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② 요르단 편 : 느보산에 올라보니 (신 34:1~8)

  • 잡초 잡초
  • 462
  • 0

첨부 1


② 요르단 편 : 느보산에 올라보니 (신 34:1~8)


<국경을 넘으며 겪은 작은 불편>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넘어갈 때에는 조금 고생을 했습니다. 두 나라 출입국 관리소의 무성의와 요르단 쪽에서 우리를 마중 나오기로 한 가이드의 연착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출국수속을 밟을 때 말을 잘못 알아듣고 왼쪽이 아닌 오른쪽 창구로 가서 한참을 대기해도 누구 하나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좀 이상하다 싶어서 창문을 두드리고 물어보니 그제야 건너편 쪽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부주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쪽 직원의 작은 친절이 아쉬웠습니다. 요르단의 입국은 더 힘들었습니다. 아주 심한 황사가 불어 닥치고 있어서 빨리 건물이나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날 따라 요르단에 입국하는 이들이 우리 외에 많지 않았지만 직원들이 늑장을 부리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한 참을 모래바람을 맞으며 창구밖에서 서성거리는데 직원이 창문을 열 고 묻기에 성지순례객이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를 맞으러 온 가이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요르단 입국수속은 가이드가 다 알아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우리의 여권을 다 주고 가이드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주었습니다. 가이드가 늦게 오는 바람에 한 4-50분간 황사를 맞으며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요르단 현지 가이드와 한국인 가이드가 나타났습니다. 조그만 접촉 사고가 있어서 늦었다는 변명을 했지만 왠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버스로 옮겨 탔는데 이 또한 실망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대형 벤츠 버스를 타고 넉넉하게 여행을 했는데 요르단에서는 우리 18명이 간신히 탈 정도는 물론이고 복도에까지 짐을 실어야 할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당연히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에다가 전화해서 불평했습니다. 그랬더니 내일부터는 크고 좋은 버스로 바꾸어준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퍽 실망스러웠지만 그 덕분에 회사측에서 사과하는 뜻으로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최고급 양갈비 요리를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비싼 경비를 내고 여행을 할 때 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이해하는 아량도 필요하지만 우리처럼 정당한 항의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버스 문제는 처음 이스라엘에 가서도 해결되지 않아 여행사 지사장이 호텔에 찾아와 저에게 사과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4월 27일 주일 저녁 7시쯤에 우리는 요르단의 국경지대인 아카바(Aqaba)로 이동해서 Days Inn이라는 허름한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우리를 안내하게 될 가이드는 현지 여행사의 오경환 과장이었습니다. 입국 수속과 버스 문제에서부터 우리를 조금 실망시켰기에 조금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친해졌습니다. 30대 초반이 총각이었지만 해외 지사에서 꽤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 많았고 믿음도 괜찮은 청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권사님이고 아버지는 집사님으로서 믿음 좋고 피아노 잘 치는 며느릿감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요르단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접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우리는 이도희 장로님 방에 모여서 주일 저녁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두들 피곤해보였지만 얼굴 표정은 흡족해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출입국 수속에서 조금 고생을 했고 버스나 숙소 문제에도 적이 실망스러웠지만 성지에 와서 호강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하며 위로했습니다. 너무 편하고 호화롭게 여행하는 것보다 때로 고생도 해봐야지만 성지순례의 추억이 되지 않겠느냐며 좋게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에돔족속의 수도 페트라를 보다> 

