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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품위있게, 질서있게 하라 (고전 14:26~40) - 예언,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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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품위있게, 질서있게 하라 (고전 14:26~40)
 
 
요즘 예배에는 순서가 잘 짜여 져 있습니다. 예배 순서를 위한 주보도 있고, 묵도 기도 찬송 성경봉독 찬양 말씀 헌금 등 이런 여러 가지 순서들이 아름답게 잘 짜여 져 있지만, 사도바울이 목회하던 초대교회 시절에는 교회 안에 이런 순서들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었습니다. 예배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까 예배 가운데 들쑥날쑥 이런 저런 일들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배 가운데 찬송 시도 있고,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있고, 방언하는 것도 있고, 통역하는 것도 있고, 예언하는 것도 있고, 지금으로 친다면 찬양도 있고, 설교도 있고, 기도도 있고, 순서가 다 있는데, 문제는 이런 순서가 일정한 순서를 따라 있어야 체계가 잡히고 혼돈이 되지 않는데, 초대 교회 시절에는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교 중간에 갑자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나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계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라고 하면서 예배 중간에 사람들한테 계시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거나, 또는 예배 중간에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다가 방언을 받게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목소리로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거나, 이렇게 예배 중간에 예배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인데, 더 어지럽게 만드는 것은 한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다른 사람도 자기도 방언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A라고 하는 사람이 예언을 하는데 B라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자기도 예언을 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얼마나 예배가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초대교회 안에서 있었던 이런 예배의 무질서 때문에 사도 바울이 오늘 이 본문을 기록했습니다. 무질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지요! 무질서는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외과의사와, 엔지니어와, 정치가 세 사람이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운데 어느 직업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최고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서로 내기를 했습니다. 그 때 외과의사가 이야기 합니다.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지, 외과 의사가 가장 오래됐고 가장 최고의 직업이야.” 그랬더니 다른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왜 그러지?” 외과 의사 말이, “성경을 봐라,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었는데, 어느 날 남자의 갈비뼈를 뜯어서 여자를 만들었어, 그거 기술자인 네가 할 수 있냐? 정치가인 네가 할 수 있어? 외과의사인 나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외과 의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의 직업이야.”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랬더니 두 사람이 그렇기도 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때 엔지니어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외과의사보다 더 오래된 직업이 있어, 그것이 무언지 알아? 바로 엔지니어야, 성경을 보라고, 태초에 뭐가 있었다고?” “혼돈이 있었지!” 그랬더니 “그 혼돈이 어떻게 됐지?” “질서로 바뀌었지?” “거봐,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것은 엔지니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까 내가 너 보다 더 오래됐고 더 위대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치가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 잘났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뭐가 있었다고? 혼돈이 있었지? 그러면 그 혼돈은 누가 만들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혼돈은 누가 만들었지요? 정치가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가만히 보면, 정치가 실종 된 것 같습니다. 야당은 길거리에 나가서 시위하고 있고요, 국회가 개원한지 한 달이 넘도록 아직 등원조차 하지 않아 민생치안이 얼마나 방치되어 있습니까? 이런 무질서와 혼돈, 촛불시위로 이어지는 극렬한 대치들, 얼마나 우리 국가 경제에 또, 해외에 있는 대외 신임도를 하락시키고 있나요! 도대체가 법이 지배하지 않는 나라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경찰이 시민에게 매를 맞고 취조를 당하고 인민재판을 당하는 이런 시대, 도대체 정치는 사라지고, 법도 사라진 이런 와중에, 이런 무질서 속에 한국의 정치가, 경제가 지금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질서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교회 무질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 예배의 무질서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삶에도 무질서를 가지고 온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 예배 가운데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은 그 말의 뜻이, 기도의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면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언을 받았다고 해서 방언으로 설교를 하거나, 장로님이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면 여러분 가운데 알아들으실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는 통역이 있을 때 그것이 교회에, 또 본인에게 덕이 되는데, 알아들을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예배 가운데 방언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갑자기 두 번째 사람이 일어나 방언을 합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로 방언으로 하자 또 다시 세 번째 사람이 일어나 방언으로 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얼마나 질서가 없게 됩니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을 이 사람 저 사람이 다 일어나 말을 하니 얼마나 혼돈이 왔겠어요? 방언은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통역이 있을 때만이 그것이 덕이 됩니다. 그리고 순서를 따라서 질서 있게 할 때 그것이 은혜가 되는데, 질서도 없고 통역이 되지 않으면 도대체가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들이 실수와 잘못 그들이 고쳐야 될 것을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그것이 예언이 됩니다. A라고 하는 사람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입니다. 라고 하면서 한참 예언을 하고 있는데, B라는 다른 사람이 또다시 일어나 나도 예언을 받았습니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의 예언을 B라는 사람이 부정하는 것입니다. 당신 그런 예언을 받았어? 내가 받은 예언은 그것이 아닌데,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 두 사람의 예언을 반박을 하거나 반대의 예언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예배 가운데 혼돈이 왔을까요? 방언 하는 사람들의 방언이나 예언이 왜 초대 교회 안에서 일어났냐 하면,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사람들이 사모했고, 아주 유능하고 고차원적인 굉장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걸 받은 사람들은 자랑삼아 했던 것입니다.

