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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훔의 신학 (훔 1:1~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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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의 신학 (훔 1:1~8, 2:2)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신학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므로 그렇게 많은 교파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절대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강조점을 두다보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이지 잘못되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각자도 조금씩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 자체에도 이러한 문제가 확실히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이런 것이 아주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시는 사명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제목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니느웨를 보면서 오늘 말씀 나훔의 신학은 정반대의 뜻이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어떤 것이 더 훌륭하냐를 따질 필요 없이 하나님 사역의 속성이 때로는 무자비성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무한한 자비성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니느웨에 대한 저주 신학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표현이 때로는 잔인스럽고 어떤 때는 수치스럽고 또 어떤 때는 고상한 시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니느웨 성은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피의 도성이 될 것이다. 강포와 늑탈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 도시는 살육 당한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게 될 것이며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시체에 걸려서 넘어지게 될 것이며 너희는 떨리는 무릎이 서로 부딪칠 것이며 허리가 아프고 공허하고 황무하며 낮이 빛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매우 수치스러운 표현으로 여인에 비유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네 치마를 걷어쳐 내 얼굴에 이르게 하고 내 벌거벗은 것을 내 열국에 보이며 내 부끄러운 것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수치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너는 능욕거리가 되고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사실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입니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강국으로서 BC 721년에 이 나라에 의해 유대 나라도 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그렇게 강함을 자랑하느냐? 메뚜기 같이 될 것이다. 다 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저주로 나타나고 있는가? 또 요나서의 신학과 나훔서의 신학이 이렇게 대조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문제인가? 같은 니느웨 대상을 놓고 요나서는 구원을 선포하고 나훔은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훔 신학을 이해하려면 니느웨에 대한 최초의 성경 증언부터 찾아야 합니다. 창세기 10장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사람이라곤 노아의 세 아들과 그 가족들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 함의 후손으로 구스라는 아들이 탄생했고 구스의 아들이 니므롯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니므롯은 당대의 영웅이라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니므롯 장군이 니느웨 성을 만든 것입니다. 

창세기 10장 10절에 보면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레센을 건축하였으며”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창세기에서부터 함의 후손들이 건설한 고대 도시이며 그것이 계속 발전하여서 강대국을 이루게 됨으로서 셈의 후손들에게 큰 고통을 준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아가 술이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길바닥에 노인이 술이 취해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으니까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세 아들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려 드리는 일을 했고 함은 핀잔을 했습니다. “노인네가 주책없게 저렇게 술을 퍼먹고 길바닥에 벌거벗다니 저게 뭐냐?” 그래서 노아로부터 이 함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창세기 9장입니다. 

나훔 예언자는 그 옛날을 기억한 것입니다. “너희 니느웨가 아무리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노아가 내린 저주가 창세기 9장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너희가 다 저주받을 일만 하고 있다. 더군다나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이 있고 다윗이 있고 예수님도 그 혈통 가운데 있는데, 태초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결정적으로 괴롭히는 니느웨 너희는 마침내 저주를 받아 참혹한 심판의 현장이 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백성들을 오래 전에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시려고 선지자 하나를 보냈는데 요나라는 사람입니다. 요나가 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서 선포한지 100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당시부터 지금까지 100년의 역사 속에서 니느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지금 니느웨 거리에 예배당이 가득하게 건축되어져 있어야 하고 니느웨 군중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요나가 와서 구원을 선포한지 100년이 지난 지금은 옛날과 똑같아졌고, 아무 죄도 없는 셈의 후손들을 끝없이 와서 괴롭히고 마침내는 자유와 나라까지 다 빼앗아 버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들을 핍박하는 너희는 망한다. 망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을 보세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온지 123년입니다. 그런 짧은 역사에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를 보세요. 이 조그만 땅에 5만개의 교회가 서 있잖아요? 주일날이면 저마다 교회 가는 버스 때문에 거리가 혼잡할 정도로 때를 이루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제 조금 있으면 여름 동안 선교팀들이 외국으로 나갈 터인데 교회가 선교 가는 사람들을 하도 많이 보내서 비행기 예약이 안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요나가 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에 몸을 바치고 있는 니느웨여! 너희는 참다못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다.”