요르단은 이스라엘에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로서 이스라엘과 영토분쟁이 많았던 나라입니다. 양국은 일부 영토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오늘까지 공존해오고 있습니다. 동예루살렘 지역도 본래는 요르단 영토였으나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고 합니다. 요단강이라는 이름도 본래는 요르단강이라고 해야 옳지요. 그래서 본래 이 지역을 식민통치하던 영국인들이 처음에 이 나라에 '요단 강 저편'이라는 뜻의 ‘Transjorda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1923년에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분할되었으며 1946년에 ‘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셈족속 요르단 왕국)이라는 국명으로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북쪽으로는 시리아, 북동쪽으로는 이라크, 서쪽으로는 이스라엘, 동쪽과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항상 영토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해주지요. 요르단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축출당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전사들을 ‘검은 9월단’(Black September)이라고 부릅니다. 중동의 호전적인 국가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주 특별한 외교정책이 필요했을 듯싶습니다. 때로 아랍인들의 철천지원수인 이스라엘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반(反)이스라엘 진영에 가담하기도 하고 줄타기 전략은 오늘까지 계속된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이슬람 국가이지만 비교적 온건하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보기 드물게 순박해보였습니다. 국토의 9/10 정도가 사막지대라고 하는데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차창 밖으로 흔히 보이는 풍경이 황량한 사막이었습니다. 전체 인구 550만 명 중에 상당수가 수도인 암만, 즉 요르단 계곡 위의 북서쪽 평원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4월 28일(월)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그 유명한 페트라(Petra)로 이동했습니다. 차창밖으로 싯누런 바윗돌로 이루어진 야산과 더불어 막막한 사막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간간히 유목하는 베두인들의 천막과 양떼와 염소떼가 점점이 보였습니다. 중간에 잠시 내려 멀리 아론의 무덤이 있다는 호르산을 보았습니다(민 20: 22-29, 33: 38). 사실 고대 요르단 지역은 에돔 족속과 암몬, 모압 족속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광야 생활 말기에 아론이 죽은 호르산이 저기라는 확신이 금방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민수기 20장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 바네아 지역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지역을 통과하길 원했지만 에돔 왕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페트라가 고대 에돔 족속들의 수도였는데 성경은 이 기사가 끝나자마자 호르산에서 죽어 장사 지낸 아론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페트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르산을 멀리 바라보면서 직접 가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우리 일정에는 빠져 있었습니다. 

마침내 페트라에 도착하니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되고 있었습니다.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전 3세기부터 주후 1세기까지 나바테아 족속들(Nabataeans)이 옛 에돔 땅 안에 거대한 암석을 깎아서 기기묘묘한 무덤과 신전들을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무역 도시를 형성했던 곳입니다. 나바테아인들은 주전 6세기 경 본래 살던 아라비아 북동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와서 토착 에돔족속들을 몰아내고 당대 최고의 상업도시를 조성했던 국제 무역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페트라가 동 아시아와 아라비아로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양념과 향료의 무역로임을 발견하고 2-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도시를 조성하는데 용수의 확보와 통제가 관건이었으므로 시크(Siq, 페트라로 들어가는 3km 정도 되는 깊은 협곡의 바위틈)가 시작되는 입구에서부터 매우 정교한 수로 시설을 갖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후 106년에 로마에 정복당한 나바테아인들은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다가 주후 4세기와 8세기경에 일어난 지진으로 완전히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페트라가 세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1812년 8월 불란서 군대의 스위스 출신 연대장의 아들인 탐험가 부르크하르트(Johann L. Burckhardt)가 이 지역을 현대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방문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우리는 매표소 근처에서부터 말을 타고 한 7분 정도 가서 페트라의 입구인 협곡 바위틈 시크에 도착했습니다. 청명한 날씨에 난생 처음 해보는 승마였는데 기분이 삼삼했습니다.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대한 바위틈으로 들어갔습니다. Bab el-Siq로 알려진, 페트라로 들어가는 전주곡에 해당되는 이 협곡은 참 감질 나는 길이었습니다. 좌우로 절벽처럼 깎아지른 바위가 거대한 틈을 만들어 생긴 이 도로 바위벽에 나바테아인들이 새겨 만든 갖가지 조형물들, 특히 신상들의 흔적과 그 신상들을 모시기 위해 파놓은 벽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울긋불긋한 바위벽이 갖가지 자연스러운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코끼리 형상이 잊히지 않습니다. 실로 난공불락의 요새 중에 요새로서 시크에다가 돌문을 만들어 닫아놓으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혜의 바위성벽이었습니다. 배수가 잘되도록 주후 1세기경에 만든 도로는 오늘의 눈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과학적이었습니다. 

