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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기념] 성령으로 담대하라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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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담대하라 (행 4:23~31)


이번 주 수요일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8주년 되는 뜻 깊은 기념일입니다.  전쟁의 상처와 아픔이 점점 잊혀져가는 이 시대에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파괴적인지를 깨달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이런 때에 믿는 자에게도 신앙적인 의미에서 되새겨 보는 귀한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순교자’라는 책입니다. 이 소설은 재미작가 ‘김은국’씨가 지은 작품입니다.  그는 1964년 이 작품을 발표하여 세계 문단에서 소수인종작가로서 크게 주목을 받았고, 한국작가로는 처음으로 1969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습니다. 

순교자는 신자나 불신자에게 깊은 의미를 전하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한국전쟁이 활발하던 때 어느 마을에서 14명의 목사가 공산당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러던 중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공산당은 급히 마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산당은 도망가면서 14명의 목사가운데 12명은 죽이고, 두 사람은 살려줍니다.  피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12명은 순교를 당하고 두 명은 배신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살아남은 두 사람은 침묵으로만 일관합니다.  이 소문이 국가정보부에서 알게 되었고, 뭔가 석연치 않음을 발견한 장대령은 진실 찾기에 들어갑니다.  때마침 12명의 목사를 처형한 공산당의 정 소좌가 체포됩니다.  결국 정 소좌의 발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납니다.  순교자로 알려진 12명은 신앙을 부정한 변절자였고, 오히려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소좌는 비겁자요 진실하지 않은 12명을 죽이고, 오히려 두 명을 살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신앙이 무엇인지,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 옳은 행위인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풀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가장 큰 표현은 어쩌면 용기요, 담대함입니다.  그런 신앙의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들이 1세기를 살던 사람들이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놀라운 변화는 이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부터 달라지고, 뭔가를 주목하게도 되지만, 특히 담대해 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알려줍니다.  29절과 31절에 ‘담대히’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서 당시 사도들과 성도들의 두려움이 없는 용기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에 대하여 이렇게 담대했을까요?  본문에서 우리는 그것을 몇 가지로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복음에 대한 담대함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복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복된 소식이겠습니까?  바로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주님의 탄생, 생애, 특히 죽음과 부활이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바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해 담대했다는 말은 곧 말씀에 대한 담대함,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 그들의 용기를 강조하면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고, 31절에서도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신 이후 이들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용기가 생깁니다.  특히 말씀에 대해, 복음에 대해 믿음이 확고해 집니다.  이런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담대함은 뒤늦게 예수를 믿었지만 누구보다도 앞서간 바울에게서 더욱 발견합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뒤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오늘까지 큰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복음을 말할 때 바울을 논하지 않을 수 없고, 복음에 있어서 가장 담대한 사람으로 우리는 결코 바울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요, 삶이요, 용기입니다.  그는 말씀 앞에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가장 위대한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 앞에서 담대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어떤 경우에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땅에 처음 복음이 들어와 믿는 사람이 많지 않던 때에는 교회 다니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간다고 분명하게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책을 당당히 옆에 끼고 가지도 못했습니다. 교회 앞에서도 혹이라도 누가 볼까 두리번거리며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면 언제 교회 갔다 왔느냐 하며 모른척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식당에서 기도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눈만 감았다 뜨기도 했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몰래 하기도 했고, 고개만 숙였다 금방 먹기도 했습니다.  왜 그때는 그렇게 믿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기도하면 누가 보는 것 같고 그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입니다.  새벽에도 거리에서 제일 많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새벽기도회에 가는 성도들입니다.  이젠 식당에서도 기도하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립니다. 식사하면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보면 모두 집사님, 권사님입니다.  참 많이 달라졌고, 정말 당당해 졌습니다.

복음 앞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고, 내가 무엇을 믿는 지에 대해 여전히 흔들리지는 않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담대해집니다.  특히 복음 앞에, 말씀 앞에 담대해 집니다.  복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과 삶에 가장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후대까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제 복음 앞에 담대함으로, 말씀 앞에 확신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 세상에 대해 담대했습니다.

