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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번의 만남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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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만남 (눅 24:13~35)


본문에는 글로바라는 자와 다른 한 제자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슬픈 빛을 띠고 낙망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 엠마오라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좌절과 실의에 차 있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의 모든 좌절과 패배감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좌절의 늪에서 실패를 안고 제자들처럼 ‘내려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왜 실의와 좌절에 빠져 패배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과 또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그 삶을 반전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둡니다. 

본문은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진정한 만남인 새로운 만남은 제자들에게 새 삶을 안겨주었습니다. 

  
1. 눈이 가리워진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이후에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약 25리 정도 떨어져 있는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있는 그들과 동행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자신들과 동행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눅 24: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는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지 정작 부활하심으로 그들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는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무엇이 그를 가리고 있어서 계속 그 인지 알아보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거나 완전히 아는 것에서부터” 떠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에 대하여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눈이 ‘고정되어 변동이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눈이 가리워져 있는 자들은 새로운 영적인 인식을 가지기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생각이나 자세가 고착되어서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서 역동적인 삶으로의 변화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자신이 가진 과거의 의식이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롭고 획기적인 차원의 의식변화 또는 영적인 대각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이전에 생각하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영적인 영맹(靈盲)에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한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원수인 로마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오심은 정치적 메시아의 강림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하시는 영혼의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하거나 믿음을 자신의 선입견과 자기 기준에 따라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으려 합니다. 

이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변화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지금 예수님이 옆에서 동행하는 이런 외적 만남을 통하여 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IMF 이후 우리 사회는 국제화 된 새로운 의식과 선진화 된 시각으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똑같은 사물이라도 예술가의 눈으로 혹은 전문가의 눈으로 보는 것은 일반인의 눈으로 보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늘 시험과 낙망 속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한층 더 발전된 신앙생활이 요구됩니다. 


2.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

그들은 지금 동행하고 있는 자가 예수님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약함을 탄식하셨습니다. 여기에 ‘미련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다’는 뜻이며, ‘마음에 더디 믿는 자’라고 한 것은 탄식의 어투로 강하게 꾸짖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하여 일어난 모든 일이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에 이미 기록된 예언의 내용임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성경 말씀을 들으며 큰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 큰 장애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유숙하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자 예수님과 같이 있기를 부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저들의 눈이 가리워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눅 24: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여기의 ‘강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의 뜻은 ‘압력을 넣어 강제로 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것에 절박한 간청으로 봄이 적절합니다. 예수님이 글로바의 일행과 함께 엠마오에서 머물게 된 동기는 그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어떤 자의적 깨달음이나 발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뜨거워짐’이었습니다. 저들을 새로운 감동과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성의와 안일함으로 우리들 가운데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고 그냥 가시게 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할 것입니다. 마음에 큰 감동이 일어나도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차디차고 닫혀있으며 강퍅하고 무관심한 마음에 어떻게 새로운 영적 시각이 열리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마음의 진한 감동, 진리와 학문의 깨달음에 오는 희열, 스포츠 맨 혹은 예술가들이 경험하는 무아지경에서의 새로운 발견 혹은 몰입현상 등은 위대한 사랑과 발전 그리고 놀라운 새로운 경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3. 두 번의 만남 

늘 함께 있던 사람도 면전에서 알아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발견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길을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왔을 때에 그냥 보통 사람인 줄 알았고 그냥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저녁 만찬을 하는 중 눈이 열려지게 되어 부활한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여기서 ‘밝아졌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열다’(διανοίγω, 디아노이고)의 과거 수동형으로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이 외부에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비적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이 함께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것은 갑자기 일어나기보다는 점진적으로 서서히 열리면서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καίω, 카이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리적인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의 성령의 이끌림을 통한 감동적 기쁨과 황홀케 하는 초월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 뜨거워졌다’는 것입니다. ‘풀어준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즉 말씀을 점차 깨닫게 되면서 점점 뜨거워지다가 어느 순간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입니다.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 아닌 말씀을 탐구하는 자세입니다. 성령은 말씀 속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 속에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말씀에 귀가 열려도 영적인 눈을 뜨게 되기는 쉽지 않는데, 더구나 귀를 막고 있다면 눈을 뜨기는 더욱 불가능한 것입니다. 

로마의 중대장 고넬료의 집에 모여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말씀은 성령을 실어 나르는 그릇과 같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듣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행 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활력과 확신 그리고 충전 된 기쁨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우리도 역시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목사는 영국 웨일즈 태생의 선교사입니다. 그는 1863년 6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 소속으로 중국 상해로 선교사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미국의 상선 ‘제널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배는 국왕을 만나고 통상의 허락을 얻으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배는 대동강을 한강으로 오인하고 내륙으로 항해하다가 좌초되고, 군사들의 공격으로 불에 타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배에서 나와서 성경을 전하고 군인들에 의해서 참수되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토마스 목사에게 칼을 들어 목을 친 박춘권은 던진 성경을 가지고 가서 읽게 되었고. 후일에 회개하여 세례받고 평양에서 초대교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새로운 만남을 통하여 대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결 론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단숨에 달려가 자신들이 체험한 사실을 열 한 사도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두려워하여 숨어 있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진정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큰 기쁨을 가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좌절과 실의 빠져 내려가는 성도들을 격려하시고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삶의 대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려오던’ 길을 거슬러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지면서 두 번째 만남을 통하여 그들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영안이 뜨이고 학문과 예술의 눈, 사업과 경영의 눈이 떠지면 인생의 대 전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습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에 맞는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만남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패배의 삶이 아니라 승리로 이끄는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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