도보와 마차 혹은 낙타만이 허용되는 시크길은 점점 좁아지다가 넓어지다가 하다가 갑자기 넓게 개방된 큰 마당이 나타났습니다. 거기에 놀라자빠질 만큼 거대한 연분홍색의 2층 구조물이 나타났습니다. 페트라라는 도시에 들어가서 최초로 만나는, 여러 신전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보고’(Treasury), 더 정확히 말해서 ‘파라오의 보고’(Treasury of the Paraoh)라는 뜻을 가진 카스네 엘-파로운(Khasneh el-Faroun)였습니다. 보고라는 이름은 주전 1세기에 베두인 원주민들이 이 건축물이 그 석실 안에 보물을 숨긴 위대한 마법사의 마술적인 작품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갖가지 인물상들과 동물상들이 조각된 근동 지방의 헬레니즘 건축양식입니다. 거대한 절벽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참으로 진기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나바테아 왕족의 궁전 혹은 왕묘, 혹은 신전으로 알려져 있으나 어는 것이 맞는지 혼동이 왔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엄청난 보고 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바로 여기에서 촬영했다고 하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카스네 앞에서 우리는 단체 사진을 찍은 뒤 페트라 안으로 계속 들어갔습니다. 크게 개방된 하늘 아래 사방에는 넓은 바위산이 연이어 있었는데 대부분 내부를 깎아 시신을 안치한 석실묘였습니다. 여러 군데의 제법 큰 석실들을 둘러 본 뒤 우리는 어느새 야외극장에 까지 다다랐습니다. 주후 1세기 경 나바테아인들이 로마 양식을 따라 산허리를 깎아서 만든 노천극장이었습니다. 약 7천 명 정도나 수용할 수 있다니 나바테아인들의 건축기술에 입이 절로 벌어졌습니다. 실로 페트라는 기적에 가까운 고대 도시였습니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1박 하면서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음이 내내 유감이었습니다. 페트라를 나오면서 우리는 수학여행을 나온 요르단 여고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무슬림들과 달리 참으로 재기발랄하고 귀여운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래저래 요르단은 열린 이슬람 나라라는 인식이 깊어졌습니다. 


<아직도 흐르는 므리바 모세의 샘> 

오전 내내 페트라 유적지를 돌아본 우리는 근처의 요르단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걸어서 다들 시장했던지 게 눈 감추듯 잘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현지식에 거부감을 보이던 분들이 날이 갈수록 잘 적응하는 모습이 뚜렷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모세의 샘이 있다는 근처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도시 한 가운데 여러 상점들 틈바구니 속에 있어서 의아했습니다. 그것도 노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 샘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20장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없는 이유를 므리바 물 사건과 연계시킵니다. 하나님은 물이 없어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위에다 대고 그냥 말만 하라고 했는데 모세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혈기를 부리며 두 번씩이나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습니다. 그것도 기적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와 아론인양 만용을 부렸습니다. 이내 물이 펑펑 솟아 회중과 짐승들이 해갈할 수 있었지만 모세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가나안 진입이 금지 된 것이었지요. 정말 거기에는 모세가 내리쳤던 바위돌과 아주 흡사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밑으로 아주 맑고 시원한 샘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본래 이 바위 밑에 졸졸졸 생수가 흐르고 있었는데 모세가 이를 발견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그런 천연 샘물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민수기 20장을 보면 므리바 샘 사건이 일어난 바로 직후에 에돔 족속들이 이스라엘이 자기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거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페트라가 고대 에돔 족속의 수도였다는 사실과 그 페트라 근처에 므리바 샘이 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성경 기록과 합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성지 곳곳을 다니면서 이와 같이 성서 속의 사건들이 현장과 정확하게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샘 위에 놓여 있는 바위 주변에서 우리는 그 옛날의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손을 잡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나운 모습이며, 누나 미리암이 죽은 뒤 상심한 나머지 백성들에게 환멸감을 느꼈을 법한 모세의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국제 무역로 왕의 대로를 보다>  

