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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시대 (합 1:1~4, 롬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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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시대 (합 1:1~4, 롬 12:21) 

 어느 교회의 성경공부 시간에 있은 일입니다. 성도들이 모여 목사님과 함께 성경을 배웁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박국 찾아 펴 놓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모임 가운데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떤 성도가 신구약 성경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성경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호박국은 없어요.” 이 때 재치 있는 성도가 성경을 가져다가 얼른 찾아 주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성경에도 ‘호박국’은 없을 것입니다. 하박국은 있습니다. 7월과 8월 두 달 동안은 늘 성경강해를 했습니다. 올해는 두 달 동안 하박국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와 어쩜 그리 비슷한지요. 성경을 통하여 우리 시대를 사는 지혜를 새롭게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박국은 기원전 600년경의 레위인 선지자입니다. 랍비의 전승에 따르면 엘리사가 살려준 수넴 여인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의심이 많아 ‘구약의 도마’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인물로서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포로기가 끝나기 2년 전에 죽었습니다. 외경 ‘벨과 용’에 보면 하박국이 밭을 갈고 있을 때에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가 이방 감옥에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천사가 하박국을 데리고 가서 옥에 갇힌 다니엘에게 죽을 쑤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박국서에 보면 1장에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왜 악인이 의인보다 성하고 잘됩니까?” “왜 악인으로 하여금 의인을 고통당하게 합니까?” 이런 질문들을 하박국은 하나님께 했습니다. 2장에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래서 2:4에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해답을 얻습니다. 3장에는 해결 후의 하박국의 기도가 나옵니다. 3:2에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라는 새로운 찬가가 있습니다.

  하박국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나라는 황폐하고 예루살렘성은 무너졌습니다. 국민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그의 고민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기도 하고 삶은 비참했습니다.

  하박국의 고민은 이스라엘의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하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을 당하게 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왜 세상에서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지배합니까? 이방인이 하나님의 사람을 고통당하게 하시지만 왜 오랫동안 그렇게 하십니까? 이런 하박국의 질문은 쏟아집니다.

  우리시대 우리의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더 악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나 목회자가 한 가지 잘못만 있으면 안티 기독교인들이 벌 떼같이 달려듭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비난과 고통을 다해야 합니까?

  시편 55:3에는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의인, 선인은 악인에게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근본은 악이기 때문입니다. 악은 선과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8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악한 자들에게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선과 악은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에 항상 있습니다. 모든 시대는 악이 선과 공존합니다. 노아와 가족들 즉 8명의 선인들만 탔던 방주이었는데 홍수 사건 이후에도 악은 존재합니다. 다시 사람들은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글로버의 ‘인류: 20세기의 도덕사’라는 책에는 20세기의 역사는 현대악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악의 역사입니다. 인간에게 악은 언제나 함께 하였습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선인이 환난을 당하고, 성도가 핍박을 당하는 시대입니다. 하박국의 말씀을 잘 살펴보고 이 시대를 사는 슬기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시대는 죄악과 패역을 보는 시대입니다.

  3절에는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죄악, 패역, 겁탈, 강포가 이 세상을 대변하는 말들입니다. 이 네 단어를 잘 보세요.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를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이 네 단어의 의미는 악하고, 남을 괴롭히고,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폭력으로 공법을 파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비슷합니다. 악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죄를 가지고 있는 이상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불의한 세력의 횡포를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세상은 일시적으로 마귀의 세력에 지배를 당합니다. 악이 선을 구축합니다. 그래서 ‘그레셤의 법칙’이라고 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good money)는 법칙은 16세기부터 지금까지 통하는 말입니다. 경찰 열 사람이 도둑 하나 못 잡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배워주지 않아도 악행을 배웁니다. 성경에 나타난 악행을 보세요. 살인, 일부다처, 모함, 배신, 음모, 거짓, 사기 등 성경에도 무수한 악행이 발견됩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이런 악을 스스로 습득하여 행했습니다.

  노아시대도 그랬습니다. 창세기 6:5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합니다. 어쩌면 생각하는 것마다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어떻게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모든 것이 항상 악했습니다. 이것이 홍수로 모든 사람을 멸망시키기 직전의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로마서 1:29-30에 열거한 악을 보세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 입니다. 이것 외에 더할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온갖 죄악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기록한 악한 모습을 보세요.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기 자랑, 교만, 비방, 부모 거역, 감사하지 않음, 거룩하지 않음, 무정함, 원통함을 풀지 않음, 모함, 무절제, 사나움,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함, 배신, 조급함, 자만, 쾌락 사랑, 경건의 능력 부인 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권면합니다. 그 때도 얼마나 죄악이 많았습니까? 요즘 우리 시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을 만큼 온갖 죄악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이 시대의 악의 모습을 보세요. 1억을 은행에서 인출한 모녀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친딸을 7년 동안이나 성추행했습니다. 재산 문제로 아들이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일가족 4명이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조폭이 선배를 무시했다고 하여 후배를 살해했습니다. 얼마 전에 실종된 택시 여기사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낮에는 신사요 밤에는 강도인 중년이 검거되었습니다. 외국의 기사이지만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다 쓰러진 여인이 1시간이나 방치되었다가 숨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불과 지난 주간에 신문에 난 사건들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악이 우리 시대에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입니다.

