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것이 제대로 된 믿음! (약 2:14~26) - 행함

  • 잡초 잡초
  • 331
  • 0

첨부 1


이것이 제대로 된 믿음! (약 2:14~26)
 

1. 믿음 그 이후 

믿음은 여러분이 바라고, 소망하고, 꿈꾸고, 기도하는 것의 확신이자 실상입니다. 즉 믿음은 여러분이 바라는 것, 소망하는 것, 꿈꾸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 반드시 그대로 될 줄로 확신하는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을 이뤄진 것으로, 즉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이나 혹 볼 수 없는 것들의 증거를 소유하는 것이고, 보지 못한 것을 믿지 못하고 볼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이나 사람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지난주 설교의 요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삶과 인격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믿는다”고 할 때, 그 말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는 것, “믿는다”는 것은 믿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일, 어떤 결과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늘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그의 생활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십자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또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가 성도를 해치는 것임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죄가 될 만한 것을 피하는 사람, 거룩하고 정결하게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곧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바르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의 허무함과 인생의 욕망이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세상의 화려함이 주는 유혹과 자신의 욕망을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다 공급해줄 줄 믿는다’는 사람은 의식주 문제에 대한 걱정과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 이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며,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증거 되며,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요? 신자란 그가 가진 믿음이 그의 행동을 이끄는 사람이며, 그 믿음이 남다른 삶의 결과를 낳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이 실제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 죽은 믿음 

혹자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믿음과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다르다고 지적합니다. 심지어는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의 정의가 잘못되었다고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믿음은 다음의 이유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아직 복음을 확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이미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자신의 편지 속에서 믿음에 관해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요,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야고보는 ‘당신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신이 주 예수를 믿는 자라면, 행동으로, 삶으로 그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먼저 잘못된 믿음의 모습부터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 “죽은 것”, 19절에 ‘귀신들의 믿음’, 그리고 26절에 한 번 더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 “죽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뜻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죽은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는 것이죠. 

마가복음 1장에는 귀신들의 놀라운 믿음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 사람 속에 있던 귀신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군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마가복음 3장 11절에는,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무덤 사이에서 지내던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軍隊鬼神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5:7)” 즉 귀신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성자이심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귀신들은 사람이 죽은 후의 세계, 즉 사후세계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 31절에 보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귀신이 예수님께 간절히 부탁한 말입니다. '무저갱'이란 지옥의 다른 표현인데요, 이 말을 보면 귀신이 지옥을 겁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고 있습니까? 현대의 신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후세계, 특히 지옥의 존재를 믿고 있는 귀신은 신학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보다, 지옥을 믿지 않는 교인들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진 것 같지 않습니까? 

이상, 마가복음 1장, 3장, 5장, 누가복음 8장 등에 등장하는 귀신들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이 본문들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아직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하기 전이라는 것이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거나 인정하거나 그렇게 대접해드리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귀신들은 하나님도 알고, 성자 예수님도 알아보고, 죽은 이후의 세계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렇지만 여러분,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까? 어느 누구도 귀신들의 믿음을 믿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귀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주님께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주님께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아는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아는 것으로만 끝나는 신앙, 그것이 귀신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귀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떨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귀신들은 벌벌 떨면서 주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벌벌 떪에 따르는 전인격적인 사랑과 존경과 행동이 없었기에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미국의 유명한 외줄타기 곡예사인 Blondine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블론딘이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줄을 매고 줄을 타게 되었습니다. 미국 쪽에서 캐나다 쪽으로 먼저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줄을 타기 전에 운집한 군중에게 스피커를 통해 소리쳤습니다. “제가 장대 하나만 들고 이쪽에서 저 캐나다 쪽으로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때 많은 관중은 입을 모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정말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맨 줄을 막대 하나로 균형을 잡아가면서 무사히 건넜습니다. 손에 땀을 쥐고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면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블론딘이 성공하자 우레 같은 박수로 환호했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 쪽에서 미국 쪽으로 건너 올 차례였습니다. 그때 블론딘은 사람들에게 또 다시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작은 손수레를 제 몸에 걸고 건너려고 하는데 성공하리라고 믿습니까?" 관중들은 "믿고말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블론딘은 그의 몸에 수레를 걸어 수레가 자신의 등 쪽에 달리도록 하여 장대를 들고 폭포 위를 건너는데 성공했습니다. 관중들은 흥분해서 수건과 모자를 던지며 환호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블론딘은 엄청난 제의를 하나 더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으로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줄을 타고 건너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제 등 뒤의 손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건너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성공하리라고 믿습니까?" 그랬더니 두 번씩이나 성공한 그가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모든 관중은 박수를 치면서 "예, 믿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딘이 관중 속에 있는 용감해 보이는 한 청년에게 가서 "자, 타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면서 "아니요, 아니오!"라고 하면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이나 블론딘에게 전폭적인 박수갈채와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순이 무엇입니까? 참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행동과 삶이 따르지 않는 믿음, 즉 지식만의 믿음이나 감정만의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귀신들의 믿음이나 그보다 더 못한 것으로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3. 살아있는 믿음 

