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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통하는 교회 (행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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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교회 (행 15:1~11)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어서 움직이지 않고 해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온 세상이 믿고 있을 때, 갈릴레오라고 하는 사람은 그 믿음을 부인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쓴 '천문대화'라는 책을 통해서 이를 뒤집어 지동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 당시에 세도가 대단했던 교회의 종교 재판소에 끌려가서 70의 나이에 참회복을 입고 재판을 받았습니다. 아마 노령이고 주변 분위기가 워낙 공포스러워서 그랬는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기로 마음먹고 그는 성경 위에 손을 얹어 이렇게 서약을 했습니다. '저는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며, 움직이지 아니하고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어리석은 학설을 거부하고 비판하고 저주합니다. 동시에 다시는 이런 혐의를 받을 수 있는 글을 발표하거나 주장하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그렇게 하고는 이제 손을 들어 항복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고행을 하도록 언도를 받았고, 그의 책은 다시는 보급되지 못하도록 금서목록에 들어가서 배포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법정에서 끌려 다시 나올 때 그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수년 전 요한 바오로 2세가 350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가 갈릴레오에 대해서 내린 판결은 잘못되었다고 시인을 하고 갈릴레오에 대하여 사실상 무죄 선언을 한 것입니다. 350년 만에 겨우 이와 같은 바른 판단이 나온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서두에 끄집어내느냐 하면, 한번 사람이 무지의 소치로 오해를 하기 시작하면 그 오해를 푸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생긴 오해든, 편견 때문에 생긴 오해든, 또는 어떤 이해 관계 때문에 생긴 오해든 간에 그 오해가 굳어져서 자기 자신에게 진리로, 정설로 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그것 때문에 옳은 것을 전부 다 부정해 버리는 무서운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1-2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여러분,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에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돌을 맞아가면서도 심지어 핍박과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예수를 믿음으로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생명을 걸고 증거하며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단의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배치되는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2절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왜 이 문제에 대해 다투며 변론까지 하고 있습니까? 그에게 지금 대두되는 이 문제는 자신도 한때 빠졌던 함정이 아니었습니까? 그 함정에 빠져 자기 열심에 빠져 초대 교회가 핍박받을 때 교회를 잔멸할 때 앞장을 섰던 자입니다. 우리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예수님을 혹독하게 핍박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는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서 그가 구체적인 결단 중에 ‘내가 내 인생을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생각했던 이 모든 것을 내가 배설물처럼 여겼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내가 신앙 안에서 분명하게 내 가치관을 바로 세워 선택을 해 나갈 때 나에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1:20절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 이것만이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이 일을 향해 그가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세상의 것을 내려놓으니까 더 큰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 땅에 다니며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를 담대히 증거하며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할례를 통하여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일단의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공로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인데 어리석게도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고 아픔이 일어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원래 할례는 남자의 성기를 절단한다는 의미입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우리가 가지는 생물학적 힘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만든 자들이라는 상징을 가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난지 8일만에 꼭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할례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자격증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표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할례를 너무 귀히 여긴 나머지 매우 잘못된 착각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할례만 받으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할례를 구원의 수단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만일 할례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십자가의 도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갈5:2에서 말합니다. "보라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할례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바로 할례의 성취자입니다. 할례의 성취자인 예수가 오셔서 당신의 몸과 피를 찢으시고 터뜨리신 새 언약을 통해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할례를 받겠다는 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믿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게 안 통해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답답함이 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참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면 서로가 통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가 아닙니까?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삶을 답답하고 짜증나게 하며 세상을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있어도 서로서로 사이에 말이 안 통하면 사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즘 보세요. 세대간의 소통의 문제는 극에 달했습니다. 또 정당간의 소통의 단절, 그리고 이익 집단의 소통의 단절, 그리고 우리를 끝도, 끝도 없이 힘들게 하는 보수와 진보간의 말이 안 통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 역시 소통의 장벽이 가리워 있는 세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소통의 벽을 실감합니까?

세 가지 경우로 봅니다. 첫째, 자기중심적 사고와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봅니다. 같은 말을 쓰지만 속으로는 각각 서로 다른 계산들을 하고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문서답들을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 한 쪽이 진실하지 않거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이 왜 그렇게 꼬였는지 모릅니다. 

