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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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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엡 2:1~10)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설문을 조사하면서 “자기 외모에 비교적 만족하며 사십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런대로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19%정도이고 80%이상의 사람들은 “큰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고칠 수 있으면 고쳐보고 싶습니까?” 물었더니 남자들의 94%, 여자들의 99%가 고치고 싶다고 얘기 했습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그 유명한 고흐와 피카소의 작품이 도난을 당해서 세계 화랑을 발칵 뒤집힌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그린 인물화를 보면 별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은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수십억, 수백억을 호가 합니다. 그것이 반 고흐와 피카소의 진품인 것이 확인 되면 우리 눈에 어떻게 보여도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다시없는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을 보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품에 손대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이 아닌 우연의 존재인 것처럼 믿게 만들고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믿게 만듭니다. 지금 당신은 마귀에게 속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함께 읽을까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박창환 박사님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으니 우리는 그의 작품들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스멘 포이에마, 크리스덴테스 엔 크리스투 예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이에마’는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덴테스’는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작품이기 때문에 우리들 속에는 하나님의 솜씨,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셔서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인간이요, 뜯어 고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존귀한 하나님의 보석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비와 놀라움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의 구조가 어떠한지 아십니까? 우리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보는 ‘우리 몸의 이야기’를 보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장 기관 하나하나가 신비가 아닌 게 없습니다. 심장은 1분 동안 펌프질을 하는데 4리터 정도의 피의 양을 펌프질 합니다. 양동이로 1/2분량입니다. 결국 우리 심장은 1시간에 30통, 하루 720 양동이의 피를 퍼 올리고 있습니다. 신경의 신호는 빠른 신호인 경우 1초에 120m를 전달합니다. 1시간에 432km를 몸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코 구명이 냄새를 맡는 데 얼마나 섬세한지 1만 가지 이상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귀가 얼마나 기가 막 힌지 모릅니다. 보통 동물들은 일어서서 못 다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고 밀어도 안 넘어집니다. 이는 사람의 귀속에 균형을 잡는 달팽이관이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귀는 너무 파장이 큰 소리는 못 듣습니다. 너무 파장이 작은 것도 안 들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돌아가는 어마어마한 큰 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데시벨이 너무 높기 때문에 우리 귀를 스쳐 지나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마 지구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고막이 파열 되고 말 것입니다. 너무 작은 소리도 안 들립니다. 15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의 귀에 지하실에서 개미 밥 먹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고 하면 얼마나 피곤하고 시끄럽겠습니까? 그래서 적당한 소리만 듣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아주 신비스럽고 조화와 균형 있게 만들어 졌습니다. 성형외과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심지어 턱선 어께선과 모두 조화를 이루도록 독특한 설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굴 하나를 잘못 고쳐놓으면 그 모든 균형이 무너져 내리고 그러면 그 균형을 어떻게든 되찾기 위해서 다시금 다른 이목구비에 손을 대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보든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없어지면 우주는 균형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피카소의 작품이 진열되고 있는데 어느 분이 그림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작품에 손을 대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자기의 무식을 드러낸 것이요, 범죄자로 체포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심각하게 훼손되어 그 값어치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작품에 손을 댄다면 그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바보짓이고 하나님의 작품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속지 마세요.      

그런데 마귀는 우리들에게 아주 달콤한 속임수로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당신의 외모는 당신의 행복을 보장합니다.” 이것은 거짓이요,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마귀가 우리들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번 찬양예배시간에 한 번 말씀 드렸습니다만 오늘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990년대에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누가 행복하냐 하는 것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외모와 행복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연구 조사자들은 100명의 대학교 남학생과 100명의 여학생들을 실험실에서 화장을 지우고 옷을 동일하게 입게 하여 다른 변수를 없앤 후에 다각도로 얼굴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을 가지고 100명에게 외모의 아름다움의 수준을 체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상위 10%의 학생들-그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한 번 더 쳐다보는 잘 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들-과 하위 10%의 여학생들-그들이 얼굴 때문에 사람들이 한 번 더 쳐다보는 학생들-의 행복 지수를 조사한 결과 행복 도수에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결론은 사람의 외모와 행복은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다 하나님의 특별히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외모가 여러분들을 불행하게 만들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5,6)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작품에 손대므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행복한 사람으로 성별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에게 속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합니다.”(히1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하나님이 만드신 걸 작품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삽시다. 

