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6.25기념] 기독교와 국가 (롬 13:1~7)

  • 잡초 잡초
  • 317
  • 0

첨부 1


기독교와 국가 (롬 13:1~7)

 
이번 주간에는 우리가 6·25를 기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과 이번 주간에 제게 약속된 모든 설교 요청 받은 곳에서 이 말씀을 전하려고 준비하였습니다. 이제는 6·25같은 날은 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6·25를 기억하는 사람이 소수가 되었다는 점과 6·25를 부각시키는 것이 남북평화 모두의 손해가 된다는 판단 때문에 그렇습니다. 

6·25 이후에 남북 관계는 두 가지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나는 초긴장 상태고 하나는 평화 협력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더욱 긴장을 준다고 봅니다. 어떤 때는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터질 듯 한 험악한 관계가 오고 갑니다. 반대로 금방 통일이라고 될 듯 한 희망을 주기도 하는 이런 관계의 불확실성 정치 관계입니다. 

7·4 공동성명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국민들은 ‘아! 이제 통일이 되는구나!’ 눈앞에 통일이 왔다는 감정을 가졌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도 변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유는 지금까지 가장 인간다운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국가 건설을 해야 하는가 연구해 왔고 또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세 가지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 하나가 생명의 존엄성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진리에 기초해서 생명 존중의 철학을 국가 정책 1순위에 놓은 것이 선진국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이 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자는 철학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대 선물이 하나 있는데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인간이 사는 이유는 행복의 추구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데 최대한 노력하는 국민 철학, 이 세 가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무시하는 국가들은 나쁜 나라라고 규정하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는 절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과 제도를 만들었다 해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세상은 좋아지고 나빠집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선진국일수록 범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식하고 머리 나쁜 사람이 망치는 확률보다 많이 배우고 머리가 우수한 사람들에 의해 망한 역사가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필요한 것인가? 또 선진국의 모든 제도는 잘 된 것인가? 어떠한 제도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 주변에 매우 절친한 목사님 한분이 북한통입니다. 북한 주민들 돕기 운동을 수십 년 하셨습니다. 또, 그런 것을 하시니까 제가 주변에서 좀 도와드리기도 했고 협조도 해드린 일 있습니다. 또 하도 북한에 가서 무엇을 갖다가 많이 주니까 북한에서도 고위층이 알아주는 그런 인물입니다. 거기 가서 자기는 대우 받으니까 자유스럽게 다니고 청년들과 이야기하시는데 어느 날 북한 청년들이 좌담회를 한번 하자고 해서 응했답니다. 청년들이 하는 말이 “남한과 북한의 비교로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북한이 더 깨끗합니다.” 북한 청년들이 그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북한의 제도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니까 훌륭한 것인가? 그래서 목사님이 대답을 하셨답니다. “북한은 도덕적으로 더러워질 분위기와 자유가 없다. 너희들이 남한의 유흥가에 가서 살면서도 깨끗해야 그게 깨끗한 것이지 더러워질 곳도 없는 곳에서는 깨끗해질 수밖에 없다. 마라톤도 혼자 뛰면 일등이다.” 

여러분들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에 많이 다니셨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도둑질 하는 사람은 무조건 손을 잘라버립니다. 볼 것도 없습니다. 도둑질한 것만 발견하면 끌어다가 손목을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도둑놈이 없습니다. 있어도 아주 극소수가 있거나 말거나입니다. 길바닥에 돈이 떨어져있어도 그것을 주워가면 안 됩니다. 주워가면 손목이 잘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둑놈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 제도는 훌륭한가? 아니면 도둑놈이 좀 있다 해도 손목이 자르지 않는 사회 제도가 더 좋은가?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담임선생님께서 환상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려주셨는데 “서구 사회는 얼마나 사회가 정직하고 훌륭한가?”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생님들은 서구 사회를 한 번도 안가보고 말씀하신 거 같습니다. 도둑놈이 없다고 하시고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손을 닦으려고 손에 시계를 풀어서 옆에다 놓고 손을 닦고 깜박하고 그냥 나왔는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아무도 안가지고 가고 그 시계가 그냥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서구사회라는 겁니다. 

