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른 무화과 나무 교훈(입술의 권세를 가지려면...) (막 11:12~14, 2..

  • 잡초 잡초
  • 633
  • 0

첨부 1


마른 무화과 나무 교훈(입술의 권세를 가지려면...) (막 11:12~14, 20~25)


이명박 대통령께서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있을 때 각종 규제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생생한 사례로 대불산업단지 `전봇대'를 소개하였습니다. 전보대가 길에 잘 못 서있어 대형차가 모서리를 도는데 불편을 준다는 것입니다. 수년동안 민원을 넣었지만 해결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대통령 당선인의 이 말이 떨어지자 한국전력 13명의 직원이 비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작업을 하여 전봇대를 옮겨 버렸습니다. 사람의 말의 힘이 대단한 권세가 있습니다. 특히 힘있는 사람의 말은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어떤 사람을 공기업 사장으로 임명하라고 말하면 임명이 됩니다. 산을 밀고 아파트를 지라고 하면 어느날 산이 옮겨집니다. 평범한 우리들의 말도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신문을 가져오라고 말하면 아들의 그 말 한마디에 신문을 가져옵니다. 사장으로서 직원에게 부산에 갔다 오라고 하면 그날 즉시 부산에 내려갑니다. 재판관으로서 죄인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하면 그 사람은 10년 동안 감옥에 사는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같은 사람도 말에 권세가 있는데 예수님의 말의 권세는 어느 정도일까요? 
인간 여호수아는 태양에게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인류 구원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월요일 아침에 베다니를 떠나셨습니다. 
마21:18절에 의하면 ‘이른 아침(프로이)’이라고 말씀하였는데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라는 뜻입니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였기 때문에 몹시 시장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 멀리서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멀리서 보니 무화과나무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무화과 열매를 따 잡수시려고 하니 무화과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예수님을 도둑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대사회의 사회 보장 율법에 의하면 굶주린 자는 타인의 소유의 열매라도 따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신23:24,25).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신 23:25)”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기 전에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무화과입니다. 과일이 맺힌 후에 입이 나오기 때문에 입이 무성하게 나있다는 것은 이미 무화과가 열렸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무화과가 없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3월에 무화과 나무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열매가 열리고 4월에 크고 무성한 입이 나오고 늦은 5월이나 6월에는 익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해 봄에 난 가지에서 결실한 열매는 8월에 수확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 년에 두 번 수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열매에 대한 명칭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4월에 열린 아직 익지 않는 열매를 ‘파가’라고 하고 6,8월에 잘 익은 열매를 ‘비쿠라’라고 한다고 합니다. 아직 익는 철은 아니지만 4월 중간인 유월절 절기 때이니까 당연히 열매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에 대하여 강하게 저주를 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버틀란트 러셀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꼭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분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왜 때도 아닌데 열매를 구하고 열매가 없자 분풀이로 무자비하게 저주하느냐는 것입니다. 보통 인간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화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호 9:10). 신앙의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는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판의 임박성을 알리는 표적입니다. 

예레미야 8:13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그 말씀으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형식만 남아 있고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무화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시고 선택하시고 기대하였는데 기대를 저버린 이스라엘이 꼭 무화과나무 같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표적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예수님은 무슨 교훈을 주시고자 했겠습니까? 성경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차분히 읽어 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을 누가 들었습니까? 14절을 보세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에게 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인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다음날 아침 즉 화요일이 되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어제 그 무화과나무를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 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있으신 분임을 교훈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전봇대가 뿌리째 뽑힌 것이 아니라 가만히 놓아두어도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폭풍을 잔잔케 하였습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막 4:39)”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의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하니까 나사로사 살아났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습니까? 