우리가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사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됩니다. 자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는 자기가치입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하면서 눈을 감고 머리에 어떤 영상이 떠오르는지 보세요. 어떤 사람은 ‘나는 할 수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지만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그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나는 바보.’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벌레 같은 존재.’ 다윗 왕에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말한 것처럼 ‘나는 죽은 개만도 못한 자입니다.’하는 영상이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지금 어떤 영상이 떠오르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집단 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답을 쓰다가 "왕" 하고 울어버렸습니다. ‘나는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선생님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친구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등등의 질문에 꼼꼼히 대답을 쓰다가 마지막 질문인 “나의 가족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가?”하는 질문에 대답을 쓰다가 "왕"하고 울어버린 것입니다. 그녀를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녀가 울러버린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는데 그녀가 초등하교 3학년 때에 사고로 돌아가셨고 엄마와 동생들과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초등하고 6학년 때에 선반에 놓아 둔 것을 꺼내려고 하다가 넘어지면서 방구석에 있는 밥솥에 부딪쳤습니다. "쾅"하는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엄마가 뛰어 들어 와서 쓰러져 신음하는 딸을 한 번 흘겨보더니 딸이 떨어지면서 부딪친 밥솥을 보고 이리 저리 시험하여 보고 보온 기능이 고장 나고 찌그러졌다고 쓰러져있는 딸을 향하여 "이 나쁜 년 일이 없으면 나가 놀기라도 하지 집안에 있으면서 밥솥만 고장 나게 만들어!" 하면서 엉덩이를 때리고 야단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날 엄마에게 쫓겨나면서 ‘나는 밥솥만도 못한 존재이구나! 나 같은 년이 무엇 하러 살아야지!’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녀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으면서 '나는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그녀에게 계속 보냈습니다. 그날 집단 상담을 받으면서 '가족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의 대답을 쓰다가 그 일이 다시 생각이 나면서 '밥솥만도 못한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특히 어머니에게 밥솥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한 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그 사건을 잊어버렸으나 그가 입은 상처는 허물이 되어 그 속에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극을 받으면 나타나서 그녀를 슬프게 만들고 그녀의 미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이와는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간증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중학교 2학년 다니는 딸이 25개 문제 중에 6개만 맞고 19개를 틀린 답안지를 가지고 와서는 엄마에게 “엄마, 오늘 수학시험에서 내가 여섯 개나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엄마가 야단을 치려고 하는데 아빠가 그 딸을 불러서 옆에 앉혔답니다. 그래서 “네가 여섯 개나 맞았어?”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딸이 “그래요. 나는 여섯 개나 맞았어요.” 아빠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보다 못한 애도 있다는 말이구나?” 하자 “제 짝꿍은 다섯 개밖에 못 맞았어요.” 그래도 자기가 하나 더 맞은 것이 위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그 딸의 눈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너는 다섯 개 맞은 것보다 여섯 개 맞았으니 더 사랑을 받을 줄로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네가 여섯 개를 맞든지 스물다섯 개를 다 맞든지 아니면 하나도 못 맞아도 너를 똑 같이 사랑하는 분이 계신데, 너 알아?” 하고 물었습니다. 눈만 껌뻑 거리는 딸을 두 손으로 꼭 껴안은 아빠는 “우리 하나님은 네가 얼마나 시험을 잘 보았느냐 보다는 너를 더 사랑하셔. 하나님은 네가 여섯 개를 맞았든지 하나도 못 맞았든지 만점을 맞았든지 꼭 같이 너를 사랑하셔.” 그러고 나서 아빠는 다시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아빠야. 아빠의 사랑은 네 점수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아. 네가 여섯 개나 맞았든 다 틀렸든 너를 꼭 같이 사랑해. 너는 점수보다 더 소중해!” 그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개발하고 자기의 가치도 인정하고 남의 가치도 존중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가운데 아주 분명한 것이 있지요? 첫째는 우리의 자아상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너는 밥통보다도 못한 존재야!”하는 이야기를 받은 학생은 “나는 쓰레기 같은 존재에 불과해!”하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는 점수보다 더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야!”하는 이야기를 받은 딸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야!”하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개발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여러분의 이야기는 그 말을 받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만들어 불행한 인생을 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마귀의 음성을 듣고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불행의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다.”