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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사로 부름받은 사람들 (삿 3:1~1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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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사사로 부름받은 사람들 (삿 3:1~11, 31)


I. 어려운 시대 쓰임받은 사람들

사사기의 본론이 시작되어지는 3장에 보면 남쪽 유대나라에서 쓰임받은 세 명의 사사가 나옵니다. 옷니엘과 에훗과 삼갈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에훗에 관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옷니엘이란 사사와 삼갈이란 사사를 통해서 「사사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을 세워주는 소중한 말, 가장 멋진 말이 있다면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당신은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야"하는 말 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요3:1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다 영광스런 사역자로 쓰임받는 것은 아닙니다.(딤전2:4)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상급,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행복이 있다면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요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요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왕이 나타나기 전까지 참으로 어두웠던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성경은 이들을 이름하여 "사사"라 부르지요. 사사기에 12명의 사사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기록상 첫 번째 등장하는 사사가 옷니엘이란 사사입니다. 사사가 무엇이며 어떻게 부름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정확한 모델 전형을 보여주는 사사가 옷니엘이란 사사입니다. 그러므로 옷니엘은 모든 사사들의 모델,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3장 앞부분 1절-6절은 사사기 등장하게 되어지는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나옵니다. 이들은 가나안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왜 그토록 피흘리며 전쟁을 해야 했는지 그 이유와 성격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우리 백성이 왜 애굽을 떠나야 했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지 그 목적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신들이 이 가나안 땅에서 어떤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지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세대는 소위 다른 세대, X세대라 할까요? 신세대라고 할까요? 그들은 하나님 대신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을 쫓아내기는 커녕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어우러져 살았고 오히려 그들을 배우는가 하면 오히려 그들의 풍요로운 삶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남자들은 바로 그 이방 딸들을 아내로 삼아 가정을 이루었고 여인들은 이방 족속 가정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가치관의 혼돈이 있었습니다. 풍요 가치관, 재미 가치관, 성공 가치관으로 그들의 신앙체계가 뒤죽박죽되고 말았습니다. 야훼신앙이 혼합종교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종교와 싸우고 그것을 쫓아내라고 했더니 아예 한통속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름하여 적과의 동침입니다. 유혹과 맞서 싸우라 했더니 오히려 유혹을 환영하고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II. 사사시대의 싸이클(악순환)

사사기를 읽어내려 가다보면 사사가 등장할 때 마다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또" "다시"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야샤프"(iasiaph)라고 되어 있습니다. 
삿 3장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삿 4장 1절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삿 6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삿 10장 6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삿 13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다시 악을 행하였으므로" 
또 또 또 다시 다시 ... 사사기가 끝날때까지 이 단어는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사사시대의 범죄의 악순환, 타락의 싸이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범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징계를 받습니다. 아프다고 울다가 회개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자 사사를 보내주시고 백성들을 평온가운데 지켜주신다 하는 싸이클이지요. 

1. 싸이클의 출발은 언제나 범죄, 타락으로 시작되어집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악을 행한 내용이 나오지요.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남의 신인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바알들, 아세라들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동지역 사람들은 장엄 복수형이란 것을 쓰는데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인간이 가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을때 복수로 씁니다. 그리고 지역마다 여러 모양의 바알들이 있었고 아세라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지방마다 마을마다 자기의 귀신들을 섬겼더라.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싸이클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첫 번째 싸이클 범죄와 타락은 반드시 다음 단계인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초래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여기 구산 리사다임은 이름이 아닙니다. "두 배나 더 악한 구산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산 왕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시달렸던지 이스라엘이 치를 떨며 붙인 별명이 구산 리사다임입니다. 

여기 "진노하사"란 말은 하나님의 얼굴이 불타 올랐다고 히브리어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NIV성경에서는 "여호와의 분노가 이스라엘에게 대하여 불타올랐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하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두 배나 더 악한 사람에게 자기 백성에게 팔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팔았다 "마카르" 사람을 노예로 팔아치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두 배나 더 악한 구산 리사다임을 보냈다는 얘기이지요. 너희 마을에서 노루떼를 쫓아라. 그랬더니 사람들이 게을러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곰이 나타나고 사자가 나타난 겪이지요. 

