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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하는 교회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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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하는 교회 (행 13:1~3)


교회의 이름을 보면 그 교회의 특성을 알 수가 있다. 제자교회는 제자 삼는 일을 교회의 최고 가치로 여기고 제자 삼는 일에 주력하는 교회일 것이다. 광염교회는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교회이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고, 냄새나는 곳을 찾아서 소금 뿌리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어떤 교회 이름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인데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기쁨이 되어드리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교회일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교회는 ‘평안’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평안’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평안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교회 이름을 놓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요 14:27의 말씀을 마음에 주셨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님의 평안이 없는 것을 보고 세상의 평안이 아닌 주님의 평안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주보에 있는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평안을 심는 '평안교회’라는 이미지 구호를 적어 넣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안디옥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유명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디옥’이란 이름을 가진 교회들은 대부분 선교에 대하여 열심을 품고 있는 교회임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안디옥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어떤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안디옥교회에는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이들 5명의 지도자들은 선지자이면서 또한 교사였다. 그들의 이름은 교회의 대표 사역자인 바나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그리고 바울이었다. 바울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소개된 것은 교회 안에서 아직은 유력한 입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지자직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서 초기 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직분이다. 그리고 교사는 성경을 해석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초기 교회시대에는 교회를 세우는데 선지자와 교사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안디옥교회에 처음으로 부임한 사람은 바나바였다. 바나바가 열심히 안디옥교회를 섬기자 교회가 부흥되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을 불러 들였다.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 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 일을 통해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바나바는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가기 위해 훌륭한 지도자들을 영입해 왔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명예보다 주님의 교회를 더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5명의 선지자와 교사들이 교인들을 잘 훈련시켰다. 어느 정도로 잘 훈련시켰는가? 다음 2절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2.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교회로 성장하였다.

여러분, 영적으로 어리면 성령께서 말씀을 하셔도 알아 듣지 못한다. 고린도교회는 복음에 대한 지식과 은사를 많이 받은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있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그러면, 영적으로 성숙한 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2절 상반절의 말씀 속에서 그들의 성숙한 모습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1)온전한 예배자
‘주를 섬겨’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 경건의 자세라기 보다는 공동체적 예배의 태도를 나타낼 때 쓰이는 용어이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아름다운 습관을 바나바는 그대로 가르쳤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바나바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 섬기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성숙의 출발이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 영적 성숙은 이뤄지지 않는다. 

2)금식
믿음이 약한 사람은 금식을 두려워한다. 큰일 나는 줄로 안다. 오늘 본문은 ‘금식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5명의 리더들만 금식한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함께 금식에 동참하였다. 금식의 목적은 육적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다. 교회는 때때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교회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금식을 선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동참케 할 수가 있다. 

금식을 기도 응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순수하게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금식할 때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안디옥교회는 지도자들의 인도를 따라 금식하는 일에 함께 동참했다. 개인적으로 금식할 때도 있지만 공동체가 금식을 선포하고 함께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사명을 부여하신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온전한 예배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2절 하반절에서...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 말씀은 어느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공동체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에 들려 주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황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놀기 좋아하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컬컬하고 답답하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은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의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우리에게 해결의 답변을 주고 있다. 온전한 예배 회복과 금식이다. 


3.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교회

(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교회 공동체가 받은 성령의 음성은 주의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는 것이었다. 곧 선교사로 내보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사실 교회적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내용이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성도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목회자였다. 그리고 바울은 탁월한 성경교사로서 성도들에게 존경과 인기를 얻고 있었다. 

두 사람 없는 안디옥교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충격적인 말씀 앞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럴 때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공동회의를 해서 투표로 결정할 것인가? 아니면 촛불을 들고 떠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인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문제를 위해 다시 금식하기로 결정했다. 보내야 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그 말씀 앞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리고 날자를 정하여 파송 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파송했는데.., 안수의 목적은 선교사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역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위한 것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은 회중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엄숙하고도 은혜로운 파송식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파송식 예배나 교회개척예배 참석 소감.

그리고, 3절 마지막 부분의 ‘보내니라’는 말의 의미는 ‘send'가 아니고 ’released' 곧 ‘놓아주다’라는 뜻이다. 안디옥교회 교인들이 자신의 교회를 생각하면 결코 놓을 수 없는 분들이지만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을 선교사로 내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안디옥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1.선교의 주체는 성령이시고 교회는 수행기관이다. 

성령께서 선교를 명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안디옥교회는 강력한 리더십과 우수한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힘써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그 결과 안디옥교회 신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예)예수쟁이

그들은 예배를 제대로 드릴 줄 아는 성도였고, 금식할 줄 아는 성도였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성도들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한 믿음의 용사들이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교회의 리더들을 파송하는 일에 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힘이 약한 교회, 영적으로 유약한 교회는 결코 사명을 수행할 수가 없다. 교회의 규모가 크고 작은 것은 관계가 없다. 선교에 대하여 성도들이 얼마나 헌신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2.교회는 최선의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처음 선교사를 파송한 안디옥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교회에서 최고의 자질을 소유한 리더를 선교사로 따로 세우고 파송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준비되지도 헌신되지도 않은 사람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자녀들 중에 가장 우수한 자녀에게 목사와 선교사로 헌신하도록 권유했다고 한다. 이전에 신학대학은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실패하면 가는 곳, 갈곳 없으면 가는 곳으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실력 있는 헌신된 인재들이 목회자로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교회에서도 최고의 인재를 목회자로 선교사로 보내자. 

3.교회는 보내는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안디옥 교회는 파송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영적 에너지를 쏟아 부은 것이다. 그리고 보내놓고 외면하지 않았다.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교회 앞에서 보고하였고, 교회는 도처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을 인해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다.

20년 전인, 1988년 친구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떠나면서 책 한 권을 주었다.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 별 관심이 없었다.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었다. 합동신학대학원에 들어가서 학회를 선택해야 하는데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 선교학회에 들어갔다. 

양영학 선교사와 면담, ‘원전도사님은 보내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후로 가는 선교사는 접고 보내는 선교사로서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교회를 개척한 후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의 원 달러 운동에 도전을 받고 선교헌금 천원 1구좌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절기 헌금도 역시 선교 구제를 위한 헌금으로 쓰기로 작정했다.
1997년 IMF 금융위기 때 교회는 20% 인상하여 선교비를 보냈다. 

사실 교회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 매면서 해외선교, 농어촌교회 미자립교회. 구제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 결과 교회가 가난해 지지 않았다. 훌륭한 건물도 허락하셨다. 

우리 교회는 매년 맥추절은 선교주일로 지킨다. 왜냐하면 그 절기 속에 선교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서구 교회의 몰락은 물질 문명의 발달과 함께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상실한데 그 원인이 있다. 독일교회는 관광 명소로, 영국교회는 회교사원이나 창고로 전락하고 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주의 날이 가까올 수록 추수할 것을 더욱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일손이 너무 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다. 

몇 년 전 겨울에 홍콩 벤홍 목사 집회가 목동 지구촌교회에서 있었다. 그때 헌신자 일어나라고 하니까 노인 한 분과 한사랑교회 천엽목사가 일어났다. 그는 한국에서의 목회를 후배에게 넘기고 지금 인도에서의 사역을 위해 호주에서 훈련 중에 있다. 

선교하는 교회는 모든 신자가 선교사인 교회를 말한다. 하나는 가는 선교사이다. 마음에 감동을 받고 주의 복음을 위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하나는 보내는 선교사이다. 나갈 수 없다면 보내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바란다. 선교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교회의 본래적 사명이자 목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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