예배가 자기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는 것이 예배인가요? 아무리 방언의 은사를 받고 예언의 은사를 받고 계시의 은사를 받았어도 그것이 교회에 전체적인 득이 되고 아름다운 덕을 가져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이렇게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받은 두 세 사람이 막 나타나 경쟁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할 때에는 목적이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배는 뭔가를 자랑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예배의 초점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본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봅시다. 간단하게 예배 보지 뭐” 예배는 본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인 표현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을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본다는 말은 다분히 시작적인 것들을 반영합니다. 어떤 장식이 되어있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옷을 입고 왔는지, 어떤 현수막이 걸려 있는지, 이것은 예배를 보는 행위인데요,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초점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즐겁고, 사람이 은혜 받고, 사람이 축복 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실 때, 기도 하실 때 아주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제 마음이 편해지고 제가 가지고 온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받고 우리 모두가 다 은혜 받게 하옵소서. 만약에 그렇게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면, 예배의 초점이 어디에 있나요? 바로 나 자신에게 맞춰진 것입니다. 

예배는 나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는 내가 축복받고, 은혜 받고, 병 고침 받기 위해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온 교우들이 아버지 하나님 영광 받아 주옵소서. 하나님께 존귀와 위엄이 있습니다. 저희를 1주일 동안도 지켜주신 은혜가 감사합니다. 우리의 감사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몸을 드리고 그래서 교회 올 때, 몸을 깨끗이 씻고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몸만 드리나요? 시간도 드립니다. 예배 시간 10분전에 오셔서 먼저 성경을 읽고, 본문을 읽어보고, 찬송을 불러보고, 헌금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예배는 시간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9시에 시작이 되는데, 5분, 10분 늦게 온다는 것은 정성이 결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시간까지도 바치길 원하십니다. 그것만 바치나요? 앉아서 정성으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립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머니에서 꺼내고 있다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헌금 봉투에 미리 넣고 1주일 동안 지켜주신 은혜가 감사하여 이 예물을 바칩니다. 미리 봉투에 담아 넣고 있다가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느 것 하나 정성이 안 담겨 있는 곳이 없습니다. 

성가대원들이 1시간 일찍 와서 열심히 찬양으로 준비합니다. 1시간 전에 와서 정성을 다해 예배를 준비할 때 하나님은 그 찬양을 받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내가 받기 위해 온 것 없습니다. 예배 초점은 하나님 자신이시지, 내가 축복받고 은혜 받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 시간과 정성을 다해 몸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때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것도, 설교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 하실 때마다 “맞습니다.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예배의 초점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장 값진 것을 드린다는 자세가 없이 축복 주시고, 건강 주시고, 은혜 달라고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초점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방언하는 사람이나 예언하는 사람이 자랑하려고 자기가 예언을 받았다고 방언할 줄 안다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너도나도 다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무시한다고 하면, 이런 예배는, 이런 방언과 예언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질서를 따라, 다시 말해 찬송할 때는 같이 찬송으로 은혜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는 같이 영광을 돌리고, 순서를 따라 같이 위로하고 피차 권면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이런 아름다운 질서가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무질서하게 예배를 드리냐 하면, 영혼이 무질서한 사람, 삶이 무질서한 사람, 육체가 무질서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무질서한 예배를 드립니다. 평상시에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이 어디에 가서 때려 부부고, 차 부수고, 화염병 던지고, 돌 던지고 깨뜨리고 할까요? 평상시에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은 어디에 내 놓아도 질서를 잘 지킵니다. 공중도덕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어디에서도 질서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혼이 무질서한 사람, 여자관계가 복잡한 사람, 돈 문제에 무질서한 사람, 직장에서도 상하 구분 없이 대들고 싸우는 사람, 부부간에 관계가 좋지 않고, 돈 관계, 여자관계, 친구관계, 모든 관계가 무질서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신앙생활도 무질서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질서를 조장하고 파괴시키는 존재는 사탄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번민을 일으킵니다. 번민과 고통은 사람을 무질서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번민과 고통과 무질서로 만드는 마귀가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오면 사람은 막말을 하게 됩니다. 위아래도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없습니다. 완전히 사회와 가정과 일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무질서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 고 했습니다. 질서와 화평은 같은 말입니다. 구별이 되어 있고 질서가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화평한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도 질서를 갖춰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활용에 대한 무질서를 이야기 하는데, 이런 무질서만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사를 활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받았건 관계없이 내가 받은 은사가 잘났다고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거기에 분열과 싸움이 있게 됩니다. 혼돈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위치에서 목사의 지위에서 목사의 은사를 가지고, 장로님은 섬기는 역할을 가지고 봉사하면 됩니다. 