모세의 샘을 구경한 후 우리는 그 날 최종 목적지인 암만에 가기 전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버스 차창을 통하여 아니면 잠시 내려서 조망했을 뿐 직접 현장에 가지는 못했기에 한국에 돌아와 기억을 되살리기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르단이 에돔 족속들뿐만 아니라 암몬과 모압 족속들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손들이었고 암몬과 모압은 모두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롯의 두 딸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으로 남편을 잃자 씨를 이어갈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롯이 만취하도록 만든 뒤 두 딸이 차례로 아버지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큰 딸이 낳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모압’,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이 '내 백성의 아들'이라는 뜻의 '벤암미' 즉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 19: 30-38). 윤리적으로 보면 많이 부끄러운 이야기이지요.      

출애굽과 관계하여 모압 지역은 '모압 평지'라고 해서 모압 북쪽의 여리고 맞은 평지를 일컬었으며 그 유명한 느보산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아모리 족속이 지배하던 이 땅은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습니다(민 32: 38). 열왕기하 3: 4절에 보면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암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압 일대에 풍부한 목초지가 널려 있다는 지리적 조건과 무관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의 증조모인 룻이 모압 여인이며 모압의 들판이 룻기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암몬 지역 역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의 땅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했던 곳이었습니다(민 21: 24-35; 신 2: 19-37). 암몬은 무엇보다도 수도였던 랍바로 유명합니다. 다윗의 부하인 요압과 온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과 전투를 하면서 랍바 성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 그 유명한 밧세바와의 간음을 저지릅니다(삼하 11: 1). 그러므로 우리아 장군은 다름 아닌 랍바성을 공격하다가 전사했지요. 결국 랍바는 요압 장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삼하 12: 26-31). 그 이전과 이후에도 암몬과 이스라엘은 서로가 적수가 되어서 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특히 솔로몬 왕이 암몬 여인을 후궁으로 취해서 암몬인들의 가증한 신 몰렉, 즉 밀곰을 쫓고 예루살렘 근처 실로암에 몰렉을 위한 산당을 짓기도 했습니다(왕상 11: 1, 5, 7). 솔로몬이 암몬 여인 나아마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 르호보암이었습니다(왕상 14: 21). 이렇게 고대 이스라엘이 항상 접전을 해야 했던 에돔과 모압과 암몬이 요르단 지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요르단은 유대-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지인 것입니다. 

버스를 타고 꽤 긴 거리를 옮겨 다니며 잠깐씩 멀리나마 조망을 했는데 '왕의 대로'(King's Highway)와 세례 요한의 순교 성지인 ‘마케루스’(Machaerus)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정확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지만 대관령처럼 꼬불꼬불한 산악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전망 좋은 한 지점에 내리니 저기 보이는 저 도로가 왕의 대로라고 했습니다. 민 20: 17절에 보면 가데스에 이른 모세가 에돔 왕에게 에돔 지역 통과를 허락해줄 것을 요구했을 때 에돔의 밭이나 포도원, 심지어 샘물조차도 마시지 않고 오로지 왕의 대로로만 똑바로 지나가겠다는 말을 합니다. 비록 에돔 지역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왕의 대로는 나중에 이스라엘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여리고까지 경유했던 유서 깊은 옛길이지요. 주전 2천 년 전에 만들어져 아브라함 시대 이전부터 '열왕의 길'로 불렸다니 얼마나 역사가 깊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쪽으로 아카바 만에서부터 북쪽으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쭉 뻗어 올라가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는 대상들의 무역로였습니다. 멀리 아프리카로부터 터키와 아시아 유럽으로 까지 길을 이어주던 군사적 요로요 상업로였던 것이지요. 성서적으로 본다면 아카바→에돔→모압→암몬→길르앗→바산→다메섹→바벨론을 이어주던 간선도로이기도 했습니다. 왕의 대로를 타고 올라가면 숱한 문명 유적지를 훑어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저 먼발치에서 구경만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참수터로 알려진 마케루스 근처까지 가서 멀리 조망만 했습니다. 걸어서 한 10분이면 갈 수 있었는데 그냥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건축광으로 알려진 헤롯 임금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는데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그의 머리를 벤 곳이라고 합니다. 헤롯이 자신의 이모제(異母弟)였던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자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았기에 헤로디아와 딸 살로메가 공모해서 벌인 살인극이었습니다(마 14: 1-12). 베다니 지역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이 여기까지 끌려와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을 잠시 연상해보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흰 돌의 도시 암만으로 가는 길> 

