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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마 6:5~8) - 기도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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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마 6:5~8)


큰 나무는 그만큼 뿌리가 튼튼합니다. 보통 뿌리 깊이만큼 나무도 자란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바람에 곧 넘어지고 맙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나무는 키가 100m에 달합니다. 그런데 조사해보니 뿌리 깊이는 2-3m에 불과했습니다. 대신 옆으로는 25m에 달하며 여러 나무들의 뿌리들이 서로 굳건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막에 나는 나무는 어떤 것은 키는 1m에 불과하지만 뿌리는 10m에 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막에 사는 포아풀은 키가 5cm에 불과한데 땅속에는 622.8km나 되는 뿌리가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농담조로 어떤 분이 쇠뜨기라는 식물의 뿌리를 캐다보니 중국 산동성까지 닿았더라고 합니다. 딤메르(Dimmer)라는 학자가 나무에 옥수수 한 그루를 심고 그 뿌리 길이를 총 계산해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오는 거리보다 더 긴 623km에 달했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니 하루에 무려 5km씩 자란 셈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식물의 신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부분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부분만 보고 칭찬하지만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다지는 노력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뿌리고 깊어야 합니다. 실력 없이, 내적으로 다진 것 없이, 유명해지면 위험합니다. 곧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마르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쓰시는 사람들은 오랜 동안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40년을 쓰기 위해 80년의 연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지만 3년을 쓰시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무명한 자로 보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곧 바로 쓰임을 받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다소에서 은둔 생활 약 10년, 도합 13년의 성숙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사역자가 큰 교회를 하고 큰 목회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3-4대에 걸쳐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 부모와 수많은 사람이 눈물 뿌려 기도했고, 본인도 보이지 않는 연단을 거쳤을 것입니다.

신앙인의 생활에서 뿌리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시간이 많으냐에 따라 우리 인격과 사역의 열매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성숙해지는 만큼 우리는 열매 있는 사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주님께서는 주기적으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어쫓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 때 예수님은 자주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막1:35).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막6:46). 예수님의 사역의 힘은 바로 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은밀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가 피해야 할 기도와 힘써야 할 기도가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

무엇보다 피해야 할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은 5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성전이나 회당에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오늘날 이런 모습은 회교도들이 그들의 기도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루 세 번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경건한 행위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 외식, 곧 위선자들의 기도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또한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하거나 여러 모임에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 되는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얼마나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도를 얼마나 유창하게 잘하는지 자랑하려 하고, 반대로 사람 앞에 기도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피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 앞에서 하든 홀로 하든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 화려함도 부끄러움도 없이 오직 진실함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습관화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 보이는 기도는 내적으로 고갈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뿌리는 땅속 깊이, 또 지하 깊숙이 있는 물쪽을 향하여 뿌리를 내려야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는 마치 뿌리가 땅밖으로 보이기 위하여 기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뿌리는 곧 햇볕에 타버릴 것이요, 결국 잎도 마르고 맙니다. 인간의 죄성은 얼마나 뿌리 깊은지 하나님을 위한 경건을 어느새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으로 바꾸어버리고 맙니다. 주님은 여러 번에 걸쳐 “사람에게 보이려고”(1,2,5,16) 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 이하에서도 이렇게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5-7) 경문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기록하여 이마에 매어단 작은 상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보이기 위하여 이 경문을 크게 만들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립니다. 그리고는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칭찬을 받고, 선생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인기에 취해 있다보면 내 안에 하나님이 사라자기 시작합니다.

내 심령이 말라 있다면 그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내가 사람에게 너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심령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은밀한 교제가 있어야 삽니다. 그 은밀한 교제라는 것은 은밀한 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은밀한 교제의 시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조용히 홀로 있는 시간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은 버려진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의 뿌리는 더 깊어집니다.

옛 사막 수도사들의 일화입니다. 세 친구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좋아 하는 일들을 한 가지씩 하기로 했습니다. 한 친구는 “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갈등하고 반목하는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병자들을 고치고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친구는 자기는 별로 남을 위해 할 일이 없으니 그저 광야에 가서 조용히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 흩어졌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심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몹시 절망에 빠져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져 침울한 얼굴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광야로 간 세 번째 친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정말로 사막에 암자를 짓고 조용히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두 친구는 자기들이 겪은 일과 현재의 고민을 말하며, 이 암자에서 홀로 사는 동안 얻은 것이 뭐냐고 세 번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일어나 그릇에 물을 담아 오더니 그 안을 들여다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릇 안에는 혼탁한 물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두 친구가 도대체 뭘 보라는 것이냐며 언성을 높이는 동안, 암자의 주인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이 지나자,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다시 그릇 안을 보게!” 그릇 안을 다시 들여다 본 두 친구는 물이 고요해지고 맑아져 그 위에 자기들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이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머무는 이는 불안과 혼란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네. 그러나 내적 고요를 지키며 사막에 거한다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것일세.”

이 두 친구가 이렇게 탈진이 된 까닭은 홀로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요한 가운데 처했다면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그들을 위로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많이 노출되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우리 영혼은 고갈되고 맙니다.


