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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장막을 세우라! (대상 15: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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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장막을 세우라! (대상 15:25~29)

 
두 마리의 개구리가 연못 주변 풀밭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풀밭에 큰 양동이가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두 개구리는 양동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양동이에는 크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두 개구리 모두 크림을 좋아해서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으리만큼 배가 불렀습니다.
이제 양동이 밖으로 튀어나오려는데 크림이기 때문에 끈적끈적해서 뒷다리로 차도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도저히 양동이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자 큰 개구리가 먼저 포기합니다.
"그만둬.  우리는 여기서 나가지 못할 거야.  이곳은 희망이 없어.  우리는 갇힌 거야!"

그러나 작은 개구리는 낙천적이라서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 우리가 갇힌 것 같긴 해.  그러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때까지 계속 수영하지 않을래?  사실 우리는 개구리야.  우리가 잘하는 것은 수영 밖에 없어.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수영이나 하지 뭐!"

그래서 두 개구리는 수영을 하기 시작합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을 기다리면서...  잠시 후 큰 개구리는 또 푸념합니다.
"제 아무리 수영해 봤자 필요 없어.  우리는 이곳을 못 빠져나갈 거야.  나는 너무 피곤해.  더 이상 못하겠어."
작은 개구리는 말합니다.
"아니, 그러지마.  계속 수영해.  우리가 무엇을 하겠어?"

다시금 열심히 수영을 합니다.  몇 시간이 흘렀습니다.  큰 개구리는 수영을 하면서 계속 죽는 소리만을 냅니다.  결국 큰 개구리는 용기를 잃고 발을 멈춥니다.  마지막 숨을 쉬고는 양동이 밑으로 가라앉아 죽고야 말았습니다.  작은 개구리는 물끄러미 큰 개구리가 죽어 가는 것을 보더니 잠시 슬퍼하고는 또 다시 무작정 수영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시 몇 시간이 흘렀습니다.  거의 밤을 새웠습니다.  이제 동녘이 밝아 오려 하는데 무엇인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수영을 하는데 점점 더 뻑뻑해짐을 느낍니다.  크림이 굳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크림이 버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개구리가 맹렬히 수영한 결과 버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작은 개구리는 버터 위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결국 껑충 뛰어서 양동이를 빠져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개구리의 모습이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바로 "우리는 갇혔어!"라는 말일 것입니다.
 
갇혀 있는 사람들이 가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크림 안에서 지쳐서 가라앉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크림을 버터로 만들고 뛰어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의 사람은 사방으로 꽉 갇혀 있는 현실을 원망합니다.  지금 내가 노력해 봤자 이 어려운 난국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이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끊임없이 타령만 하고, 생각만 하다가 죽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의 사람은 현실의 차원을 넘어서 도약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현실이 한계에 부딪혀 있다면 이제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를 바라보며 새로운 세계를 쟁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를 훈련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에 눌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답답한 일을 당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놀라는 때는 하나님이 문을 두드리실 때가 아니라 문을 두드리던 노크 소리가 멈추었을 때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주님이 더 이상 노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인생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두려운 것은 주님께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우리가 문을 열지 않는다면, 통회하는 예배를 통해 천국의 창들을 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 마음이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허무함과 절망과 비참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드러운 노크 소리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그 노크 소리가 멈출 수 있습니다.  주님의 노크 소리가 멈추기 전에 우리는 그 노크 소리에 반응하셔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당신이 주님이 찾아오셔서 노크하실 때, 그 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과 나는 지금도 주님의 노크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환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하십시오.  뛰어나지도 않는 당신의 이성과 판단으로 몸부림치지 말고 그냥 주님께 기대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걸을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삶과 내 가정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종교적인 의식들을 내려놓으십시오.  종교적인 의식들은 사람을 지루하게 하고 짜증나게 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결국 종교꾼이 되고 맙니다.  종교꾼은 그의 삶이 평탄할 때에는 신앙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풍랑이 휘몰아치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에 그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마음을 세상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적인 의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적인 의식보다 영적인 갈망을 더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자 하는 갈망, 보기를 원해서 주님의 손길을 요청했던 바디매오의 영적인 갈망이 있다면 그곳에 성령님께서는 임재하실 것입니다.  정말 그분의 도우심을 향한 뜨거운 갈망이 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실 것입니다.  당신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장 확실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주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에 관해 책을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금 부흥을 주시는 그 분을 만나셔야 합니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내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을 기대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과거의 공허한 추억만을 부둥켜안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그분을 원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예수님을 그분의 능력과 생명과 아름다움과 영광 중에 보기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지금 나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옵소서.
지금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역대상 15장 1절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전을 세우고"
그런데 이 말씀이 시작되기 전인 역대상 14장 마지막 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

