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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기념]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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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삼하 19:1~10)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황태자 시절에 윌리스 심프슨이라는 미국 출신의 여성을 만나 사귀게 되는데, 문제는 그녀가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으며 또한 귀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부친의 서거로 왕위에 오르게 된 에드워드 8세는 끝까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려고 했고, 그 결과 그녀의 남편은 조건 없는 이혼을 허락해 주었지만 영국 국교회와 의회는 이 결혼을 전혀 동의해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즉위한지 1년도 채 못 되어서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나의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할 수도 없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하야한 후에 끝내 심프슨 부인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의 사생활에 있어서는 그런 뜨거운 사랑을 발휘함으로써 ‘금세기 최고의 로맨티스트’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공인으로서의 생활에서는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영국의 적성국가인 독일의 히틀러를 좋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히틀러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찬했는가 하면, 히틀러에 의하여 임명된 독일 대사에게 공식석상에서 눈에 띄도록 편애를 보임으로써 영국 수상으로 하여금 속병을 앓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퇴위 후에도 독일을 방문하여 나치 관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히틀러와 직접 면담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 8세의 이런 친 히틀러적인 언행은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프랑스를 침공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영국 정부는 그를 서인도제도에 있는 영국 식민지인 바하마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전쟁 기간 내내 거기에 머물도록 조처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정(情)’이라는 것은 아무에게나 베푼다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은 결코 아니며, 반드시 그 대상과 경우를 잘 판단해야 하며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인데, 다윗 왕 역시 이 점에 있어서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제 곧 ‘6.25 전쟁’ 58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과연 어느 누구에게 모아져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그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원흉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1혹이 요압에게 고하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으로 들어가니라 4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압살롬 왕자는 자기의 배다른 형인 암몬을 살해하는 끔찍한 죄를 저지른 후에 한동안 왕궁에서 쫓겨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 왕의 용서를 받고 다시 환궁하게 되었었는데, 돌아오자마자 압살롬이 시작한 일이 바로 이제는 자기 아버지를 반역하는 모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사병을 모으고 다윗 왕에게 상소하러 오는 백성들을 이간질하여 그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등 4년 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드디어 헤브론에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반역을 자신의 핏줄을 받고 태어난 아들로부터 당하게 된 다윗 왕은 그 치밀하게 계획된 압살롬의 반란의 거센 기세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수도인 예루살렘 성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오르기까지 됩니다.

  간단하게 거사를 성공시킨 압살롬은 예루살렘 성을 차지한 후에 왕궁 지붕 위에서 백주에 온 백성들이 보는 눈앞에서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을 함으로써 왕권 계승을 과시하는 파렴치한 짓까지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다윗은 여전히 자기를 따르는 군사들을 정비하고 요압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압살롬의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치르게 하는데,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다윗 왕은 자기 군사들에게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하지만 그 전투 중에 압살롬이 그 긴 머리털 때문에 상수리나무에 걸리게 되자, 요압은 그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가슴을 창으로 찔러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그 승리의 소식을 어떤 “구스 사람”이 전해 주었을 때, 다윗 왕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오직 압살롬의 생사여부만 캐어묻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하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앞서 읽었던 본문에 나온 대로, 다윗 왕의 그런 모습이 전해지자 온 백성들은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즉 마치 ‘패잔병처럼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서’ “가만히 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행동은 ‘아버지로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지만 적어도 ‘왕으로서는’ 크나큰 잘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식에 대한 혈연의 애착에만 사로잡히게 됨으로써 나라의 온 백성들에게 정신적인 혼란을 불어넣어 준 셈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역 도당을 무찌르고 신나는 개선의 입성을 해야 할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자기네들이 죄인이 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윤리적으로 보나 법적으로 보나 국가와 민족적으로 보나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나쁜 짓을 저지른 죄인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반역하는 불효막심한 짓, 국가의 인재들을 배반자로 만들고 백성들을 오도한 것,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던 이스라엘에 동족끼리 칼을 들고 서로 죽이는 전쟁을 일으킨 만행, 왕실 후궁들을 백주에 강간하는 낮 뜨거운 범행의 장본인이 바로 압살롬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라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아들의 신분으로 했으니 더욱 악한’ 범죄가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의 그 모든 악행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순식간에 다 잊고, 그 대신에 단 한 가지, 그저 자기 아들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그 사사로운 정에만 사로잡힌 처신을 보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민족 최악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원흉의 범죄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얼버무려 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남침 적화통일의 야욕을 품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후에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선전포고도 없이 비열한 침략전쟁의 명령을 내린 자는 바로 김일성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변명이나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최대의 반민족적 행위요 파렴치한 짓이며 극악한 범죄일 따름이었습니다.