그 다음에 나훔서에서는 특별한 특징이 하나 나타나는데 2장 2절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지금 하나님께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쓰임을 받는 사역자 민족, 우리는 지금은 핍박받고 멸망당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쓰시는 사역자 백성을 회복하여 주셔서 시온의 영광이 다시 빛나게 해 주실 것이다.” 이런 대조적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선택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와 영광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된 구원 사역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너희들은 저주를 받아서 멸망 받을 것이다.” 이것이 나훔서의 신학입니다. 

하나님 구원의 속성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창조와 구원과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잘못된 것을 구원하시며 잘못 가는 현장을 심판하십니다. 언제나 그렇게 똑같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서론적으로 말씀드린 부분을 구체화하면 이 신학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선택 백성을 괴롭히면 하나님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신다는 부분을 성경에 증거로 우리가 발표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나훔 예언자는 니느웨의 처참한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그러한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 죗값은 너희들의 멸망이다.” 

그러면 그러한 신학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것도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사역자를 선택하시는데 역사 신학에서는 최초의 부름을 받은 사람을 아브라함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 성경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 위에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 무시해 버립니다. 아브라함부터 계산합니다. 그래서 그가 열국의 아비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면서 최초의 사역자 약속을 합니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왜 가라고 하시는 겁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게 복을 줄 터인데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선포해 주셨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만 복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세계를 다니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복을 싫어하거나 복을 모르는 백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 세계는 복을 중심으로 문화가 역사화되었습니다. 

보세요. “복(福)”자를 써서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며 대문에 붙이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왔습니다. 문화는 복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국 남자들은 머리를 안 감아요, 그래서 좀 지저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왜 안 감느냐? 머리 감으면 복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복 때문에 안 감는 겁니다. 제가 다녀본 나라의 국민들은 복을 모르거나 싫어하는 민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나라나 고유문화가 있는데 복을 중심으로 역사화 되었습니다. 벨기에 브뤼셀 광장에 가면 광장 한 모퉁이에 구리로 만든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서있지 않고 예수님이 편안히 누워계신 모습으로 동상을 만들어 놨습니다. 누가 소문을 냈는지 모르겠는데 거기 가서 예수님의 배를 만지면 복을 받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브뤼셀에 오는 사람들은 거기부터 가는 겁니다. 구리가 쇳덩어리 아닙니까? 예수님의 배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쓰다듬었는지 배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쇠가 닳아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 많이 만졌습니다. 사람들이 복의 개념으로 사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님이 인간 삶의 기본적 요소를 복으로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것이 인간 삶의 시작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복 주심을 따라서 인간은 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뭡니까? 다 복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자 하면 피해 도망가도 복이 따라오고 하나님이 복을 안주고 가면 내가 복을 따라가도 복이 도망가 버립니다.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하나 더 내려주십니다. “네가 나의 복을 가지고 온 세상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이 구원을 선포해야 될 터인데 만약 네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너를 축복하는 자가 있다면 네가 그 사람을 복을 주겠다. 만약 너를 저주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을 저주하리라.” 그러고 나서 “땅의 모든 족속은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나훔 신학은 거기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너희가 때려 부셨다.” 

여러분! 역사에 교회를 어렵게 하는 문화가 생기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북한을 보세요. 6·25동란 이전에 2300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지금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 봉수 교회, 칠골 교회는 전시용입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도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 둘이 그 나라에 있는 것이지 자발적인 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까? 국가가 정책적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교회를 어렵게 하면 굶어 죽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래왔습니다. “너를 축복하면 내가 축복해 줄 거야. 너를 저주하면 그 땅은 내가 저주할 거야.”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험악한 고생이 예상되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선언하십니다. “너희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나를 영접하면 곧 아버지를 영접함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힘을 줘서 보내는데 “만약 어느 동네에서 너희를 박대하면 그 마을에서 발의 먼지까지 떨어버리고 나오라.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 국가에서 기독교를 어렵게 한다든지 교회를 어렵게 하는 문화가 생기면 그 나라는 큰일 납니다. 역사가 다 증명하잖아요? “만약 내 이름으로 이 소자 중에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그는 상을 잃지 아니할 것이다. 복이 나에게로부터 올 것이다.” 