이제 멀리 요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가야했습니다. 차창밖에는 단조로운 사막 지대와 돌산이 계속되었습니다. 간간히 양과 염소가 뒤섞인 떼를 이끌고 가는 목녀(牧女)가 엿보였습니다. 목자하면 흔히 남성을 연상하지만 현지에 와보니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가이드가 들려주는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습니다. 양떼 틈바구니에 왜 염소를 섞어두는지 아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양이란 짐승이 워낙 어리석고 시력이 약해서 자기들끼리 내버려 두면 압사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즉각 교회 안에도 선량한 양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나운 염소가 함께 섞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늘 정신 차리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특별한 뜻과 은혜 때문이지요. 

몇 시간을 달려서 뉘엿뉘엿 해가 질 때 암만에 도착했습니다. 인구 2백만의 흰 돌로 된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숙소에 가기 전에 우리는 돈키호테라는 아랍 현지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양고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단원들 가운데 양갈비가 먹고 싶다는 타령이 있었는데 여행사 측에서 특별 서비스를 제공한 것입니다. 요르단에 도착해서부터 버스가 워낙 작아서 짐을 차내 복도에 까지 실어야 할 정도로 고생이 많았는데 여행사 측에서 사과의 뜻으로 한턱 푸짐하게 낸 것입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에는 요르단 부부가 아이와 함께 외식을 나온 모습이 보였습니다. 서너 살 정도 되는 사내아이가 우리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습니다. 온 세상의 아이들은 누구든지 예쁜 것 같습니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일 터인데도 제가 오라고 했더니 제 품에 안겼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여러 권사님들이 돌아가며 안아주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이 이 광경을 물끄러니 바라보면서 아무 제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기 엄마는 보수적인 무슬림인지 눈만 내놓은 채 온 몸을 검은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히잡을 쓴 것이지요. 식당에 까지 와서 히잡을 쓴 그 여성이 음식을 어떻게 먹는가 유심히 보았습니다. 히잡 안으로 손을 넣어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참 불편해 보였습니다.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지 않을 요량으로 베일을 써야 한다니 참 이해하기 어려운 관습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다 먹지 않고 남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양갈비 요리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고소한 맛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 일품요리를 포식했던 것이지요. 버스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은 양고기와 더불어 눈독 듯 해소되었습니다. 그 날 밤 우리는 암만의 Jerusalem Intercontinental Hotel에 투숙해서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4월 29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기 위하여 식당으로 가다가 마산 합성교회의 구동태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교인들을 인솔하고 성지순례를 오셨는데 우리와는 반대로 이스라엘부터 먼저 갔다가 요르단을 거쳐 이집트로 나갈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참 좁은 법입니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달려가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느보산에 올라갔습니다. 요르단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느보산이었습니다.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한 25km를 달려가니 메데바(Medeba)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그 근처에 해발 710m의 느보산의 시야가(Siyagha)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느보산은 중동 지역의 여타 산들과 비슷하게 나무가 거의 없는 돌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서남북 사방에 대한 전망은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난 명산이었습니다. 