갑절이나 포악한 왕의 압제아래 지배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하는 것을 우리민족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제 35년 일제의 강점기를 보내며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하루 하루를 믿음의 선진들은 보내야 했습니까? 민족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내 나라말을 쓰지 못하고 남의 나라 말을 써야 했습니다. 내 어버이가 지어주신 아름다운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로 내가 불리어져야 했습니다. 피땀 흘려 농사하고 나면 모조리 수탈을 해갔고 무거운 세금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어린학생들이 남의 전쟁터에 끌려가 총알받이 노릇을 했고 여인들은 닥치는 대로 끌려가 성노리개감이 되어야 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앙을 지키고 애국 운동을 한다는 이름 하에 모두 끌려가 고문당하고 순교 당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과 한번 하지 않았고 그 못된 짓을 인정조차 하지 않습니다. 남의 나라 왕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우리는 성경을 읽어서 금방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3. 싸이클의 3단계는 회개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본문 9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히브리어의 전개과정이 오늘 본문에 보면 퍽 재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자카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잊어버린 백성을 하나님은 팔았다 "마카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징계를 받고 아파서 울었다. 부르짖었다. "자아크"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카르 - 마카르 - 자아크 이렇게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4. 싸이클의 4단계 하나님의 구원행동이 나타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오늘 사사가 구원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 사사가 등장할 때마다 구원자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신세대, 이 X세대에게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선교사, 전도자 역할을 했기에 바로 이 사람들을 구원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온몸과 역사를 일으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지요. 

어느 마을에 마늘을 모조리 훔쳐간 도둑이 있대요. 고을 원님에게 끌려가서 너를 벌 주어야 되겠는데 벌을 스스로 선택해라. 세가지 벌 중에 하나를 선택하거라. 하나는 마을 100쪽을 먹든지 아니면 곤장 50대를 맞든지 아니면 벌금 금 한냥을 내 놓아라. 돈은 아까와서 못 내겠고 곤장 50을 맞으면 죽게 생겼고 그래서 마늘 100개를 먹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마늘을 20개쯤 먹었더니 속이 쓰려서 100개는 커녕 30개도 못 먹게 생겼거든요. 곤장을 맞겠다고 합니다. 곤장을 맞는데 20대쯤 맞더니 기절을 해버립니다. 2대 더 맞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아예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 한냥을 내고 나왔다는 얘기입니다. 

진정한 회개없이 빠져나갈 궁리만 하다가 쓸데없는 고통을 당한 격이지요. 오늘 우리 가운데도 얼마나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 악한 싸이클을 빨리 예수 이름으로 끝장내고 거룩한 싸이클을 만들어 가는 것이 믿음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의 싸이클을 잘라내고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 - 이것이 성화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III. 모델(전형) 사사 옷니엘

사사기에 기록된 첫 번째 사사가 옷니엘입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9절 후반절부터 10절에 나오는데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이것이 옷니엘 사사가 행한 행적에 관한 기록의 전부입니다. 두 배나 악했던 구산 왕 리사다임을 물리셨다고 한다면 이게 어찌 작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이토록 끔찍한 구산 리사다임을 무찔렀다고 한다면 얼마나 풍성한 이야기 거리가 그 안에 있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왜 이토록 짤막하고도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앞으로 너희들이 사사를 공부하게 될 터인데, 사사를 볼 터인데 사사에게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 어쩌면 못나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멋지게 쓰시는가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사사기를 공부하라는 뜻으로 아주 짤막한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의 사사에 관한 기록이 아닙니다. 사사시대 내내 반복될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사사기를 읽어내려 가야 될 안경, 관점을 옷니엘을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옷니엘 사사를 소개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퍽 재미있습니다. 
9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관습에 의하면 "그나스의 아들"이란 말이 나와야 되는데 "갈렙의 아우"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굉장히 파격적인 소개입니다. 이는 갈렙이 누구인가를 제외하고 옷니엘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갈렙이 누구였습니까?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복한 영웅이지요. 12명의 정탐꾼들이 갔다 돌아온 다음에 여호수아와 함께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사람이 갈렙이지요. 나이 85살에 헤브론 산지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터에 당당히 나섰던 인물이 바로 늙었으나 젊은이 못지 않은 기력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갈렙이란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경배와 찬양송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는 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갈렙입니다. 이 사람을 평가하는 신명기 1장 36절에 보면 "그는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 좋은 가문에서 신앙을 지켜온 사람, 신앙의 공백기에 이런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 그가 갈렙이요 그의 아우 옷니엘이었다. 이런 설명이지요. 