이 때 베드로가 질문합니다. “선생님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물론 랍지라는 말도 존칭어이지만 이 상황이 되면 “랍비”라는 말보다는 “큐리오스”라고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는 그 정도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랍비라고 자신을 칭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면서 모든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가 마른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문맥적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이 표적을 나타내고 있는 예수님이 랍비 정도가 아니라 큐리오스 즉 선생님 정도가 아니라 주이신 것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표적을 보면서도 나를 선생님 정도로 고백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이시고 생명과 죽음을 말씀 한마디로 주관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말의 권세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요 1:12)”다고 했습니다. 이미 면허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자녀답게 말에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눅 9:1)”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무화과나무가 말씀 한 마디로 고사한 표적을 통하여 말의 권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의 권세를 가지고 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산을 옮기는 말-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의 관계, 자존감, 말씀 믿고 선포/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의 권세가 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말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무화과 나무 정도가 아닙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수히 심겨져 있는 산도 말 한마디에 없어져 바다에 던져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의 권세를 분명하게 알려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문학적인 과장법을 통하여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 무화과 나무 고사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무화과 나무 고사보다 더 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2)”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그 누구는 말하는 것을 믿고 의심치 않는 사람이면 누구든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면 의심하지 말고 그 말을 믿고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광야를 걸어가는데 이제 바로 가나안 땅 앞에 왔습니다.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10명의 정탐꾼은 말합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민 13:31)” 믿음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민 13:33)”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 스스로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해 버립니다. 그리고 모세를 원망하고 슬퍼하며 절망해 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말합니까? 믿음의 말을 합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7-9)” 결국 믿음의 말을 선포한 이들만 그들의 말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얼마나 믿음의 말을 합니까?

요즈음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해서 늘 말마다 안된다, 안된다. 망한다, 망할 것이다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세례 요한의 아버지 아들 준다고 해도 믿지 못합니다. 이 나이에 어떻게 아들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아들을 낳을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 말에는 위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의 주택 속에서 인간은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에는 인간의 자아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말에는 인간의 미래를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성공의 생태학]의 저자 로버트 아놋 박사는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성은 바로 긍정적인 정신 에너지다. 긍정적인 정신 에너지는 성공으로 가는 보증수표이자 성공의 생물학적 기초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 줍니다. 말을 하게되면 사람은 그 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믿음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는 우리 인간은 하루에 5만∼6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생각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이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이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가 남자는 평균 2만 5천 단어, 여자는 3만 단어 쯤 된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자신이 사용한 단어로 책을 펴내면 4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132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일평생 이야기하는 시간을 따로 모아 보면 대략 13년을 꼬박 말하는 데 소비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말들이 결국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좋은 말은 좋은 인생을 만들고, 위대한 말은 위대한 인생을 만들며, 훌륭한 말은 훌륭한 인생을 만들고, 덕스러운 말은 덕스러운 인생을 만들며, 아름다운 말은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고, 신앙적인 말은 능력있는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하나님의 말씀을 100% 신뢰하고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도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하나님을 믿으며 말씀의 권세를 나타내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2. 산을 옮기는 말-입술을 통하여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믿음/ 무엇이든지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선포하면 믿음대로 되는 말의 권세를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고 산다고 바로 현실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질병을 치유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고 선포하며 살았는데 바로 치유되지 않고 계속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공수표를 발행한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줄 것이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도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잘 못된 것입니까? 믿고 나아갑니다. 그런데 현실로 바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쇠를 내게서 찾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찾아야 합니다. 믿고 선포하고 비전을 가시고, 소원했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너희 말이 내게 들린대로 내가 행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려면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까?

