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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왼손잡이 사사 (삿 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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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사사 사사기 3:12-30


I. 약점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알렉산더 플래밍(Alexander Flenming)에게 노벨 의학상을 안겨준 페니실린은 의학계의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플래밍의 약점 때문에 얻은 거룩한 수확이었습니다. 플래밍은 좀 덜렁거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가 영국 런던 의과대학 교수시절 - 당시 어린아이들에게 유행하던 부스럼 치료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실험접시마다 세균을 배양하여 오랜 세월동안 연구하다가 깜빡 뚜껑을 닫지 못하고 퇴근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을 하고 보니까 실험접시마다 새파란 곰팡이들이 끼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랜 시간 동안의 연구가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그 접시들마다 잔뜩 배양돼 있던 세균이 온데 간데 없어진 것입니다. 푸른 곰팡이가 세균을 몽땅 잡아 먹어버린 겁니다. 바로 그 푸른 곰팡이로부터 페니실린을 발명하게 되었고 폐렴 늑막염 등 모든 우리 몸의 염증을 제거하는 탁월한 약품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훗날 플래밍은 그렇게 술회했습니다. “나의 발명은 위대한 실수가 가져다 준 축복이었다. 나의 성격상 약점이 오히려 내게 복을 안겨 주었다.”

우리는 흔히 약점이 없는 사람, 재능이 탁월한 사람, 남다른 장점이 많은 사람만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람만 좋아하시고 그런 사람만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풍성한 재능과 재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만 쓰신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물론 자신이 가진 장점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그들이 가졌던 장점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에만 집착하고 썩을 세상일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때론 장점이란게 하나님 앞에서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미남자였습니다. 부자요 걸출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향락과 즐거움에 빠져살다 죽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내 인생은 말라빠진 낙엽 한 장과 같구나. 나는 버러지처럼 살았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슬픔과 고독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권세를 한 몸에 지니고 세계를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떠들었지만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살 때에 “나는 세상에 남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사렛 예수여 당신의 나라만이 영원합니다. 당신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고백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았던 솔로몬 왕이 있습니다. 부인이 천명이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모든 궁을 금으로 장식했습니다. 지혜와 지식,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남다른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그렇게 고백하지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1:2-3)...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이 땅에 자신이 가졌던 장점 때문에 망해간 사람들의 얘기는 백과사전을 기록하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약점이 많은 사람, 평범하고 잘난 구석이 별로 없는 사람-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며 살았던 사람들,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말츠라는 심리학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95%의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약점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약점이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약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느냐 여하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요!
링컨은 학력의 약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 곁에는 결정적인 장애를 통해 하나님께 쓰임받은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한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심각한 폐병을 앓은만큼 건강상 약점을 지니셨던 분입니다. 큰 교회를 이뤘다고 큰 인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교단에서 지금 가장 큰 교회를 이루고 한국교회를 섬기는 세분을 꼽아 보면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 주안교회 나겸일 목사님 정도입니다.

세 분 다 건강상 큰 약점을 가진 분들입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폐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셨고, 나겸일 목사님은 간암으로 사선을 넘었던 분이고 하용조 목사님은 무려 6번 암수술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삭개오란 사람이 나옵니다. 직업상의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체상의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고 사회적으로 고독하게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 때문에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큰 헌금을 드린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약점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약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습니다. 약점 때문에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II. 오른손 장애인 에훗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싫어하고 버린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9)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그리스도는 내 약한 것을 이용하여 강하게 역사하신다.

사사기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큰 약점을 지닌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셨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또”란 말에 엑센트가 있습니다. 

사사기를 살펴보면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고 나면 울면서 회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고 사사를 보내 구원하고 평안한 삶을 허락합니다. 인간이 조금 편안해지자 살만하다 싶으면 금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죄악된 길로 들어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시기 위해 모압 왕 에글론을 불러옵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입니다.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는 족속이요 더구나 모압 왕은 암몬과 아말렉과 함께 연합하여 이스라엘로 쳐들어와 “종려나무 성읍” 여리고를 점령하고 무려 18년간 이스라엘로부터 조공을 받아 갑니다. 여기 종려나무 성읍을 빼앗아 갔다는 말은 모압이 당시의 경제요충지대 오아시스지대를 다 빼앗아, 먹고 살길조차 막막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에훗이라는 사사를 보냅니다.

