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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 말라 (욥 3:25~26) -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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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욥 3:25~26) 

담장을 쌓고 문을 닫는 것은 도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두려움은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포기하게 하고 담대함을 갉아먹습니다. 두려움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합니다. 뒤로 물러서다가 침륜에 빠집니다. 물에 빠져 가라앉아 완전히 파멸하게 하는 것이 침륜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입니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은 욥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그는 부자였고 아내와 7남3녀를 둔 다복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일컬어 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이 약합니다. 두려움, 무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약점하나가 그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잃게 했고, 마지막에는 몸까지 병들게 했습니다. 


󰊱 누구나 두려워한다. 

석가는 “목숨이 있는 자는 모두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어린아이는 우레에 겁을 먹고 심약한 자는 협박에 떱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요10:10)입니다. 두려움은 욥의 재산을 모두 앗아갔습니다. 양이 7천, 약대 3천, 소5백, 암나귀 5백이나 되는데 불태우고 강도들이 와서 종들을 죽이고 빼앗아 갔습니다. 재산도 자식도 모두 잃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 하였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일반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겉보기에는 담대해 보이고 성격이 활발하지만 그것이 곧 담대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도 두려워 한 것이 나타납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창15:12) 

그가 애굽 땅으로 내려가면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원컨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창12:13) 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 같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모세도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한 자였습니다(행7: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말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바로왕 앞에 설 수 없다며 대인 공포증이 그를 얽어매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심히 떨었노라, 사시나무 떨듯했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떠는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지난달에 동산지기들과 에버랜드에 갔었습니다. 재미있는 놀이 기구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무서운 코스는 피하고 누구나 가는 곳으로만 피해 다녔습니다. 흐르는 물을 타고 45도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오는데 아내를 앞에 태우고 저는 뒤에 탔습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한 일은 아닙니다. 내려오는데 물이 얼굴로 튈 것 같아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처박고 내려왔는데 그 장면이 사진으로 찍힌 것입니다. 집사람은 뭐 그리 좋은지 활짝 웃으며 내려오는 것이 찍혔습니다. 그 사진보고 누가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 무서워서 숙였죠?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안 믿어 주는 것입니다. 아마 내 속에 숨겨져 있는 두려움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이야기하는 겁니까? 나도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 기도로 물리쳐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두려움은 시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저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걷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도하면 됩니다. 다윗도 두려움이 있었지만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울 때 간구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두려울 때 기도하지 않으면 두려움에 굴복당합니다. 

다윗은 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불안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기도 때문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91:1) 다윗은 기도하며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였다”고 했습니다(욥22:10). 침범이란 다른 사람의 권리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친구가 볼 때 두려움이 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있을 때 두려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루즈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될 것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정탐꾼 열두명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탐지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들은 강하고 신장이 장대한 아낙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9-10)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목이 달아날 판인데도, 베드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약한 사람은 끊임없이 두려움의 공격을 받습니다. 두려움은 위협에 굴복하는 사람들에게 은밀히 역사 하는 영입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7)고 하십니다. 두려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기도가 필요하고, 들어온 두려움을 추방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세요. 두려움을 물리치세요. 계시록에는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 간다고 했습니다(계21:8). 기도하면 두려움의 영이 물러갑니다. 담대한 영이 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좇아 내 달라고 요구했으나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갔더니 내 쫓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두려움을 막아낼 수 있고 좇아낼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 말씀으로 무장하라.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있구나” 무서워하는 일이 자기를 고난에 빠뜨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무서움에 사로잡히면 무력해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순간 물에 빠졌습니다(마14:30). 물을 무서워하면 물에 빠지고 병을 무서워하면 병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두려움은 노예로 만드는 영입니다. 양자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담대하게 하는 영입니다(롬8:15).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경험하는 일로 컴퓨터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게 되면 프로그램이 모두 망가져 버립니다. 그동안 수고해서 작업한 파일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도 바이러스 한방이면 모두 무너집니다. 두려움은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두려움의 공격을 방어할 진지를 구축하고 빈틈없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0-12)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전신무장을 하면 두려움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권 13개국 군대와 전쟁을 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 다얀 장군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지금 우리 군대는 막강한 최신 무기로 무장되어 있다. 우리는 이 무기로 아랍군대를 몇 시간 내에 물리치겠다” 이 성명이 발표되자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신무기를 개발한 것이 아닌가하고 긴장했습니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입니다. 전쟁 후 다얀 장군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스라엘의 무기는 불타는 애국심이었다.” 이스라엘은 전군,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무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가진 단창도 갑옷도 없었지만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으로 무장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여호수아의 승리도 말씀의 무장으로 얻은 것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성경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소리내어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잘 지키면 하는 일이 잘 되고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6)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위하는척하면서 해치는 우리의 적입니다. 두려움의 정체를 파악하고 방어하고 공격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우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포기하게 합니다. 두려움에 공격을 받으면 패자가 되고 맙니다. 욥과 같은 의인도 두려움의 공격을 받고 비참하게 쓰러졌습니다. 두려움과 맞서 싸울 무장이 필요합니다. ‘아니오’ 이 말을 왜 못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왜 맞서서 싸우지 못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왜 타협을 하려고 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담대해진다면 ‘아니요’라고 할 것입니다. 맛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립니다. 뒤로 물러서면 침륜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리라”(요일4:1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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