다윗은 수 많은 시련 끝에 임금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여러 강대국들을 다 무찔렀습니다.  나라가 평안해 졌습니다.  이제 그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고 장막을 세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절정을 누리고 있을 때에,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에,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나던가요?  여러분의 삶이 평안할 때, 행복할 때 하나님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윗의 변함없는 영적인 관심을 보십시오.  그가 왕이 되어 자신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아름다운 궁전 안에 살게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장막을 세우는 일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궁궐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둘 장막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다윗은 출세를 했습니다.  명성을 얻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막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기뻐하셨습니다.  다윗과 그의 가문을 축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의 장막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으로 만든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다윗의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가 평안하게 되고, 아름답고 좋은 궁궐에 거하게 된 다윗에게는 언제나 이 한 마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여호와의 언약궤를 내게로 가져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가정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도성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을까?"

그는 이 한 가지 열심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자신에게로 가져오는 첫 번째 시도는 웃사가 죽는 재앙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는 마음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한 운반 작업을 시작합니다.  레위인들과 예배자들과 함께 무려 25km나 되는 먼길을 걸어서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자신의 성인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는 힘을 다하여 전심으로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한 나라의 임금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이 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다윗은 한 가정의 아버지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셔야 합니다.
 
거룩을 가장한 거짓되고 가식적인 신앙을 하나님은 가장 역겨워하십니다.  자신의 이성과 판단과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십니다.  다윗처럼 자신의 체면과 이성과 판단을 다 내려놓고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가치 있게 생각하시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비슷한 시간에, 거의 같은 시간에 그의 아내 미갈은 하나님의 관점보다는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보다는 사람의 명성에 더 가치를 두었습니다.  사람의 체면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왕으로서의 체면을 깎는 것이라고 해서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태의 열매를 갖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관점을 무시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관점에 너무 충실하려고 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우리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할 때가 더 많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과 친밀하게 만난다는 것이 솔직히 어쩌면 어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무모하기도 하고, 어리석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더 좋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어떤 손해가 오고,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뻐하시고 그를 축복하신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에게 왕의 체통을 지키라고 따지는 미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앞으로 더 낮아져서 체면을 잃는 일이 많을지라도, 여호와 앞에서는 그렇게 되고 싶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생각하시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체면을 잃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것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주님 앞에서 당신의 체면을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의 체면을 지키면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미갈처럼 당신의 위엄을 지키면서 그분의 임재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위엄과 심지어는 영적인 품위도 내려놓으십시오.  내려놓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만지심과 도우심을 갈망하십시오.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긍휼의 샘이 솟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에 갈급함이 있다면 그 마음에 당신의 성막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 있든, 아니면 집안 거실에 앉아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굶주림으로 하나님께 외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을 갈망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  내 마음에 주님의 장막을 세우게 하옵소서!  내 가정에 주인되신 당신의 장막을 세우기를 원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현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그저 흥분하는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뜨거움으로 해서 흥분과 긴장감에 빠졌을 때에 그 예배는 최고의 예배였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흥분과 긴장감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일시적인 하나님의 임재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이상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기고 나서 모든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자신의 성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과 석 달 전에 언약궤를 옮기다가 웃사가 죽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생명을 건 발걸음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낮에 조심조심해서 언약궤를 옮기고 있습니다.  소가 뛸까봐, 언약궤가 흔들릴까봐, 그들의 몸과 마음은 온통 언약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25km나 되는 먼 길을 아주 조심해서 전심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왔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성에 옮겨왔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안도의 긴 한숨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쉬고 싶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두 다리 쭉 뻗고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다윗이 그들을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그들을 나누어서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도록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배자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다 놓은 곳은 아주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장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건물 자체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예배자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그의 집을 축복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의 열정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아름다운 건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천천의 수양과 재물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이 늘 뜨겁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뜨거운 불꽃이 피어있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 이 열정이 없다면 성령님을 모시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초라한 장막에 영광 중에 임재하셔서 그를 축복하신 중요한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의 기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중심에는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장막]의 저자인 토미 테니는 그의 책에서 유전병 때문에 심각한 비만에 빠졌던 그의 한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키는 기껏해야 170cm이지만 말 그대로 부피가 거의 키만큼 됩니다.  그는 12살 때 이미 130kg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을 체중과 씨름해 왔는데 한번은 그가 눈물을 흘리며 토미 테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날 비웃다는 걸 아네"
그 친구는 너무 체중이 많기 때문에 사회 생활에도 지장이 많았습니다.
 
