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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특징 (삼상 17:1~54) - 영성, 전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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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특징 (삼상 17:1~54)

하나님의 일은 항상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므로 진행되는 것이다. 창 1:12에 보면 땅이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게 하셨다. 그런데 2:5에 보니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없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은 죽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셨고 다 보고 계셨지만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는 골리앗을 그대로 두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계셨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다윗이 나타나니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골리앗을 물리치셨다.

오늘 설교에서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실 때 다양한 면을 보시고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여러분이 자녀를 결혼 시킬 때 배우자의 한 면만 보지 않고 여러 면을 살피는 것과 같다. 인물, 인격, 믿음, 능력, 가문 등을 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 어떤 면을 보실까? 

1. 영성을 보신다.

다윗은 영성적인 면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1)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다.

영성의 핵심은 임마누엘이다. 아무리 자신의 영이 탁월한 면을 갖췄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에게 나타나는 탁월한 영적인 것은 생명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다. 16:18下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니”라고 한다. 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18:14下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하나님이 사울을 처음에는 사용하시다가 나중에는 버리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처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9:21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시작할 때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과 함께 하신다. 그런데 겸손하던 사울에게 교만이 들어가게 되고 결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니 하나님도 사울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삼상 15:23에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에서 실패하는 원인의 80%가 능력이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대인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인관계에서 제일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의 교만이다. 

  2) 적을 분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윗은 자기가 싸워야 할 적과 싸우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분별할 줄 알았다. 28-30절에 보면 큰 형 엘리압이 나온다. 엘리압은 아마도 다윗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왕을 뽑아 기름을 붓기 위하여 왔을 때 엘리압을 보고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시고 막내인 다윗을 선택하셨다. 

엘리압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와서 골리앗의 조롱 소리를 듣고 정황을 묻고 있는 다윗을 보고 노를 발했다. 마치 양들을 내팽개쳐버리고 전쟁을 구경하러 온 것처럼 말한다. 심지어 자기가 다윗의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을 안다고 인신공격까지 했다. 형이지만 다윗의 인격을 너무나 깔아뭉개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형하고 한판 붙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다윗은 형에게 자기가 이유 없이 전쟁터에 왔겠느냐고 말하고 다시 사람들과 자신의 적인 골리앗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넘어지는 것 같다. 진짜 적을 놓아두고 적이 아닌 상대와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후에 사울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정작 싸워야 할 상대는 나두고 다윗하고만 싸우려고 한다. 어느 목사님은 목회를 하면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장로님을 적으로 알고 두들겨 팼다고 하더군요. 그 목사님은 진짜 적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진짜 다윗의 적은 엘리압이 아니라 골리앗이었다.  진짜 우리의 적도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골리앗은 강한 자다. 40일을 조석으로 조롱하지만 상대를 할만한 사람이 없었던 강한 자다. 4절에 보니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다. 한 규빗이 45.6cm이니 여섯 규빗이면 273cm이고, 한 뼘은 23cm이니 합하면 키가 296cm이다. 테크노골리앗 최홍만 218cm이니까 엄청난 키다. 거기다가 5절에 보니까 갑옷의 무게가 오천 세겔이니 약 57kg이다. 

우리의 적인 악한 영들도 엄청난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악한 영들은 타락한 천사들이며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투명인간과 싸운다면 이길 사람이 없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이기겠는가? 그런데 타락한 천사니 천사의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산헤립의 18만 5천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 왕과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셨는데 하룻밤 사이에 전멸시키셨다. 악한 영들이 천사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에게 승리하려면 먼저 적을 분별 할 줄 알아야 한다. 누가 적인지도 모르면 어떻게 싸우겠는가? 

  3) 승리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31-37에 보면 사울과 다윗의 다른 점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다. 사울은 패배의 언어를 사용하고 다윗은 승리의 언어를 사용한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이 사실을 전한다. 다윗이 사울 앞에 서서 “그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라고 말하지 사울이 “네가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이미 말로서 패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다윗은 계속 승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양을 지켰는데 양을 지키다가 사자나 곰이 나타나면 자기가 따라가서 그것들을 치고 그 입에서 양을 건져내었고 사자나 곰도 쳐죽였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할레도 받지 않은 골리앗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승리를 말합니다. 

언어를 영성적인 면에 포함 시켜서 말하는 것은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 언어가 영적인 면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만 보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은 연약함을 알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다.
46절에 보면 다윗은 먼진 승리의 언어를 사용한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라고 말한다. 

탈무드에 이런 교훈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임금님이 시몬이라는 광대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구해 오게 하고, 요한이라는 광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을 찾아오게 했다. 얼마 후 두 광대가 돌아와 각각 그들이 담아가지고 온 상자를 임금님께 바쳤다. 시몬의 상자를 여니까 사람의 혀가 나왔다. 다음으로 요한의 상자를 풀었더니 역시 사람의 혀가 나왔다. 이 탈무드의 교훈은 “혀, 곧 말이 가장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고, 가장 해를 끼치는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말 한 마디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의 자녀들을 위대하게 만들고 싶다면 자녀들에게 소망을 주는 말을 하라. 원종수 권사를 원종수 권사 되게 한 분을 들라면 첫째는 그의 어머니고 또 한 분을 들라면 히데오 속장(구역장)이다. 방언기도를 할 때 "히데오 요시다 마시다"라고 기도하시던 분이라 히데오 속장이라 불려지던 분이다.. 그분은 가난한 환경에서 꿈도 없이 자라온 소년을 볼 때마다 품에 안고 늘 그렇게 말했다. "종시야, 하나님이 틱별히 너를 사랑한데이." 그래서 종수는 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요 특별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늘 인정하고 특별한 존재로 살았다.  