나는 사실 그 선생님이 항상 그렇게 말씀을 화려하게 해주셔서 거기에 대한 동경이 제가 서구사회를 가보는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이제 제가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이 구라를 치신건지 전혀 다른 세상인 겁니다. 아주 험악한 우범지대에서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밤일을 하면서 아주 간단한 단순노동을 하면서 학문의 길을 가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내가 있는 그 우범지대에 내가 있는 그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 다 도둑놈입니다. 

셀프 서비스 주유소에서 조그만 스낵 가게를 겸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없이 나 혼자서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혼자 앉아서 돈을 받는데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한 50퍼센트 이상은 하다못해 껌 한통이라도 집어넣어야 나가지 그냥 나가는 사람이 없을 만큼 눈만 돌리면 뭐 하나 없어지는 겁니다. 내가 그때 시간당 2.75달러를 받고 일을 할 때인데 휘발유를 넣었으면 와서 돈을 내고 가게 되어 있는데 그냥 도망가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혼자서 쫒아갈 수도 없고 황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부터 미국이 변한 게 뭐냐 하면 선불제 영어로 하면 Pay first라고 하는, 돈 먼저 내지 않으면 주유할 수 없는 문화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도 도망가 버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과 나와의 약속! 도둑을 맞던지 도망갔던지 내 월급에서 다 빼는 겁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는데 도둑놈들 뒷바라지하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 뿐입니까? 총을 갖다 대고서 돈을 빼앗는 사람이 없나, 칼을 든 사람이 들어오지 않나, 몽둥이를 들고 들어오지 않나?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여기 와서 죽나보다.’ 그때 나는 얼마나 화가 나는지 제 옆에 가게 하시는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그분과 둘이 한참 만나서 서로 피차 넋두리를 하는 겁니다. 그 아저씨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오전 10시가 되었는데 어떤 강도가 들어와서 총을 들이대고 돈 내라고 했습니다. 이 아저씨가 침착하십니다. “야! 이 가게를 9시에 문을 열었다. 지금 10시인데 9시부터 한 시간 동안 손님 한 사람도 안 들어왔는데 돈이 있겠느냐?” 그랬더니 강도가 생각을 하더니 “아! 그렇겠구나. 그러면 내가 이따가 오후 5시에 오겠다.” 정말 5시에 다시 온 겁니다. 총을 가지고 있으니 잘못하면 죽잖아요? 그래서 500달러를 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는데 6~7명의 가족사진인 겁니다. “이 아이들을 내가 아빠로서 먹여 살려야 되는데 내가 직업이 없다. 할 수 없이 나쁜 일인 줄 알지만 이러며 다니니까 미안하다. 또 오겠다.” 그러면 가셨답니다. 