어떤 지위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은사를 받았건 관계없이 자신이 받은 것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남들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손가락질 하거나 자기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내 의견 내 생각의 견해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서 책상에 앉아 서로 맞대고 이야기 하다보면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부수고 폭력을 일삼는다고 하면, 거기에는 질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질서가 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말을 질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진리를 깨닫게 되면, 내가 자유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자유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무질서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자유하게 된다는 말은 내 마음에 영혼에 평안과 기쁨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올바로 들어간 사람은 부드러워지고 질서를 지키게 되고, 마음이 평안해 지고 감격해 지게 됩니다. 부부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부자지간에 모순이 생기고 이웃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모든 것들은 다 마음속에 평안이 없고 질서가 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자신에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조화라고 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들어오면 이 질서가 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는 나 사이에 질서가 깨어지게 되면, 다른 사람과 나 자신과의 질서가 깨어지고 나와 자연과의 질서도 다 깨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악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러분의 말, 행동, 생각, 감정, 이 모든 것들에 질서가 잡혀있고 화평해 졌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질서의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3절-34절에, 여성의 지위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언과 방언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여성의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중에 삽입한 구절이 아니라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문제를 반영합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는 정말,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여성은 유대사회에서는 물건이었습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를 가다가 남자가 여자가 말을 건다거나 이런 것은 유대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자의 지위는 땅바닥이었습니다. 여자는 남편을 순종하고 복종하기 위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로마 시절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여자가 자녀를 가리킬 수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뭔가를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었지만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로마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지위가 낮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면서 남성의 지위와 똑같아 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구별이 없고, 종과 주인의 구별이 없고,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이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성들의 이런 인권이라든가 지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범해지자 여성들이 초대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억눌려 살았던 여인들, 말 못하고 복종하고 살았던 여인들에게 게시가 들어가게 되고 예언의 말씀이 들어가게 되고 방언이 들어가게 되자 이분들이 교회 안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수의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 여성들이 은혜를 받고 방언을 받고, 계시를 받고, 예언을 받고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이것을 순서를 따라 질서 있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여성들이 서로 일어나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여성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 지어다.” 할 얘기가 있으면 남편에게 집에 가서 물어보고 여성들의 입장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교회 안에서 여성들은 잠잠해야 하나요? 할 말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야 하나요? 여자 선생님들은 어떻게 하나요? 여자 순장들은 어떻게 되나요? 여자 장로님들, 집사님, 권사님들은 다 잘못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자라고 해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여자 이건 남자이건 관계없이 질서를 지켜 이야기 하라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덕이 되고 이해가 되고, 화평이 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의 지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습니다. 그러나 교회건 바깥이건 관계없이 잘난 척 하면서 교만한 나머지 교회 질서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40절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품위와 질서는 어디에서 올까요? 사람은 나이에 지위에 알맞게 해야 합니다. 만약에 대통령이라는 분이 너무 가벼운 이야기를 한다거나 아니면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다거나 남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지나친 감정에 울분에 한이 맺힌 말을 자주 토로한다고 하면, 국민들은 불안해합니다. 사람은 지위에 걸맞게 나이에 걸맞게 신앙경륜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품위입니다. 품위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고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를 닮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본문에 있는 것처럼 질서 있게 살아야 합니다.

질서라고 하는 것은 조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조화, 다시 말해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이런 상태가 될 때 우리는 질서가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질서가 있게 되면, 나는 내 이웃과 질서를, 나 자신과 질서를 그리고 세상에 있는 자연과 우리는 질서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질서와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은사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활용하든 관계없이 자신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남들의 모든 것들을 다 인정해 주고, 박수쳐주고 위로해 주고 권면해 주고 칭찬하는 아름다운 덕,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아름다운 질서가 세워져 가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여러분에게 품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품위 있게 질서 있게 만들고, 직장과 일터에서 품위 있게 말하고 품위 있게 행동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여러분의 삶이 아름다워질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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