼 껍데기뿐인 신앙생활은 결코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무디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눈앞에 임박했음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가 삼손의 비극이고 우리의 비극입니다.

삼손은 하나님 앞에 헌신된 나실인이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일주일 내내 전혀 기도 없이 살다가 주일 예배 때 겨우 형식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날마다 삶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생활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삼손처럼 될 위험이 있습니다.

삼손은 기도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과 꾀만 믿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삶은 기대와 희망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두 번 잘못하고 실수했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기대와 희망을 거두어들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기대와 희망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한 두 번 실수하고 잘못한다고 해서 순식간에 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인지는 몰라도 끊임없이 그 자녀에 대해 기대와 희망을 걸어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잘못을 반복적으로 계속하면서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인생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면 어느 순간에 부모님은 그 자녀를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합니다.  "내가 저 놈에게 계속해서 희망을 걸어야 하는가?"  그리고 좀더 심할 경우에 부모님은 눈물을 머금고 그 자녀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한 사람을 향해 기대와 희망을 거셔도 좋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을 만큼 당신의 영적인 것이 성숙되어져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돌아서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와는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서 피 터지게 싸우십시오.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껍데기 같은 신앙의 형식을 벗어 던지고 더 늦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으로 먼저 영적인 문제에 민감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헌신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와 절망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는 삶의 비결입니다.  그것이 희망을 이루어 가는 영적인 승리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 가정에 희망을 걸어도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언양 영신교회에 희망을 걸어도 좋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 한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도 후회하시지 않을 그런 영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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