기도하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제한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제한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아이 낳지 못한 한나가 그것을 제한했다면 그는 사무엘을 낳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커도 제한하고 너무 작도 제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기도했으면 받을 줄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보이지 않고 아직은 잡히지 않고 아직은 느껴지지 않지만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이기 때문입니다. 비오기를 기도하고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6)”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말은 권세가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실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단순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종교적 형식이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많은 실험 자료를 모아 책을 낸 래리 도씨(Larry Dossey)는 "치유의 언어"에서 치유 기도에 대한 131건의 실험 중에서 통계적으로 절반 이상이 의미 있는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종합 병원에서 393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이중맹 실험(Double blind study)"을 하였답니다. 이 실험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192명의 환자를 치료와 함께 기도를 받게 하였고 그 외에는 일반치료만 했는데 기도를 받은 환자가 완쾌율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말인 기도의 말은 실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문에 95개조항의 "개혁선언문"을 붙여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고 절대권력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라토리오「천지창조」를 작곡하여 명성을 얻은 하이든의 예술성과 열정은 기도에서 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미국의 백화점왕 이라고 불리는 워너메이커를 부도에서 일어나게 한 것도 기도였습니다. 어느날 하이든은 한 평론가로부터 "그렇게 초인적인 열정으로 창작을 하고 금방 회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할 때 그는 "제가 살고 있는 집에 골방이 있는데 저는 작곡하다가 지칠 때 혹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그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샘솟는 열정과 영감을 주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기도할 때 힘을 얻었지만 기도를 중지할 때 힘을 잃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사 최고의 엔지니어 찰스 케터링은 빈틈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 업계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사회자가 그의 '신화의 손'을 높이 쳐들며 "케터링 씨, 이 손으로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회자는 물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자동차 탄생!'이라는 말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손으로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두 손을 잡고 기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입술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창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단순한 심리효과나 종교적 형식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자신의 마음의 평강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실제적인 효용성이 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능력의 통로입니다. 눈물로 기도하면 기도는 눈의 눈물을 멈추게 해 줍니다. 사람은 약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도는 은혜의 통로, 능력의 통로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압 암몬 세일 나라의 연합 군대가 유다를 치러 왔을 때 유다의 모든 사람이 합심기도하여(대하20:13) 원수를 이겼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고 외적이 처들어 왔을 때 히스기야왕과 이사야 합심하여 기도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대하 32:20)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몰의 위기에 처할 때 에스더와 유다 민족은 합심하여 기도하여(에4:16) 죽음에서 면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할 때 다락방의 120명 성도가 성령 충만을 받았고 기도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풀려났고(행 3:1) 기도할 때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런데 지속적으로 믿고 기도해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3. 산을 옮기는 말-용서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인간관의 관계 용서/아무에게나
그런데 이렇게 믿음으로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장애물이 있다는 표시입니다. 아무리 벨브를 고치고 수리해도 물이 나오지 않으면 수도관이 막혀있는 것입니다.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막 11:25)”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제한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아무에게나입니다. 사람끼리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말은 맺힌 매듭을 푸는 권세가 있습니다. 사람과 막힌 담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날개를 달아 줍니다. 교회에 오래 출석했어도 속 사람이 변화하지 않고 늘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용서하지 못하는 상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상처의 노예가 되면 마음은 건강하지 못하고 상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삶은 생기가 없고 영적 성숙과 변화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은 더러워지고,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타게 되고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을 수도 없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한 때 받은 상처가 핵심감정이 되면 그 감정은 그 사람을 움켜잡고, 평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사는 가격보다 그 유지비가 훨씬 더 많이 드는 물건입니다. 인간 영혼에 가장 강력한 독소로 작용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인간관계에 불화와 갈등을 조장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쓴 뿌리는 정서의 독으로 주변을 오염시켜 스스로를 고립화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일생동안 과거의 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자신의 육체와 인격을 파괴뿐 아니라, 신체적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상처를 만들어 내고 분노와 적개심, 복수심을 증가할 뿐 아니라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당사자입니다.

용서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준 만큼 거두기가 힘들고 같이한 시간이 긴 만큼 골은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성적으로도 용납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용납된다하여도 감정적으로 정리되는 데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하는 것은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마음의 결단입니다.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했으니 그 말씀 순종하여 결단하는 것입니다. 입술의 권세 있는 선포입니다. 그렇게 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어떻게 느끼는지는 통제할 수 없으나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하여서는 통제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한 조각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상처라는 것이 어차피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그 해결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거세게 굽이치는 기억의 지류를 멈추게 하는 유일한 힘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심리적 치유효과가 있습니다. 정서적 고통을 완화해 주고, 우울과 불안을 감소시켜주며, 개인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며, 분노의 폭발을 막아주며, 분노와 죄의식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 주며, 해를 준 사람으로 말미암은 증오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용서는 신체적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건강을 촉진시켜주고, 혈압을 낮추며, 분노로 인한 고혈압과 같은 신체적 증상을 완화해 줍니다. 용서는 개인의 심리적 건강과 안녕의 회복을 가져올 뿐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용서는 강력한 치료적 체계로서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증진시키고 창조성과 활력을 강화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용서는 영적 힘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하고 진정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기도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말의 권세를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과 정신, 정서가 건강해집니다.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워지지 않지만 상처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과거에 개의치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평화와 행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용서는 꼭 화해을 동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할 수 있으나 가해자의 행동이 바뀌지 않는 한 화해란 어려운 것입니다. 화해는 용서의 결과일 뿐입니다. 용서는 사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면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용서하면 여러 과정을 통해 감정적인 부분도 정리되어 져 갑니다. 상처가 완전히 망각이 되어지지 않지만 그 기억이 아픔이 되어 자신을 노예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은혜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자신을 생각하면 긍휼과 은혜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산을 옮길 만한 입술의 권세를 가지려면...

나 자신에게 먼저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말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자신에게 외치고 출발하면 우리 인생은 산을 옮길 만한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을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를 묵상하면 하나님께 향하는 우리의 말의 권세는 이 땅에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하여는 용서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제한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아무에게나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그렇게 하면 우리의 영도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정서도, 우리의 육체도 건강해지고 기도 응답받으며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김필곤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