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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남 (요 4:1~10) - 수가성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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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요 4:1~10) 


요한복음에는 첫 장에서부터 물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죠?
요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무엇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 ‘물과 성령으로!’
요한복음 4장,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사마리아 땅,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 물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생명의 물이 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온갖 병자들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소개가 되고 있어요.

물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귀한 것입니다.

지난 주부터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또 한 차례 물난리들을 겪게 되겠죠?
그러나 물이 없으면 우리 인간들은 잠시도 살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홍수가 나고, 둑이 터져서 물에 떠내려가기도 하고, 한 때는 물대포를 맞아서 고막이 터진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물은 잘 써야 됩니다.
그래서 치산치수(治山治水)라는 말도 있잖아요?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물의 의미는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영원토록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마음껏 마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아주 소중한 만남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분들이 누구예요? - 바로 부모님들이죠?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각각 결혼할 배우자들을 만나게 되고요, 우리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이웃들을 만나게 되고,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을 만나게 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당을 만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고객들을 만나요.

저는 목회자로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만났고요, 성도님들은 정말 잘 생기고 똑똑한 저를 목회자로 만나셨습니다. - 아멘입니까?

이런 여러 가지 만남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일컬어서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 하나 잘 만나서 팔자 고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잘못 만나서 평생토록 신세 망치고 사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만남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왕에 만난 사람들은 어쩌란 말이냐? - 뭘 어쩌겠어요? 
만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열심히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야죠.

노인대학에서 어떤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면서 거기 계신 할머니들께 여쭈어 봤대요.
“여기 계신 할머니들 중에서 이 다음에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내 영감님과 같이 살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손들어 보세요!” 
그랬더니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더랍니다.

그런데 저 뒤쪽에 앉아계신 할머니 한분이 손을 번쩍 쳐드시더래요.
“아이고,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영감님을 잘 만나신 모양이군요? 어쩜 영감님이 얼마나 좋으시면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영감님과 같이 사시겠다고 하세요?”

“목사님! 내가 우리 영감하고 같이 산 것이 벌써 60년이 넘었는데,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어떤 놈하고 살아도 그 놈이 그 놈일 것 같아서 그래요.”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다 거기서 거기일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정말 꼭 만나야 될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누구예요?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입니다.
수많은 만남 가운데에서 가장 귀한 만남이 바로 우리 주님과의 만남이에요.
이 세상에서 누가 뭐래도 우리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인 줄 믿습니다.

그거 보면 우리 사랑하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을 만난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잘난 신랑요? 그거 별 거 없어요.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다섯 번째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그러죠?
이렇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정말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주전 721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거든요.
그때 앗수르 사람들이 혼혈정책을 써서 강제적로 이방인들과 피를 섞이게 했습니다.
그 후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다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되었고 수치스러운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이 여인은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셨을 때에 이 여인이 뭐라고 그랬어요? -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그랬거든요.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하시는 말씀이, “맞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맞는 말이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 맞다 아이가?”
여인에게는 정말 부끄러운 신상 공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마다 이렇게 설교를 하시더라고요.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워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 더운 한 낮에 물을 뜨러 온 것이라고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그랬어요.
물론 성경 어디에도 그런 해석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나름대로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이 여인은 남의 눈이 부끄러워서 그 시간에 나왔다기보다는 워낙 아침잠이 많아서 늦잠을 자다가 그 시간에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이 여인은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도덕적인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다섯 여섯이나 되고요,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제 남편이 아닌데 무슨 남의 눈치를 볼게 뭐가 있겠어요?
부끄러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는 여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는 여자예요.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여자들 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여자가 별로 없어요.
뭘 하고 다니는지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일어나는 게 보통입니다.
그래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아요.

오늘도 새벽 기도에 많이들 나오셨는데, 아침 형(型) 인간이 좋은 거예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렇게 우리들처럼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생활 습관이 그렇고, 생활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요즘 말로 하자면 무슨 밤무대를 뛰는 건지, 어디 무슨 야간 업소엘 나가는 건지 아무튼 사생활이 무척이나 복잡한 여자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대여섯이나 되죠.

그런데 이렇게 맘 편하게 살면 참 편하고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무절제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하고 살면 살수록 더욱 더 공허하고 피곤하고 인생이 점점 더 끝없는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해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갈 때까지 다 간 거예요.

이렇게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만나주셨습니다.
3절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 땅을 떠나서 갈릴리로 가시는데 하필이면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서 가셨다는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너무 너무 미워하고 경멸했기 때문에 그 땅을 밟는 것조차도 더럽다고 여겼었거든요.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요? 어림도 없는 얘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땅을 지나서 갈릴리로 올라가고 계셨던 겁니다.
그 때 시간이 유대인들의 시간으로 제 6시라고 했으니까 지금 우리 시간으로 하면 낮 열두 시 정도, 딱 지금 이맘 때 정도의 시간이겠네요.
여러분들도 출출하시죠?

오늘 점심은 구수한 된장국인데요, 교회에서 같이 밥을 먹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한 상에 둘러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는 거잖아요?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내려갔다고 8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뜨거운 햇볕에 지치셔서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계셨습니다.
그 때 마침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을 뜨러 온 거예요.
참 타이밍을 잘 맞추셨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으셨습니다.
“내게 물 좀 주시오!”