  이런 간단하고도 명백한 역사를 두고서도, 아직도 ‘북침론’ 운운 하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군사학적으로 말할 때 공격하는 쪽은 방어하는 쪽보다 적어도 세 배의 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6월 25일 아침 서울 시내에서는 “국군 장병들은 속히 귀대하라.”는 방송이 계속 나왔는데, 왜냐하면 그날은 바로 주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인들이 외출을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그런 공격 개시일에 군인들을 외출 보낼 군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간단한 역사를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이 명백한 사실을 어처구니없게 왜곡시키는 소리만 이 나라에서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소위 ‘역사 바로 세우기’에 그렇게 혈안이 된 사람들이 무슨 ‘6.15’라는 날을 제 멋대로 만들어 내어서 이 ‘6.25’의 역사를 슬그머니 덮어버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6.25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같은 민족이니까 화해해야 한다.’는 말로 은근슬쩍 넘기려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자들이 그렇게도 혐오하는 친일파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 아니라서 아직 용서 못해 주는 것입니까?
  박정희 대통령 같은 사람은 자기네들과 같은 민족이 아니어서 그 명백한 경제발전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의 과오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정말 ‘개가 들어도 웃을 소리’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이 6.25전쟁 도발과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를 그런 식으로 역사책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그 장본인들이 그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사과하기는커녕 남침 행위 자체를 여전히 인정도 하지 않고 있는데, 아니 그 후에도 민간 항공기를 폭파시키고 국가 각료들을 폭사시키고 납북 어부들은 단 한 명도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데, 도대체 북한공산정권이 남북 간의 평화공존을 위해 보여 준 제스처가 어느 구석에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 6.25의 원흉은 지금도 여전히 ‘무력 적화통일’의 야망을 조금도 버리지 아니하고 아예 한술 더 떠서 원자폭탄까지 만들면서 협박을 해 오고 있는데, 어디에 진정한 화해무드가 있다는 말이며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원자폭탄이 ‘민족의 자산’이 된다는 소리입니까? 

  지금 제가 어디 미쳤습니까?
  우리 제발 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을 합시다.
  ‘같은 민족이니까 사랑해야 한다.’고요?
  ‘같은 민족에게 총구를 겨누었으니까 그 죄가 더욱 큰 것’ 아닙니까?

  ‘6.25 전쟁’은 오직 북한이 볼 때 ‘적화 통일전쟁’일 뿐이지, 대한민국에게는 어디까지나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동족으로부터 배반당하고 침략을 당한’ 비극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파괴하려고 전쟁을 일으킨 공산독재정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 한민족을 전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비열한 동족 배반의 전쟁을 일으킨 원흉을 미워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58년 전에 동족상잔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그 야망을 조금도 달리 하지 않고 있는 이 극악한 자들의 범죄를 ‘민족애’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얼버무리고 역사를 왜곡시키려는 말에 결코 현혹되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이 대한민국을 지켜낸 구국 영웅들의 희생을 끝까지 기억해야 합니다. 

  5절 이하 7절에 “5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 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 왕이 그처럼 국가 반역의 주모자 압살롬에 대한 인간적인 정에만 끌려서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고 요압 장군은 기가 찼습니다.
  그처럼 심각한 국난의 위험을 극복하고 나라를 되찾게 된 이 기쁜 순간에 왕이라는 사람이 그처럼 온 백성의 기분을 착 가라앉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의 그러한 행동은 지금 요압이 지적하듯이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며 그들의 혁혁한 구국 공적을 마치 “멸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계속되는 8절에서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라는 말은 ‘다윗 왕이 자기를 배반한 아들을 사랑한다.’는 뜻이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라는 말은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여 싸운 자들을 오히려 미워하는 듯이 처신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왕으로서는 결코 보여서는 아니 될 처신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그런 태도를 고치지 아니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라고 요압 장군이 말한 것은 결코 무슨 공갈협박이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신복들보다도 역모를 일으킨 아들을 더 사랑한다면, 앞으로 그 누가 이스라엘의 정통 국권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충성을 다하려 하겠습니까?

