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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천사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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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천사의 얼굴
행6:8-15

이 세상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나름대로의 이름이 있습니다.  저 들판에 나가면 수많은 수목들이 있습니다만 그 수많은 수목들도 보면 다 이름이 있습니다.  비록 오늘 태어났다가 오늘 죽어버리는 하루살이라 할지라도 이름이 있듯이  이 세상 존재하는 것들은 다 이름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그 사람을 대표하고 그 사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역사에 길이 남는 것은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이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 유명한 사람이 소개 됩니다.  스데반이라고 하는 초대교회 당시 일곱 집사 중에 한사람 이죠?  이 사람을 가리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고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도 같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이후에 첫 번째 순교자로 기록되는 영광스런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이 중요합니다.  이름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자식들이 태어나면 그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 불러야 줄까?  골몰합니다.  물론 이름이 중요 하겠죠?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안은 것이 세상에 같은 이름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그 한 사람이 잘되면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덩달아 잘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표되는 곳은 이름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얼굴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다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화났는지, 짜증났는지, 거짓말하는지, 기분이 좋은지, 아픈지, 특별히 말은 안 해도 그 사람의 안색을 보면 다 안다 말이죠.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얼굴만 보면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굴을 중요시합니다.  아름다워 지려는 욕망 때문에 성한 얼굴을 비싼 돈 주고 여기저기 뜯어고치려고 애를 씁니다.  눈도 고쳐보고 주름살도 없애고 머리도 염색하고 귀도 뚫어 보고 코도 세워보고 별짓을 다합니다.  요즈음 같이 경기가 없다고 난리치는 가운데도 보면 성형외과는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얼굴만 고치면 나의 이미지가 달라져 보이기 때문 일 겁니다.  
화장하고 머리만 잘라도 사람이 확 달라 보이는데 비싼 돈 드려 얼굴 가슴 할 것 없이 가서 고치면 얼마나 달라 보이겠습니까?  딴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실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함 보세요.  세상에 갓 태어난 갓난아기를 한 번 보세요.  과연 여러분 같으면 그 태어난 아이를 그 보다 더더욱 아름답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인데 그것 보다 더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하세요.  우리는 실로 하나님이 지으신 인류 최고의 걸작 품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세상에 태어날 때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가장 귀하고 복된 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의 모습이 천사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셨다는 말입니다.  그 얼굴에는 거짓이 없고 순결하고 때가 안 묻은 그런 얼굴이었었는데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뜯어고칩니까?  
그 아이가 똥오줌을 싸도 예쁘고 응어리를 해도 예쁘고 하여간 예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그런 분들입니다.  한번 웃어보세요.  한번 웃으면 얼마나 밝아집니까?  앞으로 밝게 웃으면서 사시는 분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밝은 얼굴
그렇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바로 그런 심정으로 바라보셨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요?  “보시기에 심히 아름답다”고 고백하셨잖아요.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은 까닭에 아름답던 자들이 죄를 짓고 저주받은 땅에서 상할 때로 상해가지고서 그 얼굴에 죄가 가득하고 시기가 가득하고 혈기가 가득하고 거짓이 가득해서 요즈음 사람들은 그 얼굴을 고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고치는지는 몰라도 고친단말이죠.  여러분 고쳐서 될 일 같으면 뭔들 못하겠어요.  고쳐가지고 우리의 영혼도 고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잖아요.  왜 오셔서 그 고생을 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시겠어요.  
육신적으로 보면 어린 갓난아이와도 진배없는 흠 없고 죄 없으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바로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죄 값을 십자가상에서 치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오신 겁니다.  여러분 그걸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처럼 그분의 자녀가 되고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형상을 닮게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 닮으면 누구를 닮습니까?  아버지를 닮을 수밖에 “아멘”
우리가 뜯어고쳐서 닮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믿음으로 닮는다는 말입니다.  
본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빛이십니다.  빛을 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빛을 비취셨고 그분을 영접한 자는 다시금 새로운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눕니까?  성령의 사람과 흑암의 권세아래 있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으로 나뉘듯, 궁창의 윗물과 아랫물로 나뉘듯 나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 사람으로 ........ 양과 염소로........ 알곡과 가라지로.......  나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비교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직책은 같았습니다.  사울이 첫 번째 왕이었다면 다윗은 두 번째 왕입니다.  서로가 직책이 같았습니다.  어떤 외적인 면으로 볼 때는 그렇습니다.  다윗이 사울에 비해 잘나지 못했습니다.  