저는 신명기 34: 1-12절 말씀을 가지고 모세의 최후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기대가 컸고 가슴이 설렜습니다. 모세는 120세였지만 안광이 빛났고 기력이 정정했습니다. 결코 죽을 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죽기를 원하셨습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40년 동안 그토록 고생했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 채 죽으라니 참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느보산 정상에서 멀리 요단강 건너 편 가나안 땅을 보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신 34: 1-3). 느보산 정상에 와 보니 이 말씀이 그대로 체감되었습니다. 

그 날 따라 날씨가 얼마나 청명한지 가시권이 엄청 넓었습니다. 멀리 사해의 반짝이는 물빛과 요단 강 건너 편 여리고 까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때로 예루살렘 지역의 감람산은 물론이고 헐몬산의 만년설까지 비록 막막할지언정 다 식별할 수 있을 정도라니 전망이 얼마나 좋은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왼쪽으로 사해와 오른쪽으로 요단강과 여리고 지역을 둘러보면서 잠시나마 깊은 감회에 빠졌습니다. 모세의 심정이 되어 본 것이지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서운하지만 자기의 소임을 다한 뒤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를 비롯한 신세대가 한다는 사실,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작 모세의 비범함은 가나안 입성 금지를 받아들였다는 사실보다 그의 신비한 죽음에 있습니다. 자연사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정정한데 하나님께서 죽으라니 죽었습니다. 누구 말대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안락사 시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느보산 어딘가에 모세가 죽어 묻혔을 텐데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어 신격화되고 우상화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것이지요. 

초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묘지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다가 4세기 말경 모세의 빈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거기에 모세를 기념하는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해가 갈수록 이 교회는 점점 커져서 비잔틴 시대에는 수도원과 세례소, 성물실, 성모 마리아 기념 채플 등의 부속 건물들을 지어 중동 성지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교회 단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느보산 위의 모세 기념 교회는 페르샤인들과 7세기 아랍인들의 침략을 다 이겨내고 적어도 9세기 까지 약간의 변화만 겪은 채 그대로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후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30년대와 70년대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교회 터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날 이 교회는 모세 기념교회(Memorial Church of Moses)로 복원되었는데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관리하고 있었으며 특히 총천연색의 자연석을 촘촘히 박아 만든 모자이크가 유명했습니다. 비잔틴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4세기 교회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의 보존 상태는 양호했습니다. 특히 세례소와 성모 마리아 기념 채플 바닥의 모자이크가 정교했습니다. 세례소의 모자이크는 기하학적 장식에 둘러싸인 채 농부들, 사냥꾼들, 각종 새들과 짐승들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채플은 두 마당과 번제물을 바친 제단을 가진 예루살렘 성전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느보산의 모세 기념 교회 앞 정원에는 모세의 놋뱀 이야기를 연상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지오바니 판토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세의 지팡이와 십자가를 복합해서 형상화한 철기둥 위에 구리뱀을 감아 놓았습니다. 민수기 21: 4-9절에 보면 에돔 땅 호르산 근처에서 직선으로 가지 못하고 우회해서 행진을 하게 되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쏟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을 푸셔서 숱한 사람들이 죽어 넘어지자 모세가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구리로 불뱀 형상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산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요 3 14).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듯이 죄와 죽음의 불뱀에 물린 인생들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면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높이가 근 10m 이상 되는 놋뱀과 십자가를 합친 이 조형물은 볼수록 많은 의미를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조형물 아래에서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구리 뱀 사건도 요르단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새삼 성경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현장의 지리와 합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탄했습니다. 이 밖에도 가톨릭교회에서 세운 석상 조형물이 느보산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나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음이 유감입니다. 다만 여러 사람들의 얼굴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해놓은 것이 인상 깊었는데 아래쪽의 불평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꼭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만 넉넉하면 느보산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습니다. 아니, 느보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거쳐 온 모든 성지가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주 몇 달 동안 있으면서 천천히 음미해보고 싶었으나 짧은 시간에 많은 곳들을 둘러봐야 했기에 언제나 아쉬웠습니다. 그 날 오후 우리는 이스라엘로 넘어가야 했기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우리는 느보산을 떠나 요단강으로 향했습니다. 