본문에 의하면 에훗은 모압의 에글론 임금을 죽이기 전까지는 나라를 해방시킬 수 없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공물을 모아서 임금을 만나러 갑니다. 갈 때에 오른쪽 바지 주머니 속에 45cm나 되는 칼을 숨겨서 들어갑니다. 공물을 바치고 아부를 떠는 척 하다가 독대를 청하게 됩니다. 독대하는 자리에서 칼을 뽑아 에글론의 배를 찌릅니다. 칼이 얼마나 깊이 들어갔던지 칼 끝이 등 뒤로 튀어 나갔고 칼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기름이 엉겨 붙었습니다.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로 올라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내가 에글론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얻었습니다. 잠자던 백성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달려 내려가 일만명이 넘는 모압 족속들을 다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에훗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짤막하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두 번째 그는 왼손 잡이였다는 것입니다. 이 베냐민이라는 뜻이 퍽 재미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벤”이란 말은 “아들”이란 뜻입니다. “야민”이란 말은 “오른 손”이란 뜻입니다. “베냐민”이란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힘이 있는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의 지파에 아들이 하나 태어났는데 왼손 잡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에훗입니다.

“왼손잡이”라고 번역된 이 말이 오른손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왼손을 잘 쓸수 있도록 훈련된 양손잡이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에훗이 왼손을 잘 쓰도록 훈련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우선 사사기 20장 16절에서 찾고 있습니다. 거기보면 에훗과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 가운데는 왼손을 잘 쓰는 700명의 특수요원이 나옵니다. 에훗도 이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왼손잡이”를 “양손잡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훗이 오른손 핸디캡을 가진 장애인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우선 히브리어 원어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왼손잡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isuy itter yad - yemino)”는 “오른손이 묶인 사람” “오른손에 제한이 있는 사람” 즉 오른손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에훗은 오른손이 힘없이 매달려 있었거나 조막손처럼 생겨서 누가 보아도 금방 장애인 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당시 장애인은 노예로도 팔려갈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쓰임받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공을 바치는 치욕스런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또 이 분명한 장애 때문에 모압왕 에글론도 아무 의심없이 에훗을 독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둔한 자”라고 된 이 말은 에글론 왕은 엄청난 거구였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이 괴력을 지닌 거구를 죽였다는 파격적 사건을 말한다는 겁니다. 

보십시오. 베냐민 지파의 사람 에훗! 오른손의 아들이 오른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끝장난 사람이지요. 그 왼손잡이를 하나님이 들어 쓰셨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아들이 태어나면 당당히 힘있는 오른손 잡이가 태어나야 되는데 왼손 잡이가 태어났습니다. 오른손을 쓸 수 없는 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힘있는 사람만 쓸 것이라는 세상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지요. 에훗 때문에 베냐민 지파에선 왼손을 잘 쓰는 특수병들을 훈련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이 위대한 일을 하므로서 위대한 칭찬을 듣는 역사가 아닙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하므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역사입니다. 할렐루야.


III. 약점을 강점으로.

당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각자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살던 시대였습니다.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살던 때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잘나고 똑똑한 사람, 용맹스럽고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을 뽐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시대에 메시지를 던지는 겁니다.

너희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느냐.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없는 자를 택하사 있는 자를 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택하여 높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그 메시지를 당대에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강한 자도 하나님이 버리면 망합니다. 약한 자도 하나님이 쓰시면 불가능이 가능해 집니다. 

우리의 편견과 교만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이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에훗입니다. 한 성경학자는 에훗을 연구하다 말고 한 줄을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던 에훗, 그는 자신의 단점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그랬더니 주님의 오른손이 에훗의 오른손이 되었다. 하나님이 친히 에훗의 오른손이 되어 주셨다” 할렐루야.

약점과 부족함이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할 때 주님의 오른손이 에훗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의 오른손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나의 약점을 하나님께 맡겼더니 하나님이 나의 강점이 되어 주셨다. 이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에훗은 조공을 바치는 과정에서 모압왕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으나 기회를 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공을 바치고 돌아오는 길에 19절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을 지나다 말고 혼자 돌아와 에글론을 만납니다. 여기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 왜 사명이 되살아 났을까요? 왜 죽음을 각오하고 왕궁으로 들어갔을까요? 

