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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의심하였느냐?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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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의심하였느냐? (마 14:22~33)
      

‘아들아 너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 라는 책이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아버지와 크리스챤인 아들이 삼년동안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모아서 만든 책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늘 하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아들아 너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믿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왜 믿습니까,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을만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왜 믿지 않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처럼 안 믿는 것이 정상이고 믿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정상이고 안 믿는 것이 이상하다는 얘기입니다. 적어도 생각이 건강한 인간은 ‘왜 사느냐’라고 물어보지 않고 ‘왜 죽느냐’고 물어봅니다. 왜 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상이고 안 믿는 것이 비정상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 믿는 이유를 물어보기 보다는 안 믿는 사람에게 안 믿는 이유를 물어봐야 됩니다. 최명신 장군의 간증을 읽어보면 625 전쟁 시 정찰을 나갔다가 북한군에게 포위됐습니다. 이제 끝났구나 하고 생각하고 권총을 뽑아서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는데 딸깍 소리가 나면서 불발이 됐어요. 다시 장전을 하고 쏘려고 하는데 그 사이 부관이 장군의 손을 붙잡고 ‘살라고 하는데 왜 죽으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기지를 발휘해서 거기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 부관이 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살라고 하는데 왜 너는 죽으려고 하느냐?’ 

의심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오럴 로버츠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의심에 대해서는 내가 한 마디 밖에 할 말이 없다. 하지 말아라 - Don't do it!’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의심에 대하여 나에게 말하지 말라. 나는 내 의심도 감당치 못하겠다.’ 아까 말씀드린 ‘아들아 너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라는 책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입장이 뒤바뀐 것입니다. 원래는 아버지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 대해서든 신앙에 대해서든 아버지가 가르치고 아들이 배워야 되는 입장이지만 그 부자의 경우는 뒤바뀐 것입니다. 아들이 스승이고 아버지가 학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아버지가 만약 소경이라면 자식의 부축을 받고 인도를 받아 걷는 것처럼 나이가 어리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스승이에요. 아버지는 하나님을 모르고 자식이 하나님을 안다면 자식에게라도 배워야 됩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나이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평소에는 마음속에 믿음이 있는 줄로 알았어요. 내가 믿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남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보니까 내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믿음이 필요한 순간에 가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몰라요. 평소에는 다 믿는 것 같지요. 그러나 그 믿음을 사용해야 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에야 진짜 믿음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믿음처럼 보이지만 믿음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적인 동의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 그게 지적인 동의입니다. 마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시했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데 그것은 믿음은 아니에요.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시다 라는 명제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내가 실제로 의지하기 전까지는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두 번째는 믿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믿고자 하는 그 마음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믿고자 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게 아닙니다. ‘믿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믿고자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이 좋고 마음이 열려 있고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이고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누가 ‘인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인사를 안한다면 그건 인사하는 게 아니지요. ‘인사드리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해야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을게요.’ 하고 안 믿어요. ‘교회에 나갈게요.’하고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교회에서 뵐게요.’라는 말을 안 믿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 하는 사람을 수상하게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오고 믿는 것은 실천으로 보여야지 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섬기겠습니다, 봉사하겠습니다, 입으로 선전하지 말고 실천으로 보이시기 바랍니다. 입으로 선전하는 것은 그것은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고 그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결단과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입으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믿음으로 보이지만 믿음이 아닌 것은 문화적으로 동화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평생 교회를 안 다녀본 적이 없고 주변 사람이 다 믿는 사람이고 성경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모든 면으로 볼 때 크리스챤인데 정작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내용이 비어있습니다. 마치 자동차 전시장의 컨셉트 카와 같습니다. 컨셉트 카는 그 겉만 번드르르 하지 속에는 엔진이 없습니다. 조종간도 없습니다. 컨셉트 카는 그 외형만 전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컨셉트 카와 같은 믿음, 내용이 없는 것은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 문화 속에 사는 사람 중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 ‘너는 왜 의심하였느냐?’ 이것은 수사학적인 질문이에요. 그 순간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 코와 입에 물이 들어가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할 여유가 없지요. ‘너는 왜 의심하였느냐?’ ‘어우, 주님, 어푸어푸 제가, 어푸어푸…’ 그건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이 베드로의 대답을 기대하신 것은 아니에요. 의심하지 말라, 이런 뜻으로 예수님이 그런 질문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마는 그러나 만약 예수님의 질문이 진짜 질문이라면, 정말로 예수님이 궁금해서 너는 왜 의심하느냐 라고 물어보신다면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허튼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에 다 계시적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왜 의심했느냐?’라는 말씀 자체에도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가 의심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정당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의 의심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아들아 너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라는 책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어보는 질문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보다는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이 더 많습니다. 예컨대 왜 하나님은 네 엄마를 살려두지 않았느냐, 왜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하찮은 질문은 아니에요. 진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기 보다는 하나님에게 여쭤봐야 될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실 수 있는 질문이에요. 이것은 사람에게 물어봐도 사람이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여쭤봐야 될 질문이고 이런 질문 때문에 하나님에게 가야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말 계시느냐 라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그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안 계시는 분을 어떻게 원망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그 자체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괴로운 믿음입니다. 이런 질문은 이런 질문대로 답변을 요구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면 그나마 대답하실 수 있는 분조차도 부인하는 것이 돼 버립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에서도 그렇고 정당한 질문이 있고 주제넘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왜 하나님이 네 엄마를 살려주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왜 세상에는 고난이 가득 차 있느냐?’는 질문은 주제넘은 질문입니다. 건방진 질문입니다. 내가 그 모든 고난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치 청문회를 하듯이 하나님을 문책하는 것 같은 것은 내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에 고난이 가득 차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세상을 두루 다녀봤습니까.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정작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데 나는 그 고난을 당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제3자의 입장에서 막연하게 구경꾼으로 세상에 고난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건방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질문을 할 권한이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만큼의 고난이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나는 편안하고 남들은 고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의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더 높아요.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보다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넘게 그들이 우리보다도 못살고 열악한 환경에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여쭤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고난은 그 사람이 그 고난을 어떻게 감당하는지도 모르면서 섣불리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은 자칫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섣불리 말하는 버릇을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섣불리 판단하려 하지 말고 내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 섣불리 말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알고 확신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에 대해서 건방집니다. 그 이외에는 사용할 단어가 없습니다. 교만하다는 말로도 말할 수 없습니다. 건방지다는 말 이외에, 주제넘다는 말 이외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그 전모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장차 어떻게 끝날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만을 가지고 섣불리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것이고 내 생각을 하나님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살다보면 바람을 맞습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다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의심하기 시작한 이유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바람을 보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심리적인 이유로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한다면 베드로는 ‘바람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듣고 ‘고작 바람 때문에 나를 의심했다는 것이냐?’
  
