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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바라보며 기다리나이다! (시 1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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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바라보며 기다리나이다! (시 123:1~4)


1. 몸짓, 손짓으로 주고받는 언어

아마 여러분들께서도 야구장에서나 텔레비전에서의 야구 중계를 통해 보셨겠습니다만, 야구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인이 가장 많이 오고가는 것이 투수와 포수 사이인데요. 둘은 주로 손가락으로 사인을 주고받습니다. ‘지금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네 공을 아주 잘 치는데 정면으로 승부할래, 아님 걸러 낼래? 공을 한 가운데로 빠르게 던질래, 아님 바깥쪽으로 한 번 빼 볼래? 이 선수가 아주 좋아하는 공과 거의 비슷하면서 조금 다른 유인구를 던질 수 있겠니? 직구를 던질 것이냐, 아님 변화구나 체인지업이나 커브를 던질 것이냐?’ 등의 복잡한 사인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지금 1루에 나가 있는 선수가 도루를 하려고 하니까 저지하자’는 사인,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번트를 하려고 하니 투수와 다른 선수들은 그에 대비를 하라’든지, ‘상대팀이 달리고 칠 것이냐, 아님 치고 달리려고 하느냐’ 등에 아주 다양한 의사를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야구장의 또 다른 한편에서도 이 사인이 끊임없이 오고가는데요. 수비를 서고 있는 팀에서 주로 3루 쪽과 간혹 1루 쪽에 코치 한 명을 세우는데, 이 코치는 온갖 오두방정을 다 떨면서 온몸으로 투수나 포수나 다른 수비수들에게 사인을 보냅니다. 감독은 상대 선수가 좌타자면 좌측을 보고 있으니까 3루 코치에게, 우타자면 1루 코치에게 사인을 보냅니다. 그 방법에는 몸짓과 손짓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손으로 가볍게 치고 주먹을 쥐어서 가슴을 치기도 합니다. 또 손가락의 개수로 표현하기도 하고, 모자를 만지거나 썼다가 벗었다가 하고, 자기 배를 두드리고, 양손을 주먹 쥐고는 쥐어박기도 합니다. 또 코치가 배를 두드리고, 오른쪽 어깨를 만지고, 모자를 고쳐 쓰고, 허리춤을 올린 후에 양손을 흔들었다면, 앞의 사인은 전부 거짓이고 마지막 사인이 진짠데, 팀에 따라 다르지만 진짜 사인인 마지막 사인은 ‘너 마음대로 하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인이 조금 길고 요란한 이유는 상대방 팀이나 선수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야구 경기에서는 손과 몸으로 주고받는 사인이 일상적인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바로 이와 같이 손짓으로 지시하고 대화하는 것, 즉 일종의 사인에 관한 것이 나옵니다. 

본문에서 사인을 주고받는 쌍방은 하나님과 성도 여러분들입니다. 말하자면 성도는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선수이고, 하나님은 감독으로서 여러분의 인생 경기에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이기도록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잘 아셔야 합니다.


2. 종의 눈, 여종의 눈이 되어서 ‧‧‧

1)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 열다섯 편의 시에 이 제목이 붙어있는데요.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지 못했거나 예루살렘과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떠나 그리로 가면서 부른 노래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15개 시편이 전부 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쓰인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23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느헤미야 때 어느 무명의 시인이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아닥사스다 왕 때 수산 궁에서 술 맡은 관원이라는 아주 높은 관리로 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포로에서 풀려나 일차로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다가 이방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이었지요.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슬피 울면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얻어 예루살렘 총독이 되어 자신이 그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총독으로 고국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나 일반 백성들이나 제사장들에게까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는 일에 적극 협조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느헤미야의 적극성에 힘입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을 합하여 성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이방인인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을 했습니다. 그들로 인해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존심도 상하고 굉장히 불쾌했지만, 그래도 서로를 위로하고 달래가며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산발랏과 도비야는 더욱 심하게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던 암몬 사람 도비야 역시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헤미야 4:1-3절)."고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이 성을 건축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요, 그리고 그렇게 성을 건축해도 아무런 힘도 못 쓸 무용지물일 뿐이라고 비방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23편은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기록된 시입니다. 그래서 본문 3,4절에 보면, “심한 멸시” “조소와 멸시”가 “넘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넘친다’는 말은 ‘만족하다, 포식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놀리고 조롱하고 저주하고 방해하는 것을 즐기고 있으며 그것으로 아주 흡족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현재 이스라엘 백성과 시인의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바벨론에서 서러운 노예 살이를 하다가, 참 어렵고도 힘들게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은 것 없이 황폐하게 되어 짐승조차 거하기 어려운 땅에다가 중단된 공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이방인들이 온갖 조롱과 욕설과 누명을 씌워가면서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그래도 참고서 이를 악물고 일을 계속하려고 하니 그들의 반대와 조롱과 비방이 도를 넘어서서 정말 견딜 수 없는 상황,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록되었습니다.