“돌 뜨는 곳”이란 건축현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 우상을 만들어 상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그토록 우상을 파괴하라고 말씀하시고 할례를 행하시던 길갈 근처에서 말입니다. 열불이 날만도 했지요. 어쩌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이나 만들어 먹고 사는 이꼴이 되었단 말인가? 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 것이지요. 

에훗이 “은밀한 일 - 은밀한 정보”를 드리겠다고 하니 에글론은 주위 사람들을 물리쳤습니다. 20절 “왕이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란 말은 쉬고 있었다는 말도 되고 화장실에 앉아 볼일을 보고 있었다는 얘기도 됩니다. 둘만 마주하고 있을 때 에훗이 “내가 말한 은밀한 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당돌하게 말합니다. 놀란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준비한 칼로 그를 찔러 죽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그것이 뒤에서 나왔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무 놀라 똥을 쌌다는 말입니다. “놀라서 똥싸고 죽은 임금!” 치욕스런 죽음을 말합니다. 모압에겐 치욕이었지만 이스라엘에겐 통쾌한 일이지요. 

에훗은 에글론을 죽인 후 다락방 문을 잠갔습니다. 에훗이 나간 후에 왕에게 가 보았더니 24절 “왕이 지금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라고 말합니다. 난외주에 “용변을 보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큰 볼일을 보신다고 말합니다. 왜요? 똥을 쌌으니 냄새가 밖에까지 났던 게지요. 그 사이에 에훗은 멀리 도망을 갔고 이스라엘 군사들을 모아 당황하고 있던 모압을 쳐 들어와 주둔군 1만을 죽여버립니다. 

이 얼마나 상황이 기가 막히게 척척 맞아 떨어집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니 가장 큰 약점이 가장 큰 장점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컴퓨터처럼 정확히 돌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에훗처럼 신체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신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환경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태어나고 자라온 배경에 약점이 있습니까? 약점에 갇혀 살지 마십시요. 허물이나 죄성 그리고 악습은 빨리 버리십시요. 또한 약점 때문에 낙심하지도 마십시요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시고 약점을 장점으로 삼아서 쓰시길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약점 때문에 콤플렉스 - 열등감을 가지고 살면 불평분자가 됩니다. 초라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은 약점있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연약한 사람, 흠있는 사람, 인생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주님, 십자가의 능력은 뒀다가 어디 쓰려고 당신의 약점을 끌어안고 근심하며 사십니까? 약점에 짖눌려 열등감에 시달리며 사십니까? 십자가 앞으로 나아 가십시다. 십자가는 참 신비한 곳입니다. 

십자가!
․그곳은 죽음이 영원히 패한 곳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변하는 곳입니다.
․죄인들에게 용서가 선포된 곳입니다.
․죄인을 위한 용서가 대기하는 곳입니다.
․십자가의 용량은 인류 역사상 모든 죄인을 품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약점을 품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IV. 성령이 임하시면

에훗에게 “여호와의 영감” 성령이 임하셨다는 기록은 본문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사로 부름받았다는 말속엔 성령의 강림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말입니다. 

1. 우리의 약점 위에 성령님이 임하시면 이제 우리는 약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약점을 제거해 달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나는 너의 약점을 통해 더 큰 일을 이루길 원하노라. 네가 겸손하여 평생 나를 의지하고 살아가기를 내가 원하노라. 약점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려무나. 

니이버(R. Niebuhr)라는 신학자의 기도문 가운데 이런 기도문이 나옵니다.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은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내게 주시고, 내가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게 주시옵소서.”

2. 성령님이 내 눈을 여시면 내 약점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의 약점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병들든지 건강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내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높아지든지 낮아지든지 내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약점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내가 고칠 수 없는 약점 안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젊은이가 몹시 사랑을 했습니다.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남자 친구가 전쟁터에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군대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이 약혼을 했고 이 여인은 날마다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근무하는 조그마한 산지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한쪽 다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불구의 몸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와 결혼을 하겠지만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거짓으로 사망통지서를 그 여인에게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서 가까이 살지는 못하고 먼 곳에 살면서 몰래 몰래 이 여인을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듣자하니 결혼을 한다는 겁니다. 진정으로 축복하고 싶었습니다. 결혼식장에 도착했는데 이 여인이 휠체어에 탄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끌고 들어가 결혼식장에서 결혼을 하는 겁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자기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부족하다고 하나님을 피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부족한 사람을 들어 쓰실 것입니다. 내 한 다리 때문에 자학하고 포기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두 다리 없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야 마실 것입니다. 