골방 기도

주님께서는 대신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할 것을 명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골방은 창문도 없는 창고와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할 것을 명합니다. 골방기도는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곳입니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그 소리마저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 완전한 차단을 말합니다. 단지 몸만 그러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되는 것입니다. 골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온갖 세상 일들이 우리 마음을 통하여 들어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핸드폰까지 있어서 결코 홀로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손에서 핸드폰이 떠나질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립니다. 저희 집은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사주지 않았습니다. 좀 자유롭게 살며,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법을 알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불만입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데 자기만 소외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골방기도를 힘들어합니다. 모든 것을 차단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침묵과 홀로 있음 가운데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일찍이 파스칼은 현대인의 비극에 대해서 통찰력 있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불행은 하나의 단순한 사실 곧 그들이 자기만의 방에 홀로 조용히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과 소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사람과 일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도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우리는 저 멀리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습관적으로 TV를 켭니다. 등산을 할 때나 혼자 걸어갈 때조차 우리는 고독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라디오를 켜고 귀에 음악 소리를 갖다 댑니다. 이렇게 마음이 번잡하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수많은 소리에 가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는 은밀한 골방을 원합니다. 어거스틴은 “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입니다.  그 사이에 누가 끼어들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단 둘만 있기를 원합니다. 사랑이란 것은 묘해서 과도하게 노출되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기도를 “사랑에 타 헐떡이며”라고 노래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헐떡여 본 적이 있습니까? 사무엘 코울리지는 ‘옛 선원의 노래’라는 시에서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한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다름 아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계신” 분이심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4,6,18). 주님은 마치 신랑처럼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가 침실로 들어오지 않으니 몹시 답답해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익숙해지면 기도가 쉽습니다. 결국 기도가 힘든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이나 문제거리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사귐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지만 사건이 없으면 정이 들지 않습니다. 문제거리 때문에 얼굴 붉히고 싸우고 근심하며 애태우다 깊은 정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사방이 막혀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귐을 갖기를 원하시는구나.’ 인생의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연합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좋은 안내자입니다.

하나님과 은밀한 사귐을 가지고 나면 우리에게 평화가 주어집니다. 여러분도 매번 경험하는 바지만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이상하게 자신이 메마르고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고요히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 안에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썼던 토마스 아켐피스는 “마음에 큰 평안이 있는 사람은 칭찬이나 비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어쩌면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은 우리의 내적인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평안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주어집니다.


중언부언 하는 기도

7절에서 예수님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언부언은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말이 많은 기도입니다. 왜 말이 많은가? 자기가 기도하는 대상인 신과 자신이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신에게 아첨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이는 또한 이방인들이 자주 했던 ‘주문’과 같은 기도를 말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특정 주문을 반복하면 나타나는 비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의 모든 소원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자녀들의 소원을 몰인정하게 외면하시는 그런 무정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한 말을 또 하고 반복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하면 오히려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언부언 하는 기도는 자기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 대상을 알더라도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에게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런 모습은 신의 이름을 부를 때 가장 잘 드러났습니다. 예컨대 고대 바벨론에서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를 때의 모습을 한 번 보십시오. “하늘과 땅의 왕이신 ‘샤마스(Shamas)’여, 공평과 정의의 주이시며, '아누나키(Annunaki)'의 주이시요, '이기기(Igigi)'의 주이시여, 약속을 폐하지 않으시며, 명령을 변하지 않으시는 주이시여!” 온갖 아첨의 말로 가득합니다. 밤면에 하나님을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처럼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의 기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부를 때 복잡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시편의 부름의 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이 한 마디로 시작합니다. 어느 시편을 펴나 마찬가지입니다. 길어 보았자 “만군의 여호와여”(84: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88: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145:1) 정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가깝다는 말입니다. 가까울수록 부름의 말은 짧아집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주여!” 로 충분합니다. 왜 말이 길어집니까? 친하지 않으니까, 거리감이 느껴지니까 그렇습니다. 친한 사이면 서론이 필요 없습니다. “네가 어찌 그럴 수 있어!” 이 한마디면 족합니다. 자녀가 아버지한테 무언가 부탁하러 가서 “아빠, 나 이것 좀 사줘?” 하면 됐지, “연봉이 많으시고, 잘 생기시고, 남자다운 기상과 대범함을 지니신 우리 아버지시여!” 하면 되겠습니까? 당장 “얘가 미쳤나?”하는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저희(이방인)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사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요구하기도 전에 자녀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또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시고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데 우리가 굳이 기도할 필요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알고 계시더라도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마7:7)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지만 우리가 받을 그릇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릇을 다지라는 뜻입니다. 기도 없이 받는 선물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소중한 줄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선물이 우리를 망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로또나 복권, 또는 갑자기 횡재를 맞았던 사람들의 불행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고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물질을 부어주십니다. 지도자의 그릇이 되어야 지도자의 자리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릇을 다지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우리 기도를 외면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잘 안다면 이런 때일수록 실망하지 말고 더 간절히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또 어느 때는 아예 우리 기도를 외면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응답하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칼을 달라고 하면 부모는 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응답하지 않는 것도 응답입니다. 예컨대 비행기 표를 놓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잠시 그 여행을 미루어 놓으실 필요가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또 그 비행기를 타고 가면 어떤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미리 막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안다면 비록 기도 응답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포어시드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위대한 거절이 때때로 우리의 가장 진실된 기도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근시안적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이신 것을 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사랑을 나누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 되십니다. 사랑하는 분과 함께 라면 우리는 어떤 일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큰 문제는 일의 실패와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실패입니다. 주님은 골방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밀한 중에 단 둘이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참 평화가 있고 풍성한 열매가 있습니다. 이 부름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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