오늘도 입만 열면 욕지거리가 터져나오고 집안에 들어서면 방바닥에 술병이 굴러다니는 집안에서 자란 자녀들과 말씀과 기도의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정의 분위기에서 자란 자녀들, 젊은이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옷니엘을 "갈렙의 아우"로 소개하는 것은 갈렙이 유명했고 또 훌륭한 신앙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우 옷니엘이 형 갈렙과 함께 했던 옷니엘이 갈렙과 공유했던 신앙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옷니엘과 갈렙은 단순한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전투에서 생사를 같이하며 싸웠던 전우였습니다. 여호수아 15장 16절-17절에 보면 「갈렙이 한 전선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전선에 나가 승전보를 안고 돌아오는 사람은 동생 옷니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옷니엘은 갈렙의 아우이면서 사위였습니다. 좀 이상하지요. 그러나 이당시 풍습이나 전통 문화에 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이것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었다 하는 얘기이지요. 

가나안 정복사에서 형 갈렙과 함께 전선을 누리던 옷니엘이었지만 지금 80살 예비역 노장이 되어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옛날 경력이나 팔아먹으며 여유있는 노년의 삶을 즐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 아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젊은 장수들이 깃발을 들고 일어나 주기를 고대했겠지요. 그런데 어느날 이 늙은 노병 옷니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사명을 주어서 사사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대가 가서 이 백성을 구원하라. 하나님의 과제 미션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났고 잠든 이스라엘을 깨웁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붙여주신 구산 리사다임을 무찔렀다 하는 얘기이지요. 

이처럼 평범한 사람, 아니 한물간 노병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사명을 그가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흘러간 물, 노병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시대를 구원할 수 있다. 이 멀쩡한 젊은이들아 뭘하냐? 이게 사사기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옷니엘이 경험많고 전략이 뛰어나 승리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니 승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 입 한번 열기조차 쑥스러워 하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말이 좀처럼 없고 어디가도 늘 고개만 숙이고 있고 늘 조용하더 사람인데, 노래만 부르라 그러면 얼굴이 벌개지는 사람인데, 한잔 마시고 나면 그렇게 말이 많아지시는 분이 계십니다. 동리를 휘저으면서 온동리 개가 다 짖도록 노래를 부르고 그렇게 말이 없던 사람이 밤새도록 식구들을 불러앉혀 놓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술말고 사람을 이렇게 갑자기 변화시키는게 또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평범했던 사람이 무의미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사람이 성령의 놀라운 강림과 함께 이토록 엄청난 역사를 감당했던 일들이 기독교 역사속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노병 옷니엘과 함께 이스라엘은 40년간 평안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IV. 짤막한 기록 긴 여운! 

옷니엘로 시작된 사사의 역사는 에훗, 드보라, 기드온으로 이어져 가게 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 사사기 3장에서 우리의 눈을 멈추어 서게 하는 한 구절이 나옵니다. 

사사기 3장 31절입니다.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3장이 편지라 한다면 「P.S. 추신」과 같은 한 절입니다. 3장이 방송이었다면 정규방송 도중 짤막한 방송 자막 한 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정규방송 중에 제일 밑에 블레셋 군대가 나타나서 양민들을 무참히 학살, 그때 소 모는 삼갈이라는 농부가 나타나서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육백명을 모조리 때려죽임. 이런 얘기입니다. 뉴스로 보면 잠시 방송을 중단하고 발표하는 1분 긴급뉴스와 같은 내용이 오늘 본문 31절의 내용입니다. 