이제 야고보는 죽은 믿음과 반대되는 살아있는 믿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두 가지 예를 듭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창세기 22장의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양이나 다른 희생 제물들처럼 제물로 제단에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직접 짐승처럼 죽이고 피를 다 뽑은 후 고기를 각 떠서 제단에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잔인하기 짝이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척 한 것이 아닙니다. 흉내만 낸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렇게 잔인하게 빼앗아 가시느냐?’ 든지, ‘약속의 자녀라며 주신 아들, 늦둥이도 이런 늦둥이가 없을 텐데 이렇게 바치라고 하실 것이면 주지나 말지, 왜 이제 그 아들을 제물로 달라고 하느냐?’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데려가실 자도 여호와시라’는 것을 알고 묵묵히 순종할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순종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기생 라합의 예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 동안 어떤 일을 해 오셨는지, 그리고 여호와께서 앞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실 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과 앞으로 하실 일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믿음 때문에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주는 모험을 했고, 그 정탐꾼들에게 이스라엘이 반드시 이길 것이며, 그 승리의 날에 자신과 가족들을 살려달라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만약 라합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으로 그쳤다면, 그에 따른 행동이 없었다면,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여리고 사람들과 함께 죽었을 것이며, 그랬다면 예수님의 조상의 족보에도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라합은 믿음을 가졌고,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서 그녀의 믿음은 정탐꾼들에게와 하나님에게 증명되었습니다.

왜 오늘 본문이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은 행동이 따르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착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지를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적 동의일 뿐이지요.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는 믿음으로 쳐주지도 않는 것입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처방을 듣는 것으로 병이 낫지 않습니다. 그 처방대로 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주의를 기울여 생활할 때 비로소 병이 낫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좋은 설교를 하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느끼도록 권유하는 것은 설교자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 진정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과 지식은 행동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행동하지 않는 꿈과 이상은 공상이요 망상이듯이 믿음도 행동이 없을 때 헛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행함도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에 의해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행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4. 온전한 믿음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의 모습은 어느 쪽입니까? 말과 고백, 행동과 실천, 이 둘 중에서 여러분의 믿음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요? 말과 고백입니까? 아니면 행동과 실천 쪽입니까? 여러분은 예배와 교회 안에 국한된 믿음을 가진 분들입니까? 아니면 가정과 삶의 현장, 즉 교회 밖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쪽입니까?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행함(doing)”보다는 “됨(being)”을 중요시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말이고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낳을 수 있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정적인 요소, 즉 내적이고 영적인 것으로만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됨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동으로, 즉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죽은 믿음을 참 믿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행동이 없고 삶이 없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과 가정 밖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이번에 경험한 중국 교회의 재미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조선족 교회는 조금 엄숙하고 냉랭합니다. 반면에 한족(漢族) 교회는 아주 뜨겁고 좀 시끄럽습니다. 이번에 저와 함께 강의를 한 서울에서 시무하시는 모 목사님께서 수요예배 때 한족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들의 너무나 뜨거운 찬양과 기도에서 감동을 받은 목사님은 설교 중에 “이렇게 뜨겁고 열심인 여러분들 가운데 십일조를 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됩니까? 손들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몇 사람이 손을 들었을까요? 달랑 두 사람이 손을 들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주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것 같은데, 실제 생활에서의 헌신, 물질과 시간의 헌신은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현주소였습니다. 한족들에 비해 경제력이 많이 부족한 조선족 교회가 겉으로는 다소 식어 보여도 봉사와 전도와 헌금은 10배 가까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믿음이란 행동을 포함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동으로, 인격과 삶으로 그 믿음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될 수 있으면 말은 줄이고 행동으로 모든 것을 나타냅시다. 저 또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우리 당회원들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당회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안수집사, 행동으로 보여주는 권사, 행동으로 보여주는 집사와 직분자들이 됩시다. 이제는 말할 때가 아니고, 이제는 단순히 신앙고백만 하거나, 듣기만할 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행동하고 움직일 때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대로 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삶이 따르는 믿음, 온전한 믿음을 가지셔서 아브라함과 라합처럼 칭찬받는 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