본문은 제자들이 복음 앞에서 담대한 모습도 알려주지만, 아울러 세상에 대해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은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교회와 다른 곳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과 다른 곳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믿는 것과는 분명 다른 곳입니다.  세상은 복음과 별개의 곳이요, 그리스도인과 다른 곳입니다.  바로 그것에 대해 제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한마디로 담대합니다.  본문은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일대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기적을 알게 된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찾았을 때 그들은 더욱 담대히 주님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선동하고 유혹한다고 하며 전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제 본격적으로 종교지도자들의 압박이 시작됩니다. 본문은 바로 그 때에 선포한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이 말은 모두가 세상에 대해 담대함을 선포한 기도요, 고백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담대함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싫고 더럽다고 해서 산속으로 들어가 평생 기도만 하고 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에 속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삽니다. 아니 세상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세상에 동화되거나, 타협하며 어울리거나, 세상의 풍습을 따라가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복음화 시키고,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세상에 속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이 모든 것을 동원하여 공격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공격하되 조그만 허점이 있으면 벌떼처럼 달려듭니다.

세상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교회로 이끄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에게 멀어지게 하고, 세상에서 만족하며 살게 합니다. 우리를 참소하고 약하게 만들어 점점 떠나게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이요, 형편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강하고 담대하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반기독교시민연합운동’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처음부터 ‘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더 이상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하면서 출범했습니다.  이들 외에도 인터넷에 40여개가 넘는 안티 기독교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터넷토론방에서 기독교 비방 자료를 꾸준히 올리며 반기독교정서를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인터넷 문화에 젖어있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언론과 방송과 매체와 심지어 영화도 안티기독교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투캅스, 친절한 금자씨, 말양 등이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아프간 사태로 인해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비하해 ‘개독교’라고 부르고, 성경을 어린이가 읽어서는 안 될 악서로 규정하고 천만의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반기독교의 정서가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기독교의 자기반성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그렇게 사용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 담대해야 합니다.  세상과 멀어져서도 안 되지만 동화되거나 흔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고, 더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편이 되고, 기독교 편에 서야 합니다.  분명 성령이 오시면 세상에 대해 담대해 집니다.  사탄의 유혹에 민감합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는 환란에 대해 담대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들의 비장함과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제 복음으로 인해 핍박과 환란이 예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담대하게 나갈수록 세상은 더욱 핍박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이후에 사도들은 더욱 복음을 힘 있게 전했고, 앙심을 품은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에게 무수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옥에 가두는 일을 비롯하여 매로 치고, 고문을 가하고, 온갖 욕설과 비방을 퍼부으면서 압박했습니다.  결국 환란과 핍박으로 예루살렘교회는 더 이상 모이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일이 예감되는 상황에서도 사도들이 결단하고 다짐하고 나가는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담대함입니다. 담대함이 환란을 이기게 합니다. 담대함으로 그들에 닥칠 어떤 역경과 시련도 극복하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이런 면에서 귀한 본을 보였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담대해진 그들에게 이런 위기와 환란의 상황에서 떠올린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들은 이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세상에서는 환난이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습니다. 우리 삶에 고난은 예고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에 필요한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담대함입니다.  담대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환란의 때에 이처럼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그들에게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아니 죽어도 영원히 산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머리털 하나도 건들지 못하도록 보호하신다는 두둑한 배짱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란의 때에 이런 담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AD 70년 예루살렘이 망할 때 당시 환란을 당한 성도들은 오히려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이 죽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무사히 예루살렘을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직전, 갑자기 예루살렘작전의 사령관이 디도장군으로 교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격의 속도가 느슨해진 틈에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순간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한사람씩 예루살렘을 빠져나갔고, 대재앙의 핍박에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환란이 닥치고, 핍박이 몰아치고, 고난이 겹친 다해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하나님의 사람인 나는 어떤 경우에도 죽지 않는다, 아니 죽어도 영원히 산다는 담대한 믿음이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분명 세상에서 환란을 당합니다.  고통의 골짜기를 지나고, 아픔의 터널을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엄습해 오고, 파도 같은 위험이 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바로 그런 때에 진가를 발휘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은 담대하게 합니다.  강하게 합니다.  두렵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믿음은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믿음으로 담대해야 합니다.  환란과 고난의 현장에서 더욱 담대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믿음과 성령으로 환란을 극복하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담대해 집니다. 복음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고, 세상에 대하여 담대하고, 그리고 환란에 대하여도 담대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고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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