갑자기 정규 방송이 중단되어지고 긴급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마을에 블레셋 사람들이 나타나서 양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학살하는 가운데 논에서 소를 몰던 삼갈이란 젊은이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육백명을 모조리 때려 죽였다는 아주 놀라운 소식이 금방 입수되었습니다. 1분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이런 내용이 오늘 본문 마지막 31절입니다. 

이처럼 짤막한 한 구절이지만 사사기가 끝날 때까지 긴 여운을 남겨주는 말씀이 이 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31절 한 절을 "짤막한 기록 긴 여운"이라고 제 나름대로 주석을 달았습니다. 

31절 한 절이 가져온 긴 여운 가운데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과 블레셋 족속과의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갈등과 싸움의 시작입니다. 

성경에 250번쯤 등장하는 이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까다로운 족속입니다. 오늘 본문에 블레셋이 등장한 다음에 오고 오는 세대에 수없는 블레셋과의 마찰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만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이 블레셋이란 족속은 언제, 어디서 시작된 족속인지 논쟁이 많고 까다로운 족속입니다.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그 땅을 팔레스틴이라 하지요. 이 팔레스틴이란 말이 이렇게 원수 중에 원수인 블레셋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블레셋은 역사적으로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살다가 가나안으로 이주해온 해양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일찌감치 등장합니다. 창세기 10장 14절에 보면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 기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 출애굽 여정에서 이스라엘의 광야길에 큰 걸림돌이 블레셋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 밖의 역사적인 기록들과 성경상 블레셋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사사시대부터라고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 가운데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옛날 전쟁이 많은 것이 아니라 신학자들 가운데 전쟁이 많은 족속이 이 블레셋입니다. 이들이 누군가를 가지고 신학자들마다 서로 다르게 얘기합니다. 지금까지도 우리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당시 중동지역에서 철기문화를 독점하고 있던 사람들이 블레셋 족속이었고 군사적으로 굉장히 발달한 족속이 블레셋족속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골리앗이 바로 당시 블레셋의 대장. 골리앗이 입고 있는 복장을 보면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지요.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 자루가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엄청난 철제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게 블레셋 족속입니다. 

사사기 초기에 이 엄청난 족속을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이스라엘 역사, 특별히 사사시대를 내려가며 블레셋과의 고달픈 전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블레셋은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인본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인본주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경은 이때부터 인본주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블레셋은 모든 것 중심에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블레셋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불가능이 없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 이게 블레셋입니다. 

죄라는 개념은 없고 인간의 가능성을 무한정 과장합니다. 신본주의와의 싸움, 이것이 인본주의이지요. 왕이 누구냐? Let King, Be King. 이 언쟁 싸움에서 이 거룩한 영적인 싸움에서 인간이 왕이다. 내가 왕이다. 너희들 각자가 왕이다. 주장하는 족속이 바로 블레셋족속입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향유를 깨뜨려 여인이 기름을 부었을 때에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가롯 유다가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깝고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는 존경받고 칭찬받는 상당히 인본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멋있는 민족이지요. 누가 왕이냐는 싸움에서 인간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족속이 블레셋입니다. 기독교 안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오는 능력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가능성을 부풀리고 추켜 세워주는 인본주의 사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간에 미국에 가장 큰 교회를 조엘 오스틴이 쓴 책 가운데 「긍정의 힘」 「잘 되는 나」라는 책이 있는데 베스트셀러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인 이런 사상이 기독교 안에 인본주의라고 기독교 안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사상, 쫓아내야 될 사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다르게 보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여기 31절 사사기에서 단 한번 이름이 등장하고 긴 여운을 남긴 주인공의 이름은 삼갈입니다. 삼갈 벤 아낫. 아낫의 아들 삼갈. 

