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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총의 때와 자리 (막 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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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때와 자리 (막 14:1~9 )

                                                                                           
 I. 서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절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말이 ‘적재(適材), 적소(適所), 그리고 적시(適時)’라는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일 하나를 제대로 하려해도, 적합한 인재나 재료가 있어야 하고, 이것을 적합한 자리에 배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정말 적합한 때가 무르익어야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 ‘적재, 적소, 적시’는 가장 절실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핵심은 인간 편에서 보면 구원의 문제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은총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이 받아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총은 무슨 계약서에 서명하듯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구원의 하나님의 은총의 때와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은총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보는 세상은 근본적으로 은총이요, 인간의 삶 자체가 은총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냥 그렇게 ‘은총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특별한 은총’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누추한 삶 속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마감된 것은 아닙니다. 그 은총은 지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특별한 은총의 때를, 우리가 어떻게 포착하여, 적시에 응답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사실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불현듯 파문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이 은총의 때를 직감하는 것이나, 그 은총을 적재적소에서 만나는 것은 그렇게 쉽거나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동양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지은 그 유명한 장편 종교시 <기탄잘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걸인으로 이리저리 구걸 생활을 하던 시인은, 어느 날 화려한 황금 마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 이제 왕중의 왕을 보게 되다니. 이제 거지 노릇은 끝이다! 

황금 마차를 타고 가는 저 임금의 마차에서 뿌려줄 황금과 재화만 내가 갖        는다면 이제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기대했던 대로 그 황금 마차는 이 걸인 앞에 도달했고, 급기야는 그 앞에 딱 내려섰습니다. 거지는 속으로, ‘야! 이제 내게 일생일대의 행운이 왔다!’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문득 내려와서 하는 말, 

 “그대는 내게 무엇을 바칠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라, 
‘아니 구걸하는 걸인한테 화려한 왕이 무엇을 요구하다니, 이 무슨 일인가?         지금 임금께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왕의 시선은 물끄러미 계속 걸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걸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하는 수 없이 동냥주머니 속에서 제일 작은 낱알 한 톨을 드렸다. 하루를 또 그렇게 구걸을 하다가, 날이 다 가고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동냥주머니를 마루에 쏟아 부었다. 그런데 그 초라한 무더기 속에서 단하나의 황금 낱알 한 톨을 발견했습니다. 걸인은 너무도 놀랍고, 억울해서 엉엉 울면서 이렇게 통곡했습니다. 

 “왜 내가 그 때 임금에게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을 바칠 마음이 없었던가?” 


대충 여기 까지 들으면,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연관시키시면서 이렇게 미리 짐작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오늘 설교, 값비싼 향유? Give and Take? 접수 끝!”^^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셨다면 이 ‘고뇌에 찬 설교자’^^를 너무 몰라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타고르의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는 시종 일관 다음과 같은 사상을 담고 있는데, 타골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날 내겐 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임은 알지도 못하는 흔한 무리들 중에 섞여, 분부도 없는 내 영혼에 들어오셔서, 왕이시여! 당신은 내생의 수많은 덧없는 순간에 영원이란 옥새를 찍으셨습니다.” 

저는 타골의 표현 속에서 무엇보다도 “내겐 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뇌리 속에 깊이 박혔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어느 날 문득 주님이 우리를 향해, 우리의 일상의 생활에 파문을 일으키는 요구를 하시며, 우리 영혼을 일깨울 때, 우리는 어떻게 응할 것인지요? 두렵습니다. 


II. 하나님의 말씀 : 은총의 때를 위해 깨어있으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늘의 하나님의 말씀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한 이름 없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이야기의 내력에 대해서, 그리고 이 여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자세히 토론할 시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여인은 악신이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도 아니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여인은 14:2절과 같이 그저 이름 모를 “어떤 여인”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 이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낯선 행동’입니다. 이 행동에 대하여 사람들은 분개했고, 반면 예수님은 칭찬과 인정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초기부터 서방교회는 이 본문을 ‘예수를 섬김’과 ‘가난한 자를 섬김’중에서 ‘어느 것이 더 의미있는 행동이냐?’라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둘 중에서 ‘무엇이 우선이냐?’라는 주제로 이 이야기를 해석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이 여인을 인정했으니,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귀하다’라는 결론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도입부인 14:1-2절에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의 행동을 ‘비상식’ ‘비합리성’으로 몰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만 보면 ‘300데니리온’, 그러니까 300일 임금인 일년치 연봉을 예수의 머리에 부어 소비하는 이 행위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행동을 14:8절에서 이렇게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        다.” 