2) 종의 눈이 되어서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들에 의해 멸시와 조롱받는 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하늘에 계신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주, 곧 온 세상의 왕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며, 결정하시고,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아마 교회 밖 사람들은 이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시고 장차 그 통치 아래 모든 피조물들이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알고 믿었기에 오늘 본문에서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세상에서 나의 문제, 나의 이 지독한 환경이나 아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 가장 강하고 가장 확실하게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따로 있다면 그를 향하여 눈을 들고 바라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세상 왕이 최고의 권력자라면 시인은 그 왕을 향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만이 진정한 해결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가 어떻습니까? 본문 2절,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인은 남종이 그 주인의 손을 바라보고, 여종이 그 안주인의 손을 바라보듯이 자신이 지금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는 두 종류의 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강제로 된 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원해서 된 종이었습니다. 강제로 된 종은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빚 때문에 몸을 팔고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유가 없이 전적으로 주인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원해서 된 종은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주인을 존경해서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인도 그들을 가족처럼 대우해 주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이 말하는 종은 이 둘 중 어느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종들이 주인의 지시를 받는 경우인데요. 특히 식사 자리나 잔치 석상에서 주인의 지시를 받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말보다는 손동작으로 종들에게 지시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 주로 삶의 양식이 단순한 곳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말보다는 몸짓이나 손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종들에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의 종들은 일종의 수화처럼 손으로 전달하는 주인의 언어를 반드시 익혀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 실전에 배치되면, 우선 종은 주인과 그의 손이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종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뿐 인데요. 그것은 주인의 손, 주모의 손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주인이 뭔가를 표시하면 종들은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 그 동작이 뜻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대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을 오늘 본문은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하는데요. 이 “향한다”는 말은 전치사로서, 주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향한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즉 그 대상을 향하여 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2절에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 바라며”라고 할 때도 그대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상황처럼 주인을 섬기는 종은 주인을 볼 수 있는 곳에 서서 그의 눈은 항상 그 상전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으로 하는 말을 보고 그대로 행동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종의 눈이 상전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지 아니하면, 주인의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결국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항상 상전의 손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 2절에 “기다리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는 한, ~까지, ~하는 동안”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그 삶과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를 기다리는 것, 혹 현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지금 패배한 듯 보이는 상황이 역전이 되고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 그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으로 돌아가 볼까요? 현재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왔다고 해도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이스라엘 전체가 다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거대한 바벨론 제국은 여전한 위협이었고, 주변 여러 종족들은 그들 역시 이스라엘처럼 바벨론에게 서러운 지배를 받는 입장인데도 사사건건 이스라엘을 방해하고 조롱하고 누명을 씌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치열하고 각박한 전쟁의 한 복판에 있는 이스라엘로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 당연히 온 세상의 왕이며, 자기 팀의 감독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쟁 필승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시인은 “그 상전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종처럼, “그 주모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여종 같이 되어서 주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피할 바위시오 도움이시오 구원자시기 때문입니다.

3) 성도도 종처럼

이와 같이 시인과 느헤미야와 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정과 형편을 하나님께 다 고한 후에, 그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인이 올 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 상황을 해결해 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인이 하나님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던 것처럼, 그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의 하나님, 여러분의 주인, 여러분을 승리로 이끄는 감독이 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지금 여러분의 상황을 살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감독이 필요 없고, 주인도 필요 없고, 왕도 필요 없는 아주 충분한 상황이며, 여러분의 인생 게임은 지금 승리로 치닫고 있거나 승리가 확정적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여러분은 인생의 경기를 이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또 설사 지금 상황이 좋다고 해도 잠시 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7대0으로 이기고 있다가 7대8로 역전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야구용어로 “케네디 스코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은 야구장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인생이라는 경기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이 좋다고 방심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지금 온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빠졌습니다. 경제적인 침체, 사회적인 혼란, 정치인들의 무능, 게다가 북한까지 가세해서 관광객을 총으로 쏴 죽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나라의 어려움은 곧 한 개인과 가정의 어려움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개인과 가정과 국가적인 어두움이 깊어가는 우리의 현실, 도대체 이 밤은 얼마나 더 계속 될까요? 그 외에도 개인적인 문제나 가정적인 문제로 힘들어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외로워하는 사람들, 질병으로 고통 하는 사람들, 재난과 실패로 힘든 사람들, 그리고 어떤 중요한 결정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 

이런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시인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와 이 지독한 삶의 현실에서 건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승리의 사인을 보내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인생 경주에서 반드시 이기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패배하고 끌려 다니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는 분인 줄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답답한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 합니다. 넘어지나 아주 자빠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인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만 바라보면 ․․․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여자분이 우리나라 세종문화회관 같은 대극장의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젯밤 공연에 갔다가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잃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배인은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곧바로 직원들에게 연락을 해서 청소하면서 찾아놓은 그 목걸이를 찾아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그 여인으로부터는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조급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애3:25)."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편 40:1-2).”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바바리아라는 성에 루드비히(Ludwig) 공작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는 포악한 사람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공작이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쓰이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기에 앞부분만 기억났습니다. 삼일인지, 석 달인지, 삼 년인지 아무튼 그 안에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공작은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삼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삼일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아주 잘 해주었습니다. 

삼일 째 되던 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삼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 그래서 석 달 동안 또 주위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그제야 확신을 가졌습니다. “삼 년이었구나.” 그래서 3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 왕실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바로 루드비히 공작을 독일의 황제로 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루드비히 공작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다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눈을 주께로만 향해야 합니다. 눈을 들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메시지를 보기 위하여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어느 분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도무지 주님의 뜻을 알 수 없어 답답한 나머지 동전을 던져 보았습니다. '숫자가 위로 나오면, 내가 생각한 대로 가는 거야' 그리곤 휙 던져 올렸다 떨어진 동전은 숫자가 위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건 우연일지 모르니 다시 한 번 해보자' 다시 던졌더니 이번에도 숫자가 나왔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 어디로 가는 게 맞는 길인가요? 알려 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에서 갑자기 이정표가 뚝 떨어져서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사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님의 가장 우선적인 사인은 성경 속에 있습니다. 기도 속에 있습니다. 찬송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일 속에,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그것을 보려고 종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운동선수가 감독이 보내는 사인을 무시하거나, 딴 데 정신이 팔려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 게임을 망치면, 그는 다음 게임에서 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인이 더딜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사인들이 올 것이고, 그로 인하여 여러분은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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