여인이 깜짝 놀랐어요.
“아니 세상에 당신은 보아하니 유대인 같은데 나같이 천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니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거든요? 
더구나 여자들은 사람으로 취급도 안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셨던 거예요.

누구 하나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천하디 천한 나에게 찾아오셔서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시는 겁니다.
“너, 나에게 물 한바가지 떠 주지 않겠니?”

예수님의 사역을 보세요!
오죽하면 서른 살 밖에 안 된 사람을 보고서 쉰 살 정도로 보았을까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우리 예수님은 쉬시지도 못하시고 식사도 거르시고 밤을 새워서 기도하시면서 그렇게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하셨겠어요?
누구 하나 예수님을 돌봐드리는 사람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시면서 그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양으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물 한바가지 떠서 드릴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내게 물을 좀 다오!”하셨을 때에 그 분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면 어디 물 뿐이겠어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을 겁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겸손하게 드렸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마디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이 뭐예요?
“내가 목마르다.”(요19:28)

아마 지금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신다면 똑같은 말씀을 하실 거예요. - “내가 목마르다!”
누가 우리 예수님께 기꺼이 물 한바가지 퍼드릴 분, 여기 안 계세요?

오늘 우리에게 와서 구걸하는 그 사람이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우리들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저 북한 동포들이 오늘날의 또 다른 예수님일 수도 있어요.

사실 그 사람들이 무슨 예수님이겠어요?
그러나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마10:42)

왜 그래요? 
소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우리 주님께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0절 말씀에 예수님께서도 그러시잖아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사마리아 여인은 두 가지를 몰랐어요.
한 가지는 우리가 받게 될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몰랐고요, 
또 한가지는 자기에게 지금 물을 좀 달라고 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몰랐던 거예요.

우리가 주님 앞에 받게 될 선물이 뭐예요?
영원하도록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 곧 생수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육신의 물은 한 시간만 지나면 또 목이 마르고, 갈증이 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거 물 한 바가지 퍼드리고 영원한 생명의 샘물을 선물로 받게 된다면 그거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걸 왜 못 하나요?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르니까 못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보세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걸 몰랐으니까 그랬지, 나중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서는 동네로 뛰어가서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거든요.
처음에는 예수님을 그저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만 알았습니다.(요4:9)
그러다가 나중에 15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는 29절에 가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면 그까짓 거 물이 문제겠어요?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뭔들 못 드리겠습니까?

지난주에도 그랬고, 이번 주에도 그랬고…
우리 집사님들이 교회에 나오셔서 청소를 하시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말이죠. 
장마가 와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얼마나 귀찮고 불편해요?
그래도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도록 미리 나와서 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기쁨인 줄 믿습니다.

하 집사님과 김 선생님, 그리고 민 집사님은 매주 마다 아름다운 꽃꽂이로 주님을 섬기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받을 선물이 있는 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신 분이 누구이시지 우리가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받을 선물이 뭐예요? -영원토록 흐르는 생명수입니다.
우리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신 분이 누구세요? -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옛날에 어떤 여자가 살았었대요.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과거에 무려 여섯 명의 서방님을 모시고 살았었다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첫 번째 남편은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미(美)서방님이었답니다. 
그런데 잘생긴 것은 한 순간에 지겹고 재미가 없어서 싫증이 나버리더래요.

그래서 두 번째 만난 남편은 술 잘 먹고 놀러 다니기 좋아하고 만담 잘 하는 허(許)서방을 만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허구 헌 날 먹고 놀기만 하다보니까 가산만 탕진하고 가난뱅이가 되어버렸더래요.

그래서 세 번째 남편을 얻었는데, 돈이 많아서 주체를 못하는 쇠금 자, 김(金)서방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안 되는 것도 있더라나요? 

그래서 네 번째 남편으로 세상의 권력을 다 쥐고 있다는 권(權)서방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권세만 있을 뿐 생각보다 무식하고, 이 권력이라는 것도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덧없이 꺼져버리고 말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섯 번째 남편으로 대학교수인 문(文)서방과 결혼을 했다죠?
하지만 이 양반은 허구 헌 날 무슨 이해도 안 되는 어려운 말로 만날 이론 타령이나 하는 바람에 지겨워졌습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남편으로 평범한 현실주의자인 지금의 현(現)서방을 만났다는데, 매일 매일 알 수 없는 어떤 갈급함으로 미칠 지경이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갔다가 일곱 번째 남편으로 예서방을 만났대요. 
오 ... 그런데 이 예 서방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는 거예요.
그 분에게는 사람을 지치게 하거나 귀찮게 하거나 목마르게 하거나 실망을 시키거나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더래요. 
그 예 서방이 바로 예수님이라지 뭡니까?


노사연이 불렀습니까?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만나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게으르고 나태한 우리들을 일부러 찾아와 주셨습니다.

남들은 모두 다 일찍 나와서 우물의 물을 퍼 갔는데, 밤새도록 딴 짓만 하다가 한나절이나 되어서 뒤늦게 일어나서 물 뜨러 나온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분을 오늘 이 시간에 새롭게 다시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영원한 생명수를 선물로 받아 마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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