다시 말해서, 이 여자의 행동은 더 이상 ‘일상적인 때’에서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긴급한 때’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7절에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도울 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수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바로 이 위기의 때야말로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 최절정해 달했다는 의식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이 이 의식을 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누구도 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 값비싼 향유를 발이 아니라,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머리에 부은 것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려는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과도한 해석입니다. 머리에 부은 이유는 분명히 죽음을 예비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동의 시기는 절묘하게 안식일 시작 전인, 바로 이 날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장례용 기름을 바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행동을 깊이 성찰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여인은 예수께서 자기 사는 동네 베다니에 오신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하고는 이 결정적인 때에, 적합한 장소에서 정말 큰 결단으로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적재, 적소, 적시였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냐, 이우 사랑이 더 중요하냐’라는 식이 아니라, 이렇게 ‘은총의 때’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 바로 앞에서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13:28-37)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가 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이 말은 내가 너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니라.”(28;37) 

만일 그녀의 행동이, 자신이 마주친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일생일대의 때(카이로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저 사치요 낭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정하듯이 그는 “좋은 일,” 아름다운 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는 은총의 때를 ‘깨어 살아가는’ 신앙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 서보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은 참으로 예고없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그 때를 놓치고 맙니다. 왜냐하면 정작 그 은총을 대면하며 하나님 앞에 서야할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항상 다른 열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타고르가 탄식한대로, 우리의 일상 속에 주님이 불현듯 영원의 옥쇄를 찍으시기 위해 오실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인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삶의 시간과 공간 속에 영원을 심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영원을 보지 못하는 인생은 많은 값진 것을 구하고 찾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은총의 시간에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이 과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포착해야하는 것이 신앙이요, 삶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인생의 딜레마를, 이 신앙의 난제를 인간된 우리로서는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본문은 달리 구체적인 삶의 지혜랄까, 우리의 신앙의 원리 같은 것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라는 삶의 태도만이 덩그러니 우리의 과제로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항상’ 말입니다. 


III. 삶의 지혜 

1. 삶에 다가오는 속삭임에 귀 기울이라! 

저는 지난주에 감동적인 연설 하나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들어본 사람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라는 토크쇼 진행자가 한 연설인데,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 2008년 학위수여식에 초청을 받아서 연설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연설이 제게 준 가장 큰 감동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위기와 기회를 만나는데, 그 때마다 우리는 선택을 내리고 결정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까요?”라고 물으며, 그녀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제가 이때까지 한 옳은 선택들은 제 본능과 직감에서 온 것 입니다. 잘못된 선택들은 항상 제가 내 자신의 목소리를 무시했을 때 받게 된 대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옳다고 느껴지면 계속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그만 두십시오.” 

그러면서 오프라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삶의 어려움은 삶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먼저 당신에게 속삭이기 때문이죠. 만일 당신이 그 속삭임을 무시하면 조만간 당신은 ‘비명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오프라가 말하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란 우리에게는 여전히 달리생각 할 영역으로 남기는 합니다. 하지만 처음 우리의 양심에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을 존중하고 그것이 옳다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은총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서는 깨어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도 무수한 마음의 갈림길에서 그렇게 과감하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이야 말로 내 생애에 가장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고, 그대로 행동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곧바로 어려운 비방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찬사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서나 이 행동으로 이 여자도 기억되리라!” 

실제로 지금도 우리는 이 예배와 설교에서 이 여인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무명’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녀의 명성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수난의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수난의 복음 전파’는 오직 우리의 ‘남은 고난과 함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오직 은총의 때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 삶에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을 무시하지 마시고, 그것이 옳다고 느끼면 주저하지 말고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생각하시면 이제 그만 두십시오. 그것이 깨어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지혜일 것입니다. 