고 확신을 가지면 여러분은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고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행하게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까? 이웃을 행복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드신 목적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작품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이웃을 세워 주는 일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축복하고 행복하게 해 주는 일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들에게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사랑하고 섬기며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가족들과 이웃들과 직장과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며 소중히 여기며 축복하며 그들에게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져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하는 일을 위하여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오늘도 우리를 세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깎아 내리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가족 식구들의 흠을 깎아 내리고 교회식구들을 실수나 흠을 깎아 내리고 정치가들, 이웃들의 잘못과 흠을 깎아 내리는 일은 마귀의 일입니다. 그러나 흠을 감싸주고 거기에 아름다움을 더하게 하는 일은 성령님의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성령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귀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흠 있는 보석에 장미꽃을 조각하는 사람들 

진주를 무척 살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진주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멋진 진주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그곳에 찾아가 그 진주를 감정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가장 크고 멋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상당한 비용을 드려서 그 진주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는 그 진주를 들고 요리 조리 관찰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 진주에 아주 조그만 흠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 흠을 깎아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진주는 한 꺼풀 씩 덮이면서 자란 것이기 때문에 그 흠을 없애려고 한다면 아깝지만 진주를 한 꺼풀 벗겨 내야 합니다. 그러나 흠 없는 진주를 만들기 위하여 그는 진주를 벗겨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한 꺼풀을 벗겨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주를 자세해 보니 아직도 흠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벗겨내었습니다. 그러나 흠은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그 흠이 없어질 때까지 벗겨내고 벗겨내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흠이 다 없어졌는데 그 진주도 다 달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흠을 깎아 내는 것은 진주까지 없애는 죄악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이와 다른 보석상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보석 상인이 여행지에서 고가의 보석 하나를 샀습니다. 그가 판단하기에 자기 나라에 가지고 가면 무척 비싼 값으로 되 팔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와서야 이 보석에서 작은 흠집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런, 어쩌지? 그 나라로 다시 날아갈 수도 없고.......” 그대로 이 보석을 판다면 큰 손해를 볼 게 뻔했습니다. 보석상은 고민을 하며 생각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보석을 다시 원래 가치로 되돌릴 수 있을까?” 오랜 고심 끝에 그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보석의 작은 흠에 장미꽃을 조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흠집을 깎아내고 다듬어서 흠집 위에 아름다운 장미를 새겼습니다. 그가 그 보석을 경매에 내 놓았을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보석이 역대 최고의 경매가로 팔려나간 것입니다. 

인간은 흠이 있는 진주입니다. 인간이 완벽하기를 바란다면 결국 세상을 떠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흠을 없애기 보다는 그 흠을 감싸주고 그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흠을 제거하시는 기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흠을 아름답게 가리고 빛나는 곳을 더 빛나게 만드는 분이십니다. 비록 흠이 있을지라도 감싸고 덮어주며 빛나는 곳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며 존중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수를 저질렀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수없이 실패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여러분의 가치는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우연히 태어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러분들이 선한 일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들을 세워주고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중하세요. 그들에게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살게 도우세요. 그들이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며 사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행복과 은총이 여러분에게도 풍성하게, 풍성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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