<요단강물에 손과 머리를 적시며> 

성지에 가기 전 저는 요단강은 이스라엘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르단에서 간다니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니 요단강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소문에 듣던 대로 폭이 크지 않은 흙탕물이었습니다. 발원지인 헐몬산에서는 기가 막히게 맑은 샘물이지만 하류로 흐를수록 탁류가 되었습니다. 군사 요새를 방불케 하는 요단강쪽으로 가니 강 건너 편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는지 북소리와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요르단 쪽에서도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훨씬 여유가 있고 편해 보였습니다. 주변에는 희랍 정교회가 서 있었고 요단강 현장에서 세례 받은 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대개 정교회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요단강을 그냥 스쳐지나 갈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요단강물을 손에 적시니 교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머리에 요단강물을 적셔주기를 원했습니다. 저 한 사람을 제외한 17명 모두에게 재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물론 이미 세례를 다 받았기 때문에 비록 요단강 성수라고 할지라도 또 다시 머리에 끼얹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그냥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순간 이 요단강 성수를 물통에 담아서 한국으로 돌아가 세례 베풀 때 쓸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금방 부질없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세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지요. 천 번 만 번 세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세례를 먼저 받지 않으면 부질없는 일입니다. 세례는 내적 구원과 성결의 외적 표시(sign)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세례 받으셨던 그 요단강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혹시 정확히 그 지점이라고 할지라도 그 때 그 물은 흐르고 흘러 증발해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계속 새로운 물이 흐르기 때문에 요단강물이라고 해서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곳은 어디인지 성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성지 전역을 돌아다닐 때마다 하나의 확신으로 제 마음을 때리고 또 때렸습니다. 요단강을 떠날 때 요르단을 떠날 때도 되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요르단과 사람들은 푸근했습니다. 뭔지 모를 정감이 갔습니다. 우리의 가이드인 오경환 과장님과 현지인 가이드를 따라 국경 검문소로 갔습니다. 소문에 듣던 것과는 달리 요르단을 출국하는 것이나 이스라엘 입국도 그리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여성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우리가 워낙 선량하게 보여서 그런지 쉽게 통과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에 입국할 때 허리가 아픈 황정순 권사님이 찬 복대가 문제였습니다. 복대에 달린 자석이 보안 검색에 걸려 잠시 대기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내 해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점심시간이 넘어서 이스라엘로 넘어 가게 되었습니다. 


<벌거벗은 느보산에서 나와 세상을 보았다> 

요르단에서는 페트라와 모세의 므리바 샘, 느보산이 좋았습니다. 특히 느보산에 올라갔을 때 모세의 비장함에 휩싸였습니다. 시내산과 마찬가지로 느보산 역시 민둥산이었습니다. 나무나 숲이 전혀 없어서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방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늘 아래 하나도 숨김없이 나의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모세도 그랬고 저도 그랬습니다. 느보산에 올라보니 먼저 내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다음에 느보산은 전망이 기막혔습니다. 중동의 야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전투 지휘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동서남북의 지형지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세가 그토록 숙망했던 가나안 땅이 보였습니다. 요르단 지경임에도 요단강 건너편의 이스라엘 도시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나만 밝히 드러나는 장소가 아니라 세상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의 에돔과 모압, 암몬 족속들의 지역에 비해 요단강 건너편의 이스라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느보산에 올라보니 이것이 보였습니다. 

느보산에 올라보니 이와 같이 자신도 밝히 드러나고 세상도 밝히 드러나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버릴 것은 버리고 지족(知足),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하는 삶, 이것이 느보산이 가르쳐 준 교훈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신 34: 5-6).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