  세무조사하면 줄줄이 걸려들고, 특검하면 재벌도 두 손 들고, 파헤치면 먼지 안 나는 데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악하게 사는 것 같은 시대가 우리 시대입니다. 하박국의 시대나 지금 우리 시대나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어찌 그리 악한지요?

  이런 시대를 사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에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라”고 합니다. 나쁜 것은 아예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욕하며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민자가 많이 있는 어느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부모 모임에서 물었습니다. “가정에서 주로 쓰는 말이 어떤 말입니까?” 어느 이민자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욕을 주로 많이 하지만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욕도 하지 말고 항상 성경적 기준에서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한 것을 닮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선에게 먹이를 주어 선이 자라게 해야 합니다. 악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악이 우리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우리 속에 있는 흰 말과 검은 말은 먹이를 많이 주는 말이 이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속의 선이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존 파이퍼는 “그리스도인의 순결은 단지 악을 피하는데 있지 않고 선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이 땅에 점점 죄가 많아지고 황폐해져 갑니다. 정말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이 땅에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라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시대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시대입니다.

  4절 하반절을 보세요.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득세합니다. 악인이 잘됩니다. 의인이 고생합니다. 착하게 제대로 사는 사람이 잘 안 됩니다. 적당히 얼렁뚱땅 사는 사람이 잘 됩니다. 악인 때문에 의인이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악인에게 가리워져 의인이 자취를 감추는 시대입니다. 하박국의 시대는 갈대아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워싸고, 압박하고, 침략하던 시대입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던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도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아합은 악한 왕입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은 남편보다 더 악한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신을 섬기는 선지자와 전쟁 같은 결투를 하여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했고 승리하였습니다. 이런 승리를 거둔 엘리야가 이세벨의 박해에 못 이겨 호렙산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자청했습니다. 선지자들을 칼로 죽이고 엘리야의 목숨까지도 위협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도망가서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의인이 보이지 않고 다 죽었고 자신만이 살아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의인 7천명을 남겨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의인들이 악인에게 에워싸여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악한 시대는 의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총장은 퇴진하라고 압박을 받습니다. 우리가 사방을 둘러봐도 악인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착한 사람은 왕따를 당합니다.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늦고 지각을 합니다. 도덕적인 사람을 쫀쫀하다고 합니다. 편협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완전히 에워싸인 것 같습니다. 사회는 교회에 대하여 위선자라고 하며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타종교는 기독교에 대하여 편협하다고 합니다. 배타적이고 부도덕한 집단이라고 합니다. 언론은 예수님을 신화적 존재라고 하고, 성경을 허구라고 하고,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들은 조작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고 얕보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우리 편이 없는 것 같은 시대입니다. 완전히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입니다. 이제는 동서남북이 다 막히고 위만 뚫렸습니다. 다른 사람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함을 인정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의 결함에 대해서는 피해 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들과 같은 줄로 알고 자신들의 잣대에서 우리를 비난하고 에워쌉니다.

  고린도후서 4:8에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에워싸도 싸이지 않습니다. 욕해도 귀에 듣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보시면 잠언 23:27에는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합니다. 24:1에는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고 합니다. 성경대로 우리가 악한 자를 대하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사막의 교부인 아르세니우스는 우리가 선을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은 세상 지식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집트 농부들이 선을 소유하고 있는 까닭은 힘써 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악해집니다. 악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꼭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시편 118:11에는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악인들이 우리를 에워쌀 때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하박국의 시대처럼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시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고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인은 잠시는 잘 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결국이 어떠한지 보세요. 시편 1:4에는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5절에는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합니다.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6절에는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악을 승리하게 용납지 아니하십니다. 로마서 12:21에는 그래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선은 악을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지만 반드시 의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결론

  한스 큉은 “목사가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이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은 성직자보다 평신도가 더 살기 힘든 시대입니다. 세상일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도 힘든 시대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합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세요. 이것이 이기는 길입니다.

  토머스 왓슨은 ‘묵상’에서 “성도들은 나름대로 약점들이 있다. 그러나 악인들이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은 이들의 약점 때문이 아니라 거룩함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를 에워싼 무리들을 보세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보다 약점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 보다 거룩하기 때문에 에워싸고 미워합니다.

  성경은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해답을 줍니다. 디모데후서 3:12에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합니다. 경건한 자가 박해를 당합니다. 거룩한 자가 에워싸입니다. 예수 잘 믿는 자가 미움을 당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에워싸도 싸이지 마세요. 위가 비었지 않습니까? 요즘과 같이 교회가 어렵고 그리스도인들이 위협을 당하는 시대에 우리는 비어있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도약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어려운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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