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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리아 땅으로 가는 길 (창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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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아 땅으로 가는 길 (창 22:1~14)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과 깊이를 측량하시고, 무게를 재어보시고 있습니다. 요4:23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정말 나를 만나기를 원하느냐? 나에게 진정 예배하려고 왔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갈급한 사람, 그 분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요청과 하나님의 허락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과 그의 소생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보내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시기와 질투가 사라지고, 평온을 찾았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분만을 사랑하면서 살 것이냐,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자식을 키우며 살 것이냐 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을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에 이삭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갈만하고, 사흘 길을 아버지와 함께 걸어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 것입니까? 구약 성경을 주석한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는 유대 랍비들이 이삭의 나이를 37세라고 했는데, 구약신학자들은 이런 학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라가 127세에 죽었는데(창23:1)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 받아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사라가 이삭을 90세에 낳았으니, 37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고대사를 쓴 요셉퍼스는 이 때 이삭의 나이가 25살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대략 20살은 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말씀해주시고, 자기를 알아주시고, 자기에게 나타나 주신 하나님께 즉시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영어 성경 Good News Bible 에서는 "Yes, Here I am"라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오늘도 저에게 말씀해주옵소서”라고 응답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들 중에 이스마엘이 아니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꼭 찍어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이삭만을 인정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했습니다. 시험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니사”라고 하는데, 시련한다, 시험한다, 즉 ‘Test’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불신앙에 빠지게 하고, 분순종하게 하여 죄악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능히 감당할 것을 아시고, 시험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시고, 신실함을 잃지 않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신실함과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이삭을 대신할 어린 숫양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린 숫양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에 아브라함은 반드시 시험에 합격하고, 승리할 것을 내다보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우리로 죄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굳센 믿음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일은 재고하시라고 부탁드릴만한 사항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 해도 인간에게 요구하실 일이 따로 있지,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하시는 것을 그동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고대 근동 제사에서 사람을 제사로 드리는 것을 허락하신 일도 없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후에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에 사람을 잡아 제물로 드려 제사하는 것을 강력하게 금하셨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인신제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도 맞지 않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도 맞지 않는 것이요, 미개한 야만족이나 하는 짓이요,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것도 아니요, 한참 잘 자라는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드리라는 “번제”는 어떤 제사입니까? 번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요, 흔적을 남기지 않고, 통째로 다 불태워드리는 희생제사입니다. 제사 중에 가장 완벽한 헌신, 생명을 다하는 헌신을 의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재산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양과 염소 수천 마리를 드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몇 년의 시간을 바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 가장 아끼고 있는 것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아버지의 손으로 죽여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노년에 얻는 기쁨, 그것도 100세가 되어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 꿈이요, 사는 이유가 될만큼 사랑한 그의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무한한 꿈과 사랑과 용기를 주었고, 웃음을 안겨준 아들, 아버지를 이어 상속자요, 그를 통하여 위대한 민족이 이루어질 것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을 통하여 자손을 번성케하실 줄 알았는데, 아직 장가도 들지 아니한 청년을 불태워 드리라는 것을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아들을 목회자로 만들라는 것도 아니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보내라는 것도 아니요, 그냥 불에 태워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식을 주실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드리라는 것을 또 무슨 의도입니까? 그것도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한 산에서 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 깊은 뜻이 있어 명령하신 것인데, 우둔한 인간이 그것을 다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삼일만 참아보고, 사흘 후에는 다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억울하게 죽으시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지체하지 않고, 준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련의 밤이 찾아올 때에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은 우선 드리는 척하다가 무슨 수가 날 것이라는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하나님은 좋은 결말을 주실 것이라고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인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이 분명한데, 부인 사라가 동의할 것 아니요, 사라가 알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이며, 흔쾌히 드리라고 할 것입니까? 드리지 말라고 할 것 입니까? “당신이 이삭의 아버지 맞느냐?” “이제는 완전히 노망들었다. ” 저주하고 나설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부성애보다는 모성애가 더 강하기 때문에 사라가 알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 예배드릴 장소는 하나님이 정하신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 왕은 후에 이 모리아산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는 장소를 미리 확정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오고 오는 전 인류를 상대로 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당장에 드리라고 하셨으면 결단하기가 수월하였을 것입니다. 사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은 한 삼일간은 변치 않는 마음에서 우러러 나와야 제대로 된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흘 길을 가라는 말씀에 우리는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하든지 처음에는 단단하게 결심하고 출발하였지만, 며칠이 지나면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사흘 길을 걸어오면서 수없는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하찮은 미물도 그 새끼들을 보호하는데, 어떻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아들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결심이 단단해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 영성을 합하여 전인격적인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생한 정신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순간의 감정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으로 마음을 확정하여 드려야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엘케골’은 그의 책 “그리스도교의 훈련”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3일 동안 걸어가면서 아브라함은 먼저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시간이었고 자신을 십자가에 먼저 못 박아야 했던 걸음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순종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2) 우리의 예배는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사전에 준비하고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가기 위하여 준비하였습니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가 아브라함이 기쁘게 순종하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신앙이란 순종하는 길뿐이 없음을 알고 거룩한 두려움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내일 하라, 모레 하라, 언제까지 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시행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까지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오늘 하라는 명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미루고, 내일로 미룬다면 하나님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만이 나의 날이고, 나의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에는 일찍 일어나야 정시에 늦지 않게 나올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일을 시킬 수도 있지만 자신이 장작을 패었습니다. 