키도 사울이 더 크고 준수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 두 사람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사울은 버림받고 다윗은 쓰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다윗은 사울에 비해 항상 밝게 살았습니다.  긍정적으로 살았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어려움이 와도 찬송하며 살았습니다.  원수에게 쫓김을 당해도 불평하지를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그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있는 대로 우거지상을 하면 좋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울을 함 보세요.  사울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항상 시기와 질투로 불안에 떨다가 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매우 어둡고 답답합니다.  경제가 어렵고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대통령에 출마하는 사람마다 다들 경제를 살린다.  큰 소리 쳤던 그 양반을 뽑았다고 세상이 뒤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가면 갈수록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 머리에 붉은 띠를 띠고 데모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에 힘주고 핏대를 올려가면서 악을 써가면서 싸워봐야 남는 건 내 목만 아픕니다.  우리가 사울과 다윗의 모습에서 봐서 알 수 있듯이 해 밝은 얼굴로써  대하는 자만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스데반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이 세상은 머지않아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변화된 얼굴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상은 어떠했습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은 다만 말씀으로 세상을 하나하나 창조 곧 변화시켜 가셨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처음 베푸신 이적 행하실 때 어떤 이적을 행하셨습니까?  물이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일부터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는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듯이 새로운 사람으로 아름답게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처럼 귀한 사람으로 변화되게 되어있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원래 시몬이었는데 호숫가에서 고기나 잡던 어부출신 입니다.  성격도 급하고 다혈질 적인 사람이지만 그가 예수님을 따르더니 결국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이름도 바꾸게 되었는데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면 변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도 베드로에 비해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의 별명이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듣던 성격이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변하더니 사 복음 중에 하나 요한복음으로부터 요한123서를 비롯해서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접해듣고 마지막 계시록까지 기록하고 밧모섬에서 순교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드릴려고 날뛰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았습니까?  핍박하던 사람이 변해서 예수님을 전하다가 매도 수없이 맞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결국은 십자가에 죽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을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승화되는 변화가 있고 하나는 변질되는 변화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나무나 생명체가 변화되는 과정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 부패가 되어 가지고 변질되는 상태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 됩니다.  생명이 없으면 썩어서 변질 되는 것이고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메마른 씨에서도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서 자라고 성장하는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으면 그렇게 됩니까?  생명이 있으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승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자녀는 자라면서 제 부모를 닮게 되어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를 닮아야 합니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닮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왜 주님을 닮아야 합니까?  우리 몸은 육으로 났지만 우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지적인 면도 닮고 정적인 면도 닮지만 의지적인 면도 닮아서 그분의 아름다운 형상을 빼닮게 되어 있습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3. 성령 충만한 얼굴
이 세상에서 과연 누가 능력 있고 자신 있고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즈음 항간에 얼짱 몸짱 하면서 동기간에도 이런 사람들이 행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스데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가리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그런 성령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때이니까 얼마나 핍박과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아무리 멸시를 당하고 핍박 휘몰아치고 고통 중에 있을 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보니까 당시에 세계의 각지에서 한 가닥씩 한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스데반과 변론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에게는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믿음 장 아닙니까?  믿음에 많은 선진들의 삶을 열거하면서 이분들이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도 강하며,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과 옥 속에서도 이길 뿐만 아니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그 어떤 학대를 받아도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는 겁니다.  
어디서 이런 엄청난 힘이 납니까?  성령이 충만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구약성경에 이야기를 하고 마칠까 합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에 식민지로 있을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때에 당시 왕후였던 와스디가 폐위가 되면서 얼마 후 다시 왕후를 간택하는데 수산 궁에 문지기로 있던 유다인 모르드개의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딸같이 여기는 처녀가 있었는데 용모고 곱고 아리따워서 왕후 간택에 나가게 되는데 왕이 이 에스더를 보고는 기뻐하면서 왕후를 삼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역모를 꾀하려는 술수를 알아차리게 되어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므로 역모를 꽤하던 일당들을 소탕하게 되어 이 사실을 궁중 일기에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아각사람 하만이라는 왕 다음으로 2인자에 위치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나라 모든 직위에 있는 신복들은 다 자기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오직 한사람 성문지기인 모르드개는 그가 지나가도 절하지 않는지라 하만이 이 사람이 유다인인 것을 알고 유다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거짓으로 모함하여 왕의 어인을 받아 내기에 이르게 되고 이재 12월 13일을 기해서 유다인들을 처형하겠다는 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이 사실을 알고는 재를 무릅쓰고는 굵은 베옷을 입고 성문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슬피 우는 삼촌 소식을 듣고 모르드개에게 달려가는데 모르드개가 말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어서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이 봉변을 면하리라고 생각지 말라면서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삼촌의 말을 듣고 삼일동안 금식기도하고 나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가고를 가지고 왕의 집무실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때 왕후 에스더의 모습을 본 아하수에로 왕은 마치 에스더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던 겁니다.  그래서 나라의 반이라도 달라면 주겠다고 합니다.  
보통 때하고 달리 보였던 이유가 뭡니까?   금식기도를 통해서 성령님이 에스더와 함께 하시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국 에스더의 기도와 유다백성들의 기도가 함께 어우러져서 아각 사람 하만뿐만 아니라 그 민족을 멸망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의 얼굴은 내안에 하나님이 형상이 비쳐지게 되는 거룩한 얼굴이라는 겁니다.  
행 6:15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엡 5:18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인간의 얼굴이 어떻게 천사의 얼굴과 비교가 될 수 있습니까?  인간으로써 최고의 아름다운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성령님이 내안에 임재하고 계시면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우리 심령 속에 성령이 충만할 때 나타나는 거룩한 얼굴이 여러분들의 얼굴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출애굽기34장에서 모세가 40일 금식한 후 변화된 모습도 얼굴에서 광체가 났습니다.  아마 그 모습이 천사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세처럼 에스더처럼 오늘 말씀의 스데반의 모습처럼 성령의 충만한 모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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