제가 교인들에게는 광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도 한번이라도 당한 사람 모이십시오.” 최고 강도 많이 당한 사람이 30대 초반의 여집사님인데 13번 당했습니다. 13번 가슴에 총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발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ABC TV방송에 내 말이 다 나갔습니다. 기자들이 나에게 다 왔습니다. “이게 뭐냐? 생명 존엄을 국가 정책의 제1순위로 정하고 교육을 시키는 나라가 돈 몇 푼 때문에 생명을 죽여야 되는 이 사회는 잘된 사회인가? 이게 뭐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제도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고 나빠집니다. 이 관리책임은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잖아요?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 나라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달려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그의 이름이 본래 카시우스 클레이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정신으로 무하마드 알리라고 개명을 했는데 그는 자신의 신앙과 미국 국법의 차이 때문에 그의 인생에 가장 화려했어야 되는 전성기 기간 3년 6개월을 출전 금지를 당해서 꼼짝 못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순교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순교자란 무엇인가? 자신의 신앙과 국가 이념이 맞지 않았을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국가 이념을 버린 사람들이요 그로 인해서 국가의 물리적 힘에 의해 처벌된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소속하고 있는 민족을 사랑하고 소속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복종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통치적인 질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시라.” 창조의 순서부터가 통치적 질서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의 국가와 사회 질서를 위해서 어떤 특정인에게 고난을 주셨다고 오늘 말씀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권세자는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통치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자의 통치에 순종하여야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여기의 말씀인데 선진국이란 뭐냐? 법의 정신이 훌륭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그 법을 질서 있게 지키는 나라가 선진국이고, 법을 만든 사람들이 법을 가장 안 지키는 나라가 후진국입니다. 세상에는 선한 법도 있지만 악법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순서를 따지면 이 세상은 법이 있어야 지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법 위에 정치가 있어서 법이 잘못 되었을 경우에는 정치로 인해서 법을 뜯어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정치 위에는 뭐가 있냐? 철학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법인가? 이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잘 되었을 때 국가의 모든 시민들은 통치자의 지도를 잘 따라야 국민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국가관이란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어려움이 국가에 찾아올 수가 있는데 무정부 상태라는 것입니다. 질서가 없는 혼란은 그 국가를 망하게 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나라 창조의 질서가 나타나는데 모든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 질서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우주 천체가 그 어떤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권을 이탈해서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 사건은 인류의 소멸을 가져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절대 순종하여 이 우주가 마치 톱니바퀴와 같이 맞아 돌아가기 때문에 이때가 되면 항상 장마철이 되고 겨울이 되면 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는 유일한 존재가 나타납니다.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 질서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를 깨뜨림이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지게 했고 출애굽기에 나타난 히브리 민족의 국가 형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모세라는 특정인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민중들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심으로 그 제도 안에서 인간 행복이 창조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땅 저 가나안을 보면서 갑니다. 모두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십시다. 그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은 처벌하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사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하고 계신가를 보여준 성경이 바로 출애굽기이며 바로 그것의 질서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우리는 애국자라고 명칭을 줍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큰 성공을 했다고 합시다. 나라가 망하면 그 성공이 행복하겠습니까? 국가라고 하는 전체 공동체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된 상태에서만 개인의 행복이 보장을 받는 것이지 나라가 혼란스러워 다 망했는데 내 성공한 것이 무슨 행복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런 국가관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사랑하여 애국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국가는 교회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협조하는 상생의 관계를 갖지 아니하면 불행해 집니다. 모든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 사역을 도와줘야 하며 지상에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성장시켜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국가관입니다. 

구약 성경에 많은 예언자들이 활동을 했습니다. 예언자들의 활동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입장에서 세상의 역사를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치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 아래 존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라는 그런 소리를 계속 발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정치는 하나님의 정치에 관련이 되고 그 주권 아래서 정치 행동이 진행되어질 때 인간 역사에 참 평화와 번영이 올 것이며 그와 반대로 인간의 정치 역사가 하나님의 정치를 이탈하거나 반역했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인간 불행이 찾아온다는 이 말을 계속 한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지금 이 예배당 안에 우리와 직접 관계된 두 깃발이 양쪽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왼쪽에 태극기가 있고 오른쪽에 갈보리 깃발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국가의 권세나 교회의 권세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나라와 이 교회가 그러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공동체가 되라는 소원을 저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 지상의 국가나 통치자가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을 부인하거나 반역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는 역사의 주인이시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지 아니하고 거절할 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역사는 얼마든지 있어왔습니다.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의 신앙과 반대의 입장을 취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거기에 나타난 사건이 순교의 발자취입니다. 이럴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다. 순교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항거해야 됩니다. 

일제시대, 혹은 공산당 시절에 우리나라의 기독교계를 그런 것들이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를 반대하지 않습니까?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정신적 기초라고 해서 살아있는 현인신 천황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국가 이념과 맞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수없이 순교당하고 주기철 목사 같은 사람은 그래서 그렇게 죽은 거란 말입니다. 