예수의 신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을 예수님도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몇 가지 사건을 기억합니다.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렙이라고 하는 어느 마을에 가난한 과부 한명이 사는데 그 집을 어떻게 엘리야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도 먹을 식량이 한 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그 집 사람에게 한 끼의 식량을 공급받고 나서 성경에 약속한 그는 평생 동안 먹을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훔 신학은 바로 이런 것을 보는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막을 수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훔 신학이 저주 신학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너무 지독한 성격 때문에 많은 나라 민족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가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에서 오래 살아왔지만 미국의 정책은 변하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수없이 많은 혜택을 줍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의 성취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고 그 땅에서 유태인이 가장 우수한 성취를 하는데 도움을 주고 미국이 온 세계에 그렇게 많은 일에 참견을 하고 있는데 가장 열심히 돕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미국 대통령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는 것을 한마디라도 들어보셨습니까? 미국이 무상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사회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영적인 뜻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나훔이 바라보는 신학적 초점은 고통 받은 선민의 위로와 영광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위로하다, 연민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 있는 백성은 어떠한 경우에 고난이 와도 시온의 아침이 다시 찾아오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으로 조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가 예언되어져 있고 히브리 민족은 그들의 역사에서 세 가지를 밝혀냅니다. 회복의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는가? 하나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노예로부터의 해방! 그래서 다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신다.’ 두 번째는 70년 바벨론 식민지로부터의 귀환! 자유함을 얻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역사는 20세기 시오니즘 운동! 흩어진 유대 백성들이 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1948년에 이스라엘은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오늘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도 개인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회복과 영광을 성경에서 수없이 찾아보는데 야곱에게는 이제 쫓겨서 거지가 되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너를 회복시킬 것이니 잠시 가서 고생하다가 이 땅에 돌아오라.” 

탕자 비유의 의미가 뭡니까? 아버지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회복되었다.” 돼지가 먹는 쥐염열매로 배를 채우던 거지가 부잣집 아들로 다시 회복되는 영광!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소를 끌어다 잡아먹고 즐기자. 내 아들은 회복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백성! 하나님은 회복시키십니다. “민족을 회복시키시고 개인을 회복시키시고 잠시 고난에 빠졌지만 시온의 영광이 다시 찾아오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 구원의 백성으로 쓰임을 받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저 니느웨와 같은 곳은 결국 멸망의 역사를 가져올 것이다.”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의 진단이 갸우뚱합니다. “허리가 결정적으로 고장이 나서 잘못하면 평생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환자는 얼마나 낙심되겠습니까? ‘이 젊은 나이에 이게 뭐야?’ “그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90퍼센트 이상입니다.” “아! 이걸 어떡하나?” 침대에 누워서 ‘내 인생은 이게 뭔가? 이제 끝이다. 평생 걷지 못한다니….’ 성가대원들과 같이 심방을 갔습니다. ‘이 환자에게 들려줄 적당한 노래가 뭔가?’ “목사님, 일어나 걸어라! 그것을 불러요.” “아, 그럽시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두 번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지금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만 해도 축복입니다.”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심방 가셔서 희망을 주는 찬송을 들려주시고 설교를 하고 기도도 하세요. 영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회복된다.” 나훔은 지금 이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백성은 멸망의 역사가 찾아올 것이다.”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북한은 교회를 다 없애버리고 날마다 굶어죽는 이야기만 들립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데도 영적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 번째, 나훔서의 신학의 초점은 하나님의 자비성은 무자비성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훔 예언자는 하나의 국수주의 성격의 예언자가 아니냐고 할 만큼 니느웨에게 하나님의 무자비성을 선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설교는 어땠는가? 마찬가지였습니다. “화 있을진저!” 똑같습니다. 신앙을 역사화했다는 것이 이 성경의 독특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난은 마귀의 역사라는 겁니다. 마귀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하나님의 무자비성 성격의 심판 역사가 끝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안에서 최고로 발달하고 강대국으로 자랑했던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으로 연결이 되어 마침내 그들의 역사는 조롱의 만가를 들으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까지 내가 복을 줄 것이며 너를 저주하면 내가 그 사람을 저주하겠다.” 우리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지만 선교사가 하나님의 복을 들고 들어가잖아요? 영접하면 그 나라가 복 받습니다. “박대하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의 결론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하는 길이요, 또 하나는 나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의 진리의 음성을 저희들에게 들려주셨으므로 나훔 신학이 밝혀주는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은 어떤 것인가 영적으로 저희들이 잘 깨닫고 지켜서 복의 근원이 되고 아버지의 축복의 역사가 내 손에 머무는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주간도 이러한 믿음의 기초를 가지고 약속된 모든 사역을 승리할 수 있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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