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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게 하옵소서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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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하옵소서 (막 8:22~26)
 
   
어느 날 헬렌 켈러가 숲 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았니?” 그 친구는 답했습니다. “뭐 특별한 것이 없어!” 너무도 보고 싶었던 헬렌 켈러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두 눈 뜨고도 별로 특별히 본 것이 없다니...” 

후에 헬렌 켈러는 이 마음을 담아 글을 썼습니다. 바로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수필입니다. 그 내용 중 일부입니다. 

첫째 날,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진화해 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 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헬렌 켈러의 두 가지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볼 수 없어서 보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정말 보고 싶은데 시각장애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다른 하나는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두 눈 뜨고 보고 싶은 것 얼마든지 몰 수 있으면서도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안타까운 마음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볼 수 없어 보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기를 구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이 말씀 속에는 맹인 자신의 볼 수 없어 보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짙게 담겨져 있습니다. 

한 번은 시각 장애인 여자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늘 만날 때마다 예쁘게 화장을 하셨습니다. 일반 사람들 못지않게 화장을 잘 하셨습니다. 

장난스럽게 물었습니다. “화장은 어떻게 하시기에 그렇게 잘 하세요?” “평소에는 혼자 하는데 오늘은 목사님 만나려고 옆집 아주머니 도움을 받았어요!” “참 대단하세요. 원래 예쁘신데 화장을 이렇게 잘 하셔서 더 예뻐보여요” “목사님은 외모에 관심이 참 많으신 가봐요 호호호” 농담처럼 대화가 흐르다 그만 가슴 아픈 질문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뭐예요?” 그분이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대답을 했습니다. “내 얼굴이요!” 

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분도 여자이기에 얼굴을 곱게 화장하고 싶어 화장대에 앉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어 화장대에 앉을 때마다 마음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자책에 무척이나 미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변 분들의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분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분들, 그리고 걷고 싶어도 걸을 수 없는 분들... 갖가지 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 그분들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 맹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본문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맹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맹인을 고쳐달라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음을 귀히 보셨습니다. 

눅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 가까이로 갈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침상째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 고쳐주셨습니다. 눅 5:20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환자들을 돕는 그들의 마음을 귀히 보신 것입니다. 

마 5: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변에 안타까움에 눈물짓는 분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을 홀로 있게 마시고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을 나누십시오. 나아가 힘을 다해서 그분들을 도우십시오. 주님께서 이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둘째,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앞 뒤 문맥과 연관해서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저자 마가가 앞 뒤 내용과 본문을 의도적으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맥 속에서 본문을 읽을 때 보다 깊게 본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바로 앞부분 막 8:14-21에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예수님께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있으니 그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엉뚱하게 이해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떡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답답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칠병이삼어의 이적도 눈앞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엉뚱한 말이 현혹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왕하 6장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가 아람 군대를 물리치는 기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치려고 밤중에 기습적으로 도단 성을 에워쌌습니다. 아침에 사환이 도단 성을 둘러싼 아람 군대를 보았습니다. 이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이 때 엘리사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그 사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셔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환이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와 함께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이 사환처럼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안타깝게 여기신 것처럼 엘리사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하는 사환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봐야 할 것을 보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을 보려고 할 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선 마음을 모아서 봐야 하겠습니다. 헬렌 켈러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한 일이 있습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 

그렇습니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모아서 봐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기도입니다. 영적인 것들은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셔야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기도했을 때 사환의 눈이 열려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됐던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보게 하옵소서” 

시 119:18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저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보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돌보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그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눈을 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첫째,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청을 받으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22절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예수님께서 그 맹인을 데리고 지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피해 조용한 곳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맹인을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눈을 뜨개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맹인을 데리시고 비공개적인 장소로 가셨을까요? 이 맹인을 배려해서일 것입니다. 맹인이 사람들을 의식해서 믿음을 고백하기 힘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맹인이 자기가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사람들이 보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따뜻한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오직 이 맹인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맹인의 마음을 배려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맹인을 치유한 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이 사건 이후 자신의 인기는 어떻게 될까? 전혀 안중에 없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23절 이하입니다.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이 광경은 다른 때 예수님의 치유 상황 하고는 무척 달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곳에서 “일어나 걸으라!” 한 마디 말씀으로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곳에서 믿음을 확인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릅니다. 눈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친히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보긴 보아도 아직 완전치 않았습니다.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맹인이 온전히 보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맞춤 치료를 하신 것입니다. 이 맹인에게 맞게 고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계적으로 사람들을 다루지 않으십니다. 늘 똑같이 말씀하시거나 똑같이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에게 맞게 말씀하시고 그 사람에 맞게 치유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사랑으로 다가 오십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어떤 일률적인 과정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맞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보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오늘 본문을 본문 뒷부분과 연결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는 이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과 베드로가 예수님께 올바른 신앙고백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연결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처럼 제자들을 멀리 빌립보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이 눈을 떠서 밝히 볼 수 있게 하신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깨닫고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마가는 육안이 뜨이는 사건과 영안이 뜨이는 사건을 연결짓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다가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는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영안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보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몇 년 전 어린 꼬마가 기도로 고침 받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민성이라는 아입니다. 병원에서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던 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셔서 여러 분들이 이 아이를 위해 기도했고 저도 병상에 찾아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놀랍게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6개월만에 이 아이가 살아나 집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 때 엄마 아빠는 지켜보면서 죽었다고 포기했던 아이가 기도로 낳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고치셨다고 고백하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달라졌습니다. 지금 살아서 잘 자라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고치셨다는 사실을 잊게 됐습니다. 교회도 나오지 않고 다시 전에 다니던 절로 돌아갔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었다고 포기했던 그 아이가 지금 멀쩡히 눈앞에 살아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 부모들의 영안을 다시 열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안을 열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또한 장차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보게 하소서.” 볼 수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외쳤던 이 맹인처럼 외쳐야 합니다. “보게 하소서.” 예수님을 보면서도 누구신지 깨닫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 외쳤던 베드로처럼 외쳐야 합니다. “보게 하소서” 

여러분! 모두 영적 시력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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