그것도 불이 잘 붙을 수 있도록 잘게 패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신하신 곳에 도착하고 보니 나무가 없다느니, 불이 없다느니, 칼이 없다느니 핑계하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떠나야 합니다. 집안일을 정리하는 것도 하루 전부터 잘 점검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게 합시다. 비가 오려고 하는데, 문을 열어놓았다고 걱정합니다.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습니다. TV를 켜놓고 왔느니, 식사 후에 도시가스를 잠그지 않고 왔다고 땅이 꺼지게 걱정하시면 정성스러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와 헌금은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갑에 고액 수표만 있어 헌금 드릴 수 없다고 핑계할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드릴 만큼 작은 돈으로 준비하면 될 것인데, 교회에 오고 나서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없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을 데리고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준 곳으로 갔습니다. 제3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드디어 모리아 산에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하고 종들은 산 아래에 남겨놓았습니다. 보통 일반 사람이라면 아들을 제사 드리기 전에 누군가 말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종들을 끝까지 데리고 갈지 모릅니다. 종들이 아브라함의 손을 잡으면서 "주인어른 정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제 노망들었습니까?"라고 말하면 나는 드리고 싶었는데 종들이 말려서 드리지 못하였노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간섭을 피하려고 미리 해결하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미리 제거하고 와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가지고 오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고, 미리 꺼놓고 들어와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번 제사는 아버지와 아들만의 시간으로 성별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들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짊어지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내 아버지여” 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물어봅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둘러댄 말이 아니라, 진정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아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찢어질 정도로 아팠습니다. 죽어야 하는 아들이 “내 아버지여”라고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어머니에게 “내 어머니여”라고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로부터 “내 아버지여”라는 말을 들을 때에 마음 아파한 것을 주님은 기억하시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잘 벌려놓았습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들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의 목숨보다도 저를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그래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 잘 알겠습니다.” “아들아 이 제단에 올라 누워라”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합니다. 이런 말을 생생한 정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취하고 홀려서 무의식중에 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두 사람은 우리보다 더 긴장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신뢰하였고,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아버지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우리 주님의 예표가 되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결박하였다고 하지만, 신실하신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에 칼을 들어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얼마나 다급하셨으면 두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항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는데, 그 말의 뜻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여호와가 준비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호와 이레가 되십니다. 

오늘 우리는 잘 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 순종하는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 모리아로 가는 길은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아픔의 길이요, 눈물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갈 수 있습니다. 자존심도, 꿈도, 비전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깊이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것이라면 아들도 드릴 수 있다는 신앙이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이 사람을 제물로 받으려는 것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죽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삶 전체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경영학에서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느냐? 가치의 시스템이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확신의 시스템이 결정되고, 확신의 시스템에 의하여 행동의 시스템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나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고 가치를 결정하면서 확신하게 되고, 우리는 자기가 확신하는 일에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는 지난 주간에 성경을 읽어가다가 시편50:22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행동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정직하고 성실을 다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어떤 행동을 주문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주주이십니다. 그는 가장 귀하신 분이시며, 생명을 주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실 때에는 귀한 뜻이 있는데,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지, 분명히 귀하고 좋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지, 우리에게 나쁘게 하시려고 무엇을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장차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내어주시려고 하시는 특별하신 뜻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죽음 후에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흘 전에 이미 이삭을 마음속에서 죽여 제물로 드렸습니다. 

히11:19에 “그(아브라함)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흘 길을 간 후에 이삭과 함께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시는 모형이었습니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모형이 되고 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지신 독생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고 제단에 오르시는 주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인류를 위하여 독생 성자 예수님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준비하시려는 특별하신 섭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드리고 돌아가야 진정한 예배입니다. 한 시간 앉아 있다가 좋은 말씀이나 듣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놀러 오지 않았습니다. 정답게 자라난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꺼내놓고 내 손으로 그것을 결박하고, 칼을 빼어 찌르는 아픔 없이는 진정한 예배가 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처음에 부르신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신 것은 명령이요, 사명입니다. 다음에 부르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거듭 부르시는 말씀은 은총이요, 사랑하신다고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사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사명에 충실하면서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정해주시고, 계속하여 우리를 사용하여 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이것만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계속하여 붙들고 싶은 것, 감히 꺼내놓기 싫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칼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놀라우신 은총에 참여하라고 불러주십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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