2. 은총의 자리 

그렇지만 어떻게 ‘항상’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항상 삶에 다가오는 세미한 음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 삶의 또다른 과제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은총의 때는 은총의 자리에서 살아갈 때만 포착할수 있는 영원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때는 ‘장소’에서 결정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늘 살며, 마음도 몸도, 삶 전체가 하나님을 바라는 그곳에 있으면 하나님의 은총의 때를 맞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열 처녀 비유가 그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여 ‘그곳에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태도는 삶의 진정성, 삶의 진실이 있지 않으면 배어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진실로 깨어있어도 항상 내가 살아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은총의 때를 맞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 내가 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삶의 진실을 지켜나가는 그곳을 우리는 ‘삶의 자리’라고 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생각하고 태도를 취하는 곳, 거기서 더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곳,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부딪혀 살아내야 하는 곳, 그래서 내가 나다워지는 곳, 나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곳, 그 곳이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 ‘삶의 자리’에서 은총의 때를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그곳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내가 그분을 영접함으로 그곳은 곧 은총의 자리요 ‘복음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앙생활과 사회생황이 이원화된 것은 대체로 이 삶의 자리가 아닌 곳에서 복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원, 은사집회, 부흥회... 이런 특별한 곳은 사실, ‘신앙이 삶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배제하려하는 경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바로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은총을 받은 경우에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고깃배에서 은총을 체험했고, 모세 역시 광야의 고된 양치기 생활 속에서 떨기나무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은총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본질에 닿아있는 작은 한 가지 문제를 농치지 않고 끝까지, 그것에 맞닥뜨려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문제를 ‘은총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로 삼아 저 깊은 곳을 향해 기도하며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저도 참 심각한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제 학문적 작업에 심각한 문제제기를 받은 것입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고 넘어갈 수 도 있고 그냥 포기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기도하며 냉철하게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참 어려운 싸움입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아픔과 교훈을 얻으면서도,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하며 하나님 앞에 다시 자신을 추슬러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참 어려운 일들, 부당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침마다 학교 연구실에 가면 일부러 방석을 의자에서 내려놓고 거기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 이곳에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이곳으로 부르셨으니,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게 하시고, 이 삶의 자리에서 소명에 충실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는 진실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삶은 그저 놀이터가 아닙니다. 삶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 사랑하고 눈물과 진실로 살아낼 은총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다는 것은 살아있어 그곳에서 살고, 그곳을 지켜내고, 그곳에서 성실하게 내리실 하나님의 은총을, 때를 따라 길어 올리고, 그리고 마침내 불현듯 찾아오실 주님을 맞이하겠다는 ‘의지’인 것입니다. 


IV. 맺는말 

그렇다면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하면서 우리 안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느 때, 어느 곳에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신일이 없습니까? 

왜 내가 중세도 근세도 아니고, 하필이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왜 내가 미국도, 아프리카도 아닌,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것도 삼국시대도 조선시대도 아닌, 분단된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일까? 

왜 내가 하필이면, 같은 말을 쓰고 혈육을 나누고 있으면서도,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살을 빼는 것이 일생의 과제로 삼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백만이 아사하고 있는 이 땅에서, 그것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이라는 예수의 사명을 들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하루에 15시간을 버텨야 하는 교실을 떠나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실에 있고 싶으나, 먹을 것을 찾기 위해 교실을 떠나야 하고 장터로 들로, 그리고는 마침내 사선을 넘어야 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우리는 이 분단의 적대감으로 얼룩진 끝 시대에, 그것도 교회의 이 심각한 위기를 목도하며 ‘평화의 복음’으로 살아가야 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하나님은 이 수많은 아름다운 교회건물을 너머 ‘보이지 않는 성전’이라는 부르심에 헌신을 하게 하시는가? 지금 주님께서 영원의 옥새를 찍으시기 위해 나에게 오신다면? 

이 모든 질문으로, 이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그 헌신의 행동이 정녕 옳았다면, 그래서 적재, 적소, 적시에 드려진 것이라면, 주님이 그 ‘이름 모를 여인’의 진심을 헤아려주셔서 그 헌신이 복음의 전파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헌신도 언젠가 한국교회의 새날과 통일한국의 미래를 열었던 ‘무명의 헌신’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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