그는 토미 테니에게 말했습니다.
"내게도 함께 만나는 걸 반가워하는 친한 친구들이 있지.  정기적으로 식당에서 만나곤 하지만 나는 그들 집에서 친밀한 교제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어."
그는 다시 울기 시작했고 굵은 눈물방울들이 볼 살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토미, 친구 집에 방문할 때 난 언제나 현관에 서서 모자도 코트도 벗지 않고 방안을 둘러본다네.  전에 가 본 적이 있는 곳이지.  난 결심한 게 있거든.  왜냐하면 지난번에 앉았던 의지를 부서뜨렸으니까.  그래서 내 몸무게를 감당할 만한 의자가 아니면 앉지 않는다네.  더 이상 난처해지기 싫거든.  부끄러움을 당하면서까지 방문하고 싶진 않거든.
 
그래서 나는 문간에 서서 방안을 둘러보는 거야.  그러면 친구들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로 '들어와서 앉게.  커피 한 잔 하자고'라고 말하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나는 거실과 부엌을 둘러보는 거야.  이번에는 내 몸무게를 감당할 만한 가구가 새로 들어온 게 있나 하고 말이야.  그리고는 아무 것도 새로 산 가구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때 '아니야, 난 지금 가봐야 해.  나중에 봐'라고 말하고 돌아설 때마다 얼마나 슬픈지 몰라.  그건 그냥 변명일 뿐이니까.  떠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집에는 내 무게를 감당할 만한 아무 가구도 없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에서 '영광'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카보드'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무거움, 내지 무거운 빛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무거운 영광이 우리를 방문하셨다가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만한 은혜의 보좌를 세우십시오.  오늘 이 시대 우리의 문제는 주님께서 앉으실만한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나에게 편안한 그 자리가 '카보드', 하나님의 무게에는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하루 종일 편안한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인 은혜의 보좌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고 그분이 오셔서 머무실 수 있도록 만드는 자리는 지상에서 은혜의 보좌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은혜의 보좌를 세우는 개인, 그 가정, 그 교회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안식처를 세운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찾으시면 하나님은 그곳에 오셔서 머무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머무실 은혜의 장막을 세우십시오.  다윗은 그 장막을 세웠습니다.  비록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초라한 천막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당신이 머무시기에 넉넉한 은혜의 장막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머무실 은혜의 장막을 세우는 일입니다.  내 안에, 내 가정에, 내 교회에 하나님이 머무실 수 있는 은혜의 장막을 세우면 그분은 오실 것입니다.  오셔서 그분의 방법과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축복하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는 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에서는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피 흘리는 희생과 땀 흘리는 사모함으로 구했을 때 예루살렘 위로 하늘이 열리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그분의 영광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머무실 수 있는 은혜의 장막을 세우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피 흘리는 희생과 땀 흘리는 헌신의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오늘 우리 교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찬양도 잠시 동안은 열정적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보다 적극적인 찬양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지 못하는 하나의 원인입니다.  아십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의 제물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요청할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은 장막을 세우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그곳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들을 세웠습니다.  그 예배자들을 본문에서는 문지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장막 문에서 문을 열고 있었던 문지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다윗이 오랜 기간동안 그 장막을 지켰을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의 창들을 이 땅 위에 열어두는 책임을 지는 문지기가 되라고 하십니다.  문지기가 되라는 말은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되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느낄 수 있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황무한 이 땅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이 강같이 흐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문지기가 되어 교회와 지역 사회 앞에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의 문을 열어 놓는다면 당신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아주 눈에 띄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오벧에돔입니다.  