요즘 광우병 문제로 인해 국론이 나뉘는 양상까지 번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무엇을 이야기해도 꼬뚜리를 잡고 안 믿으려합니다. 그러니 온갖 억측과 엉뚱한 오해와 근거 없는 소문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이 안 통하는 피곤한 세상입니다. 셋째, 서로가 말이 다를 때에는 누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면 되는데 통역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말이 안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하고 진실한 중재자는 없고 양쪽을 이간시켜서 오히려 자기 이득을 챙기려하거나 이간질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은 정말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런 불신사회가 아닌가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지금 바울 일행은 이 문제는 생명에 관한 문제가 되기에 진리의 명확성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리하여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 혹은 총회가 소집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따듯한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교 사역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 생생한 체험을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완고한 율법주의자들이 있어서, 이방인을 교회에 받아들이려고 하면 그들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이 문제로 인하여 많은 변론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진지하고 충분한 변론이 있은 후 드디어 수사도 격인 베드로가 일어나 발언을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의 마지막 출현이 되지만, 그러나 이 때 베드로는 중대한 발언을 하여 총회의 방향을 잘 제시해 주었습니다. 여기 9-11절을 보면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분간치 아니한 증거로 이방인들에게 성령까지 주셨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너희들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냐? 너희들은 하나님께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냐?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고 하면서 책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이 얼마나 위대하고 의미심장하고 감격스런 말인지 모릅니다.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 할례를 행하므로,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습니다. 이 때 베드로의 이 고백에 대해 '헨첸'이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사도행전 15장은 사도행전의 전환점이며, 중심부이며, 분수령이다. 과거의 발전들을 마무리 짓고 정당화하는 사건이며, 그리고 앞으로 있을 발전들을 본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격인 야고보 사도의 결론의 발언이 있게 됩니다. 13-21절에 보면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여기 마지막 판결을 한 사람은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쫓아다니며 말렸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요7:3절에 보면 그 형, 예수에게 빈정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골에 묻혀있지 말고 예루살렘에 가서 출세나 하지'라고 얼마나 괄시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끝나고 사도행전에 들어서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는 자리에 야고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전 15장을 보면 부활의 증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바, 열두 사도, 오백여 형제가 만났고 야고보가 만났습니다. 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그는 형님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야고보서에 보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환난 중에도 끝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성벽에서 떨어져 순교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당시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무릎이 낙타무릎 같은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릎꿇어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자신의 오만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신 주님의 사랑을 알 때 도대체 누구를 정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그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이 문제를 정리하여 선포합니다. 28-29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결정을 내린 당사자가 성령과 우리라고 한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앞세워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끌어안아 주신 그 은혜 앞에 야고보 역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라며 구원받은 사람들이 설령 이방인이라 할찌라도 포용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숙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참 소통이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분법의 잣대입니다. 이분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자꾸자꾸 나누는 법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나눕니다. 문제 있는 사람 나눕니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 괜히 주는 것 없이 싫어하는 사람, 자꾸 사람을 나누는 것, 그것이 사람의 생리요 속성입니다. 그래서 특히 저분은 참 의롭고 ?찮은 사람이다. 저분은 문제 투성이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이 이분법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사람들을 갈라놓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이 늘 사용하는 이분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 교회에 통하는 유일한 법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간에 지금 좀 힘들어 보이고 못 되 보이고, 마음에 안 들어 보이고 신앙하고는 멀어 보이는 삶을 사는 분이, 여러분과 저의 눈에 이 교회 안에서 보인다 할찌라도 주님의 눈으로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오히려 그 분들이 더 마음에 드는 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절대로 직분을 세우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선택할 때 이분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가 소통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지 않습니까? 여기 처음 나와 적응하기 힘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속썩여도 좋으니 가출만 하지 마십시오" 자꾸 가출하다 보면 진정한 영적인 기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등록하여 믿음 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에게는 "일꾼으로 오지말고 자녀로 오십시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일꾼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잘하는 것보다 구원받은 자 답게 살아가는 일상 생활에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과학 물질 문명에서 잃어버린 예수, 분주한 세상살이에서 잃어버린 예수, 신앙의 방황 속에서 잃어버린 예수, 인생의 방황 속에서 잃어버린 예수, 그 예수를 우리 교회에 가면 찾는다고 하더라는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잃어버린 구원의 감격, 행복한 신앙생활, 삶의 기쁨과 환 희, 어디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방황하는 사람들, 우리 교회에 가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더라는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인생의 환희를 회복할 수 있고 인생의 축제를 회복할 수 있는 교회!! 그래서 우리 교회가 소통의 통로가 되어서 진리의 생수를 온 땅에 흘려 적시는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하므로 편견과 상처와 불신으로 얼룩진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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