  4) 믿음의 사람이었이다.

 45절에 보면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다윗에게 나오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어떤 능력이 있었는지 알았고 믿었던 것이다.
47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알았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우리도 주님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주님의 이름을 강조한다 (마 28:19, 막 16:17, 눅10:17, 요 1:12, 행3;16, 롬10:13, 고전 6;11, 엡 5:20, 빌2:9, 골 3:17).


2. 전문성을 보신다(16:18, 23).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시는데 그가 잘하는 것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이 다윗의 어떤 전문성을 사용하셨는지 살펴보자.

먼저는 음악적인 전문성은 사용하셨다. 수금을 잘탔다. 16:18에 보면 사울에게 악신이 역사를 하니 한 신하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데려다가 수금을 타게 하면 악신이 떠나갈 것이라고 말했더니 사울이 그런 사람을 찾아 데려오라고 한다. 그러자 한 소년이 다윗을 추천한다. 다윗은 소문날 정도로 수금 잘 탔던 것이다. 

또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는 물맷돌을 던지는 실력을 발휘했다.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면서 물맷돌 던지는 실력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또 다윗은 글을 잘 썼는데 하나님은 그 능력도 사용하셨다. 유명한 시 1편이나 23편이 다윗의 작품이다.
다윗이 세 가지의 전문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은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 쓰시는 전문성을 갖게 된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이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전문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이지만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공부하고 같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탁월하게 잘할 수 없다. 노력에 비해서 잘 할 수는 있으나 노력 없이 탁월함은 있을 수 없다. 

둘째는 필요할 때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달란트, 은사, 능력 등은 사용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감춰두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필요할 때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사울이 악귀에게 시달릴 때는 수금을 연주했고, 골리앗을 만났을 때는 물맷돌을 사용했고,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기 원하실 때는 자신의 글 쓰는 능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무슨 물건이든지 사용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쓰지 않고 보고만 있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수금을 잘 탄다고 악귀가 떠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악귀가 떠난 것이다. 물맷돌을 던질 때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골리앗의 이마에 맞고 이마에 박혔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이다. 다윗이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쓰는 글마다 성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글을 쓸 때 하나님의 영감이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 쓰실 수 있는 것을 준비하라. 언제든지 주님이 원하신다면 자신의 것을 내놓으라. 내가 아무리 잘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


3. 인간적인 면을 보신다.

영적인 면과 능력적인 면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인간적인 면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성이 표현되는 것은 거의 인간적인 면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면도 잘 해야 한다.
그의 인간적인 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순종하는 사람이다.
17-19을 보면 아버지가 다윗을 심부름 시키는데 그 때가 전쟁 중이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에 심부름을 간다. 불평하지도 않고 순종한다.

둘째, 책임감 있는 사람이다.
20절에 보면 아버지 심부름을 갈 때 양을 양 지키는 사람에게 맡기고 전쟁터로 간다. 성경이 이 사실을 일부러 기록한 것은 다윗의 성품이 어떠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양을 처리하고 가지 않아도 다른 형제들도 있고 아버지도 있으니 알아서 처리해 줄 문제인데도 자기가 양일 쳤던 사람이라 양들을 책임감 있게 양을 지키는 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셋째, 건강한 감정을 품을 줄 알았던 사람이다. 
23-27절에 보면 골리앗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모욕할 때 다윗이 분노를 품는다. 그는 건강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분노하지 말아야 할 일에 분노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감정이다. 마찬가지로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것도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넷째, 용기 있는 사람이다. 
24절에 보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런데 다윗은 용기 있게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간다. 이런 용기는 믿음 때문에 생긴 용기일 것이다. 

16:18에 보면 다른 사람들이 다윗을 평가하는데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고 평가한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용기는 두려움에 맞서서 싸울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시대에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에게도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런 용기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빠가 아이를 높은 곳에 올려놓고 밑에서 “뛰어봐, 아빠가 받아줄께”라고 하면 아빠를 믿고 몸을 던지는 아이가 있고, 무서워서 울어버리는 아이가 있다.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빠의 인격과 능력을 믿기에 가능한 것이다. 

단 11:32에 보면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맹을 발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실 때가 있다.  요단강을 밟는 용기, 바다 위로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다섯째,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38-40에 보면 사울이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힌다. 다윗은 익숙하지 않으니까 벗어버리고 시냇가에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그것을 가지고 골리앗과 싸운다. 다윗은 남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다윗이 자기의 것이 아닌 사울의 갑옷을 입고 싸움에 나갔다고 생각해 보라 아주 곤란한 상황이 벌여졌을 것이다. 사울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켰고, 다윗은 작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할 때 용모와 키를 보지 않는다고 하셨다. 만약 다윗이 사울의 갑옷을 입었다면 유치원생이 아빠의 양복을 입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내가 앉아도 되는 자리가 있고 앉아서는 안 되는 자리가 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남의 일을 내가 하려고 하고, 내 일을 남에게 떠넘길 수 있다. 남의 자리에 내가 앉고 내 자리에 남을 앉히는 바보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시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의 특징 악인의 꾀와 하나님의 사람의 지혜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죄인의 길과 의인의 길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오만한 자의 자리와 겸손한 자의 자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영성과 전문성을 갖추고 인간성도 준비되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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