불과 석 달 전에 언약궤를 옮기다가 웃사가 죽었던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는 것을 멈추고 그것을 오벧에돔의 집에 두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오벧에돔은 바로 그 오벧에돔입니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장막에서 문지기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일회성으로 방문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집에 거주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마당에서 웃사를 죽게 했던 그 하나님의 언약궤가 자신의 집에 머물렀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이 불행이요, 저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위기라고 인식했을 때에 그는 하늘의 문을 여는 축복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에 거주하실 때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에 부수적인 유익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그의 농작물은 더 잘 자랐습니다.  아이들은 건강해졌습니다.  가정에는 평안과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그의 인생의 모든 것들이 놀랍도록 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인가 좋은 일들이 생기고 농사가 복을 받기를 석 달만 지나면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그 소문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왕에게까지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역대상 15장과 16장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다윗이 왕으로 다스리던 시절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한 사람이 그 언약궤를 따라 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오벧에돔입니다.  역대상 15장과 16장에 그의 이름이 6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역대상 15장 24절에 보면, 그가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사를 하자 오벧에돔도 이사를 했습니다.  역대상 15장 18절에 보면, 그는 언약궤를 옮기는 운반자로 그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주님의 임재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닥치는 대로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임재를 소망하십니까?  내 안에, 내 가정에, 내 교회에 주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이 나타나기를 정말로 갈망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임재를 위해서 여러분이 감당하셔야만 했던 희생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벧에돔은 자신이 언약궤의 문지기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단지 그의 가족들만 데리고 무작정 언약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아이들이 문지기가 되었을 때에 지금 누리는 것보다 30배, 60배, 100배, 아니 그 이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신의 가정에는,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의 가정과 교회와 이 땅 가운데로 들어오게 하는 문지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온 세상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도록 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예배의 자리에 설 때에 당신은 말 그대로 영적인 문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 문을 열고 서 있는 법을 배우십시오.  주님의 임재를 환영하고 경외하는 거룩한 방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삶 속에 그대로 적용해 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의 이성과 판단과 경험을 내려놓으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모든 불신앙들을 내려놓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발견한다면 절대 절대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실 장막을 세우십시오.  당신의 가정에 하나님이 거하실 장막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하늘의 문을 여는 문지기가 되십시오.
 
장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장막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당신의 장막을 세우라는 말은 당신 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를 내어드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가정에 임재하실 은혜의 보좌를 세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과 당신 가정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야곱이 형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가던 중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두려움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을 때 하늘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자신을 위하여 장막을 세웁니다.  그 순간 그는 인생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한 말씀은 분명히 기억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정을 통해 축복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당신 가정에 아브라함의 복을 주기를 당신보다 더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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