우리가 살다보면 바람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바람을 바람의 문제로 보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문제로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면 바람의 문제도 해결이 안되고 내 영혼도 피해를 입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바람의 문제는 바람의 문제로 봐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면 바람의 문제도 해결이 안 될뿐더러 내 영혼이 피해를 입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내 락커가 열리지 않느냐?’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재미있지요? 전혀 상관이 없는 두 가지 일을 상관있게 만드는 인간의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락커가 열리지 않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 락커가 안 열려요? 비밀번호를 모르거나 락커가 고장이 난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락커가 열릴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면서 살았느냐? 아니잖아요. 평소에 락커가 잘 열릴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했느냐? 아니지요. 평소 고난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으면서 고난이 생기면 왜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평소에 건강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사람이 병이 들면 그제야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때는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원망하는 것은 이런 면에 있어서 하나님도 이해를 못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왜 너는 의심하였느냐?’ 예수님도 그 순간에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처음부터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의심했다면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걷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의심이라는 것과 섞여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입니다.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은 의심도 없어요. 믿기 때문에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믿는 과정에서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하다보니까 의심이 생기는 것이지 믿을 의지가 없는 사람은 의심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미구엘 드 우나무노라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고 폴 틸릭은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고 믿음의 한 요소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의심을 방치하면 안됩니다. 마치 뱀을 방치하면 언젠가는 그 뱀이 고개를 들어서 여러분을 무는 것처럼 의심을 방치하면 베드로처럼 됩니다. 물 위를 걷다가 빠집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주님, 내 의심을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그랬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고 지적인 문제가 아니고 신학적인 토론으로 해결할 수 없고 결국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을 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나를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실존적인 요청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찾느냐? 내가 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예수님에게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요청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할렐루야! 그랬더니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셨습니다. 주님은 멋있는 분이십니다. 주님, 멋있습니다.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해 달라고 외쳐야 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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