제 딸의 이름은 단비이고 제 아들의 이름은 단샘입니다. 누가 보아도 믿음의 집안에서 자란 아이구나 하는 걸 알겠지요. 어떤 집안에 보니까 제일 큰 아이가 하은이 두 번째 아이가 예은이 세 번째 아이가 성은이입니다. 하나님 하자에 예수 예자에 성령 성자라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은혜. 하은이 예은이 성은이 요즘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하자, 예자 - 바로 이런게 많잖아요.

삼갈이란 이름은 가나안 여신의 이름 아낫이란 이름이 붙어 있어요. 아낫의 아들. 그의 아버지가 대단히 가나안화 되어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지요. 자기 아들을 낳고 이 아들의 이름이 아낫의 아들 삼갈 이런 뜻인지 아버지가 이미 아낫이란 이름 - 가나안의 여신이란 이름을 자기에게 붙여서 아버지의 이름이 아낫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 집안은 이미 가나안의 문명, 가나안의 신앙에 오염된 집안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가나안 사상, 신앙, 문화에 오염된 신세대를 대표하는 삼갈에게 성령이 임하시니 그도 사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가나안 문화에 오염된 그도 성령이 임하니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왼손잡이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고 한물간 노병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있고 심지어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앙의 진공상태에 빠져 살던 인물이지만 성령이 임하니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그도 사사가 될 수 있었더라는 얘기이지요. 

여기 31절에 등장하는 무기 하나가 나오는데 긴 여운을 남겨줍니다.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다" 소 모는 막대기. 구약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무기요 단 한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소 모는 막대기. 정식 군인이 아니었지요. 정식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 엄청난 철기문명으로 완전무장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자막과도 같은, 추신과도 같은, 긴급뉴스와도 같은 한 절을 통해서 사사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앞으로 계속될 블레셋과의 싸움은 무기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략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숫자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이 땅에 살아왔던 내 삶의 싸움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을 때 하나님은 내게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무기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가? 내가 어떤 대학을 졸업하고 어떤 학위를 가졌는가? 하나님은 내게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무기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출세를 하고 사회에 어떤 위치를 차지했으며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았느냐? 숫자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목회자인 나에게 하나님께서 한소망교회 교인이 몇 명이나 모였으냐? 어쩌면 하나님 심정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은 그 다음의 관심일는지도 모르지요. 전략싸움이 아닙니다. 내 재주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묻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반드시 승리했던 승전보를 안고 가야 하는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요 순종의 싸움이요 믿음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거룩한 삶을 살았느냐.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성화의 싸움에서 얼마만큼 승리했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삶의 목적을 얼마나 아름답게 이루며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비전의 싸움, 꿈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명의 싸움, 소명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했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자원들,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왕되게 했는가? 내가 왕이었는가 하나님이 왕이었는가? Let King, Be King. 이 싸움이 사사기의 싸움이요 오늘 신앙인의 싸움이요 나의 싸움이요 너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도 블레셋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누가 왕이냐는 이 싸움에서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인본주의 블레셋에 짓밟힐 때마다 너는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도 육백명의 철갑옷을 입은 블레셋을 무찔렀느니라. 

인생을 살아가다 네 앞길을 가로막는 엄청난 적이 있을 것이고, 신앙생활 하다가 무서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과 좌절과 낙망에 부딪힐 때에 너는 포기하지 말아라.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 육백명의 철갑옷 군사를 무찔렀느니라. 아들아 딸아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너희도 세상을 이기게 될 것이니라. 소 모는 막대기 하나에도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에 철갑옷 군사, 육백명을 무찌를 수 있느니라. 할렐루야. 인생의 어떤 위기를 맞이할 때에, 어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할지라도 삼갈을 기억하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퇴한 노병을 불러 이스라엘을 평온케 하셨습니다. 장애인 사사 에훗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문화에 던져진 신세대 젊은이도 성령을 부을 때에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느니라. 소중한 내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고 세상적으로 흘러만 가는 것 같이 보여질는지 모르지만 그대가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대의 자녀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실 때에 그 평범하게만 보이던 그 아이들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도 일어나 이 민족에 쓰임받는 일꾼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도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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