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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땅히 할 일 (살후 3:6~18) - 땀, 수고, 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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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할 일 (살후 3:6~18)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전도서 3장 11절은 말씀합니다. 

또한 잠언 16장 4절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도록 지으심 받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야지 악한 날에 적당한 모습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때를 따라 아름다운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라고 한 전도서 3장 12절로 13절의 말씀처럼  기뻐하며 선을 행하여야 하고 수고함으로 낙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기보다는 크고 작은 문제를 껴안고 힘들어 할 때가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악한 날에 적당한 악한 자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악한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참된 것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요 거짓 것을 참된 것인 줄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 오늘의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할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게 되면 마땅히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될 모습이 있는가 하면 결코 본받아서는 아니 될 그런 모습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일하기를 싫어하는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일하기를 싫어하는 형제들을 멀리하십시오. 게으름을 피우며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전한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광야 길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백성들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굶겨죽일 작정이냐 도무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살란 말이냐 외쳐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뜨기 전에 만나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가 뜨고 나면 만나가 다 녹아버려서 더 이상 거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나를 거두려면 부지런해야 했습니다. 

사실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이 땅에 지으시고 주셨던 말씀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 쏟아야합니다. 그것이 인생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범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은 또 무엇이었습니까?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서는 결코 먹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또 주셨던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땀 흘린다고 하는 것은 단지 힘들게 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즐겁게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이른 새벽부터 그렇게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새벽 오히려 해 뜨기 전에 거두라고 하신 것도 이른 아침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일을 하게 될 때 우리 몸이 더욱 건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밤이 되고 아침이 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둠으로부터 밝은 광명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의 양식을 위해서 이런 수고를 함으로써 결국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건강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게으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가 뜨고 난 다음에 양식을 거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결국 굶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 바울이 우리가 전한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땀 흘려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을 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결국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따르지 않는 거기에 무슨 질서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모든 것이 엉망일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사람이 잘 된다면 이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쉬운 일만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3절로 14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쉬운 길이란 멸망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큰 믿음을 달라고 합니다. 복을 받아 누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를 거두는 것처럼 해뜨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요 그것이 말씀 안에서 자라 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말씀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따르게 되고 복된 인생길로 나가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하기를 싫어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요 일은 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막상 앞서서 수고하는 이들을 보면서 잘했네, 못했네 하며 감 나라 배 나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어떤 여인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릴 때 이를 보고 화를 내며 왜 그것을 가져다가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그렇게 낭비하느냐고 하는 제자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자기들이 먼저 그렇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은 전혀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수고하는 사람을 보고 오히려 더 좋은 길이 있는데 어리석게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일하는 소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일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 하는 것조차 이러쿵저러쿵해서 하지 못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먼저 본이 되도록 한다면 그래도 할 말이 있겠지만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수고하는 이의 기나 꺾어버리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하기를 싫어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혹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는 아닌지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는 내 일이 아니라고 너무도 쉽게 남의 말들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잘하네 못하네 하고 쉽게 말은 하지만 그럼 내가 한다면 더 잘할 수 있던가요? 설사 내가 더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나보다 못한 사람도 나만큼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한데 그것도 아니면서 시시비비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찌 하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수고하는 이들을 볼 때 우리는 박수를 쳐주어야 합니다. 잘 한다 잘 한다 하면 더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툴던 것도 계속해서 하다보면 익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라도 처음보다는 나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윽고 그 방면의 전문가의 수준까지 올라가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남의 말이라고 쉽게 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먼저 수고하고 내가 모든 일에 격려자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먹고 싶으면 일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을 하다보면 잘못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반복하고 다시 반복하다 보면 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성의도 없이 건성으로 한다면 하기 싫어서 몸을 비비틀어가며 억지로 한다면 아무리 반복해서 한다고 해도 결코 익숙하게도 되지 않을 것이고 온전하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왕 하는 일이라면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점에서 성도들의 본이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여 준 모범을 통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양식을 먹게 될 때에도 우리는 늘 값을 치렀습니다. 여러분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밤낮으로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여러분 스스로 자기 생활을 꾸려 나가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또 일했고 합니다. 물론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 성도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생활을 꾸려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성도들 역시 다른 사람의 도움만 바라지 말고 스스로 자기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수고하여도 자기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편지를 통해서는 친척 중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힘써 그들을 돕도록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울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저 그들의 도움만 바라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들 가운데는 이렇게 도움만 바라고 있는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밤낮으로 온 힘을 다해 수고하고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는 죽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의 부족한 부분도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는다던가 아니면 잠시 실직 상태가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알게 된 사람이 먼저 그 사람이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도움만 바라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일어서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될 줄로 믿고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 된다고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고백하며 그런 나를 주님이 도와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 그 믿음을 주님이 보십니다. 그 믿음을 주님이 도우십니다. 그 믿음대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재산을 다 잃도록 병 고치고자 애썼지만 낫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병 낫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을 때 이 여인은 속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내가 나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뒤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즉시, 그 여자의 병이 나았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병도 낫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될 때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았던 이 여인처럼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의 길이 열려질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오늘 밤낮으로 수고하고 애써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고 힘써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전도서 3장 13절은 “이처럼 하나님의 선물은 사람마다 먹고, 마시고, 자기의 수고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탄식하며 일하는 자가 아니라 먼저 내가 먹고 마시고 일할 수 있다는 그것으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로 하여금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심은 그대로 거둔다고 했으니 기쁨으로 심고 기쁨으로 거두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고자 하며 땀 흘려 수고하며 그 모든 수고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선한 일을 하는 동안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문제만 만드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상처가 되게 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러는지 몰라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후벼 파서 상처를 안겨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꼭 그 사람이 악해서만이 아닙니다. 꼭 그러려고 해서만도 아닙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상처만 안겨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한숨밖에 안 나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예수님께 사사건건 시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상처만 주는 사람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차라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그런다면 그 사람이야 보잘 것 없는 사람이니까 하고 무시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열심도 있고 앞장서서 수고하는 사람 가운데서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겠습니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사 누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준다고 해도 우리는 수고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힘을 내서 수고해야 합니다. 왜요? 이렇게 우리 마음에 상처를 주어 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그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를 그토록 시비했던 것입니까? 자기들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잘난 그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들 마음에 예수님이 못마땅하게 생각되도록 만든 악한 세력이 있음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잘 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예수에 대한 비판이 잘 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어서 상처가 될 바에는 조금 떨어져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들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 때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내게 상처를 주는 그 사람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결코 그들과 맞서서 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들을 원수처럼 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형제로서 충고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에도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처럼 그와 일대 일로 만나서 조용히 충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두 세 사람이 힘을 모아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금 그를 권면할 것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온 교회가 함께 합심해서 기도함으로 그 사람을 바로 세워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용히 그 사람도 상처가 되지 않도록 먼저 일대 일로 권면하는 일이 앞서야 하는 것이요 그를 위해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 평화의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들에게 평안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됨으로 주 예수님이 언제든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어 데살로니가 전후서 두 편의 편지를 보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격려도 하며 또한 권면도 했습니다. 그것도 친필로 이 편지를 쓰고 있노라고 합니다. 그만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바울은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시고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도록 힘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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