3.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내게 임하면 약점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약점으로부터 해방을 얻으십시오. 오히려 그 약점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당당히 선언하는 겁니다. “나는 약점에 갇혀 살지 않는다. 나는 주 안에서 자유인이다.”

오래전부터 믿음안에서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집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그 가정에 장애아이가 한명 태어났습니다. 부인 집사님이 시집식구 얼굴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괜히 자신의 죄 때문에 이 아이가 태어난 것 같아서 남편 얼굴 보기도 민망했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아이의 언니가 학교에 갔다 오더니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엄마, 재 우리학교에 보내지마! 친구들이 날 보고 병신 언니래!” 큰 아이를 꾸중했지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아이들이 듣지 못하게 흐느껴 울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이 딸의 무슨 죄 때문에 이런 무거운 짐을 우리가정에 맡겨 주십니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습니다. “딸아, 장애 아닌 사람이 누가 있더냐? 몸에 장애가 있는가 하면 정신의 장애, 성격의 장애, 영적이 장애가 있는데 너라고 장애가 없더냐? 그리고 이 세상에 장애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더냐?” 그랬군요. 내가 장애인이었군요. 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딸아, 그 아이가 네 딸인 줄 알았더냐? 바로 나다. 나를 사랑하듯이 그 아이를 사랑해라. 나를 섬기듯이 그 아이를 섬겨라. 이 아이를 누구 집에 보낼까? 네가 사랑해 줄 것 같아서 너희 가정에 복주기 위해서 너희 가정이 나를 아껴줄 것 같아서 그 아이를 너희에게 맡겼노라. 나를 보듯 그 아이를 사랑해라.” 

얼마나 눈물이 났던지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실컷 기도하고 방문을 열고 나올땐 이미 자유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부끄럽게만 여겨졌는데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손잡고 밖에 나가지 못했는데 당당히 그 아이를 데리고 시장에 갑니다. 파티장에 가서 귀여운 자기 딸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스스럼없이 볼에 키스를 하고 그 아이를 안고 좋아합니다. 이미 하늘을 나는 자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약점(弱點)을 약(藥)으로 삼아 강점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것 -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약점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나의 약점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까? 내 약점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도록 할까? 이것이 주의 백성들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내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V. 내 모습 이대로

제게도 여러분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약점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게도 약점이 있고 여러분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어요. 주님 날 도와 주세요. 우리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디엘 무디가 복음을 전하고 봇짐을 싸고 있는데 한 소녀가 달려왔습니다. 
“선생님 나도 선생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너를 어떻게 쓰실는지 성경을 읽어보렴.” 
“선생님 저는 글을 배우지 못했어요. 성경을 못 읽어요.” 
“네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것을 내려 놓아봐라. 조그마한 헌금이라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써 달라고 기도해 보려무나.” 
“선생님 우리 집은 가난해요. 엄마 아빠한테 용돈을 못 탔어요. 가진 것이 없어요.” 
“네 몸을 하나님 앞에 바쳐보렴.” 
“나는 장애가 많아요. 나는 병이 많아요. 이런 몸도 하나님이 쓰실까요? 하나님이 사랑하실까요?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그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 그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길 원하신단다.” 

이 아이의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데 그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디엘 무디의 전도단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그 아이의 몸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중얼중얼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받으세요.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받으세요.” 

거기에 영감을 받았던 엘리자 헤밀턴 여사가 조용히 시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를 땅에 떨어뜨리자 주워 읽은 사람이 생키입니다. 생키가 피아노를 두둘기며 거기에 곡을 붙였습니다.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곳마다 상처난 심령들이 치료를 받았고, 이 노래가 불려지는 곳곳마다 연약한 사람들이 새 힘을 얻었고, 절망에 사로잡혀 삶을 포기하려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고, 이 노래를 부르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주님 나를 쓰시겠습니까?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겠습니까?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픈 장애를 가진 에훗을 들어 거대한 체구에 온갖 권력을 가진 모압의 에글론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에훗이 일어날 때 이스라엘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짓눌려 살던 패배주의를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조롱하던 한 장애인을 하나님이 들어 못난 우리를 조롱하시는구나. 주여 용서하소서. 이 백성을 쓰소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 영광스런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장애를 이스라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을 에훗은 얼마나 찬양했을까요? 오늘 본문 마지막 30절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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