시편에 보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의 권세 밑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권세도 하나님의 통치권 밑에 있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통치 국가에 실현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세계 역사에 그렇게 무식하지 않습니다. 절대 권력을 주장한 국가나 통치자들은 모두 망하고 슬픈 말로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관에 있어서 이중국적의소유자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 나라의 국적과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국적은 서로 배타하거나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됩니다.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지상 나라의 국적은 개인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은 어떤 형편에도 변경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도 이제 다인종 문화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베트남의 며느리들이 수없이 들어오고 중국 조선족이 끝없이 오며 세계 모든 동남아의 젊은이들이 꿈을 안고 코리아 드림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을 찾아와서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상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토록 내셔널리즘이 강한 유대 민족도 지상의 국적은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은 출생국가가 어디가 되었든지 성공을 했던지 전쟁을 했던지 어디에 가서 살던지 아무 상관이 없이 영원한 국적입니다. 어떤 경우 이 지상의 나라가 내 하늘나라의 국적을 포기하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상 나라의 국적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예 미련을  두지 않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국가가 나를 핍박할 거 아닙니까? 핍박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 시민권을 끝까지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국가관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국가관이란 말입니다. 

어떤 기독교 국가도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국가 부름에 나가서 전쟁터에 가서 수없이 살인을 해야 되는데 잘하는 것인가? “성경에는 하나님은 전쟁에 능한 하나님이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 이런 말들이 무수하게 많이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전쟁을 해야 하되 불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있어서 내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그런 문화는 아닙니다. 선한 일도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고 악도 작은 악과 큰 악이 존재하는 그런 문화이고 비극도 적은 것이 있고 더 큰 비극이 존재하는 그런 문화입니다. 전쟁은 분명히 악입니다.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전쟁은 안하면 더 큰 악이 생기니까, 마귀와 같은 침략자의 그 흉악한 불의에 대해 충실한 협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악을 선택해 싸우는 것이 전쟁의 합리성이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건강하면 의사는 필요 없잖아요? 

어떤 때는 의사가 사람의 다리를 뚝 잘라버릴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왜 잘라버리는 것입니까?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의사는 병균이라고 하는 이 악의 존재를 막기 위해서 작은 악을 선택하는데 그 작은 악은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공의의 모순되는 존재인가를 항상 검토해서 불의의 세력을 막기 위한 것일 때는 목숨을 바쳐 순교자적으로 전쟁을 해야 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 아닙니까? 

이제 대한민국은 뚜렷해진 희망과 갈등이 확실해졌습니다.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런 경우를 많이 거쳐 갔습니다. 이때 잘하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국가가 건설될 것입니다. 이때 잘못하면 아르헨티나이나 필리핀 같은 결과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한때 세계 4대 강국이라고까지 말하던 아르헨티나가 급격한 빈민국가로 타락했고 동양의 흑진주라고 불리던 필리핀이 빈민굴이 되지 않았습니까? 까딱 잘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국민 각자가 이성적 판단을 하여 국민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지혜가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무정부 상태, 무질서인 혼란의 상태, 이성적 판단 없이 그렇게 나간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텍사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미국 교회를 빌렸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는 존 크레그 목사였습니다. 그때 미국 사회의 제일 큰 문제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거 어떡하나? 우리에게 그렇게 좋은 차를 만들어주던 회사가 문을 닫게 되다니!’ 목사님이 그 주간에 자기 자동차를 클라이슬러 자동차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여러분 중에 지금 차를 바꿀 시기가 된 분이 계시다면 망해가는 클라이슬러를 살려주기 위해서 클라이슬러 자동차로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광고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담임 목사님의 광고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많은 교인들이 클라이슬러로 자동차를 바꿨습니다. 

클라이슬러 회사 망하지 않았잖아요? 국민 각자의 의식이 분명하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대한민국을 축복하셨습니다. 축복받은 한국을 관리하고 지키는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국민 모두가 지혜로운 판단을 하면서 우리가 늘 부르는 “대한민국 만세”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대한민국을 사랑하셔서 교회 축복을 주시고 지금은 세계 선교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교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 나라는 21세기에 어느 나라보다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이 나라를 붙들어주시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질서 있는 축복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기도하는 국민 각자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며 염려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는 지혜 국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