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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오신 목적 (막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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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오신 목적 (막 10:45)


  네델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는 명작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젊을 때의 왕성한 기력과 활기찬 모습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이후 늙어버린 것입니다. 허리는 휘어 보행이 여의치 않으나 너그러움과 평화가 스며 나옵니다. 돌아온 아들은 초라하고 비참했습니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 것처럼 보입니다. 아들의 죄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만 보실 뿐 죄는 보지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죄를 살펴보신다면 주 앞에 설자가 없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참된 예배자입니다. 작가는 하나님 보좌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예배자를 그렸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시리로다”(시51:17) 작가는 두 손으로 돌아온 아들을 잡고 있는데 한 손은 크고 힘이 있고 또 한 손은 작고 부드럽게 그렸습니다. 크고 강한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작고 부드러운 손은 어머니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부성과 모성의 손으로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이십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친히 찾아 나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정한 궤도를 달려 결승점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너무도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보상 없이도 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찾으라. 그런 다음 고용주가 계속 고용하고 싶어할 만큼 그 일을 잘 해내라”고 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은 죄인을 만나는 것을 좋아 하셨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은 죄인이요 창기들입니다. 사람들이 상종하기 싫어한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기 위해 접촉점으로 삼으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음식입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사귀셨습니다. 음식을 같이 먹으면 친밀해집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8-19)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들과 만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식을 같이 먹는 삶의 방식을 통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한솥밥을 먹고사는 가족을 식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의 가족을 늘려 가셨습니다. 음식을 나누며 교제를 넓혀 나가기 바랍니다. 

  둘째, 대화입니다. 죄인과 만나 대화하시며 회개 시키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 성으로 가셨고 우물가에 앉아 여인이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물긷는 여인을 보고 “물 좀 달라”며 말을 걸었습니다. 물이 귀한 팔레스틴 지방에서 물 한 그릇은 애정이 담긴 환대입니다. 유대인 같은데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 하느냐고 냉담하게 나옵니다. 물 좀 달라는 내가 누구인줄 안다면 오히려 나에게 물을 구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일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3-15)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들어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사람들이 몰려나와 예수를 믿었습니다. 대화의 기적입니다. 대화는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힘입니다. 

  셋째, 몸의 접촉입니다. 예수님은 접촉하심으로 병든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신체적인 접촉은 의사소통 수단입니다. 몸의 접촉은 친밀감을 줍니다. 손을 잡아 주고 악수하면서 마음이 전달됩니다. 어떤 은행에서는 출납원이 거스름돈을 줄 때 손에 쥐어주게 합니다. 그런 접촉이 친밀감을 높여줍니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써빙할 때 고객과 접촉하는 웨이터가 팁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자의 눈을 만지시고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고 병자를 고치기 위해 접촉하셨습니다. 음식, 대화 접촉은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하나님의 울타리 밖으로 나간 잃은 양을 찾아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괴테는 말하기를 “목적은 수단을 신성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목적을 갖고 살 때만이 스스로 크게 됩니다. 숭고한 목적은 만난(萬難)을 극복하게 합니다.   

잃은 자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복음에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비로 쓸며 찾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심정과 그 수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찾아 나선 사람을 찾을 때까지 중단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중단하지 않습니다. 은근과 끈기로 찾아내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치환의 원리”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기 위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주위 환경이 계속해서 들려주는 소리는 ‘못 찾는다’ ‘어떻게 찾니?’ ‘안 된다니까!’입니다. 가장 쉬운 일은 힘든 일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만두고 싶을 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혼잣말입니다. ‘포기할 수 없어, 찾아내고 말꺼야’ ‘중단할 수 없다.’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혼잣말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새벽마다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기도하여 받은 힘이 찾아다니는 힘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기도하면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나의 교리로 삼아야 합니다. 

서양 속담에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가 편안한 자리에 앉아 우유나 받아먹어서는 안됩니다. 우유를 배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와서 사먹되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우리도 우유 배달부처럼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버린 자를 찾으시어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은즉 어깨에 메고 돌아와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셨습니다.  


  셋째,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생명은 존재의 질입니다. 생명은 에너지와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생명은 존재의 목적이요, 의미요, 의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생명은 에너지, 추진력, 존재의 원동력입니다. 생명은 소멸의 반대입니다. 부패되거나 썩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은 영구적인 것으로 영원합니다. 

예수님이 생명 바로 그 자체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6:51)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분을 받아들일 때 풍성함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풍성한 삶을 원하신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 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예수를 힘입어 사는 자는 생명의 풍성함이 흘러나옵니다.         

청년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갔는데 의사가 말했습니다. “괜찮네, 수술하고 휠체어 타고 다니면 돼, 다 살아갈 수 있어” 그 상황은 아무리 봐도 괜찮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결혼도 못한 20대 초반의 청년이 휠체어를 타야 할 신세가 되었는데 어떻게 괜찮다는 겁니까? 그러나 그 말은 그 청년에게 생기를 주는 말이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휠체어를 타고 다닙니다. 불구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착한 여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가 병원에 들어 갈 때 나이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이 그 말을 하는데 마음이 편안하고 그래 괜찮을 꺼야 휠체어 타면 되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참 다행이야...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생명을 준 것입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생명을 주며 살아야 합니다. 입만 열만 비난과 불평인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악을 토하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영의 말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정죄 하는 바리새인을 가장 싫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도 찾아 나섭시다. 찾을 때까지 찾읍시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풍성한 삶의 원리로 안내 할 수는 있지만 그 원리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전도입니다. 믿다가 낙심한 사람, 믿지 않은 사람을 인도하십시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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