  국가기록포털의 통계에 따르면, 6.25 전쟁 때 우리 국군은 전사 13만 7천여 명, 실종 3만 2천여 명, 부상 45만여 명이라는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 전사자들 가운데는 제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게 된 저의 작은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실종자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북한에 불법 억류되어 있는 국군포로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천신만고 끝에 자력으로 탈북에 성공한 70여 명의 국군포로들에 의하여 확인된 숫자만 해도 약 560명가량이며 물론 더 이상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범상하게 누리고 있는 평화스러운 생존의 일분일초까지도 다 이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정말이지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 이 구국의 영웅들을 더욱이 ‘멸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6.25 전쟁’을 두고 우리나라의 어느 전(前) 대통령께서 ‘통일전쟁’이라고 공석에서 표현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통일전쟁’이었다면 그 6.25 전쟁 때 북한군을 맞아 싸웠던 이 국군 장병들은 ‘통일을 막은 나쁜 놈’들이란 말입니까?
  그 전쟁 통에 자식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 하고 고아가 되고 지금까지도 그 인생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는 6.25 세대의 피해와 고통은 ‘통일 시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까?
  아니 만약 북한이 또 한 번 그런 무력 적화통일을 시도해 온다면 이번에는 그때처럼 ‘통일을 막지 않고’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 말이 ‘실언’이었다고 진심으로 믿고 싶습니다.
  만약 실언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망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POW'(Prisoners Of War)와 'MIA'(Missing In Action)이라는 글귀를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국 군인들 중에서 어디엔가 아직도 송환되지 못하고 억류되어 있는 ‘전쟁포로’들과 ‘전투 중 실종자’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주요 도로 이름을 그렇게 지어 놓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젊은 바이크족들의 가죽 잠바 등에도 흔히 새겨져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 또는 조국의 이름으로 싸운 자기네 장병들을 끝까지 잊지 않으려 하는 공감대가 그 'POW' 'MIA‘라는 여섯 알파벳을 통하여 전 미국민에게 항상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도 월남전이나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찾아서 고국으로 송환해 가는 뉴스가 흔히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전인가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이 나라 젊은이들의 신성한 국방의무 수행을 두고 ‘군에서 썩는다.’는 따위의 저속한 말을 함부로 내뱉었던 것입니다. 

  6.25 전쟁 때에는 우리 국군 말고도 유엔군 역시 전사 4만여 명, 실종 9천 9백여 명, 부상 10만 4천여 명의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 사상자들의 절대다수는 물론 미군이었습니다.

  미국 워싱턴 시에 가면 링컨 대통령 기념관 근처에 그 한국참전용사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는데, 거기의 기념조각상 아래에 보면 ;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우리나라는 그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나라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소명에 응한 조국의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나라’란 물론 미국을 가리키고 ‘그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나라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란 바로 우리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그 미국 젊은이들의 피의 빚을 진 우리들은 이 우방의 희생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어느 교수라는 작자가 “6.25 때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이 대한민국을 도와주러 오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훨씬 더 일찍 끝났을 터이니 그 말도 맞기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또한 ‘북한의 남침에 아무 저항도 하지 말고 그대로 나라를 통째로 넘겨주었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고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의미와 꼭 같은 것 아닙니까?
  어째서 우리 자녀들이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 그렇게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도 이런 따위의 교수로부터 이런 친공사상에 세뇌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그 교수는 자기 자식을 왜 김일성 대학에 보내지 않고 굳이 그런 ‘나쁜 나라’ 미국에 유학을 보내는지 저는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맥아더 동상을 제거하려고 했던 자들이 지금은 ‘미국 쇠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린다.’고 데모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미국 쇠고기 매일 먹고 있는 미국 사람 2억 중에서 광우병 환자가 단 한 명이라도 나왔답니까?
  그리고 미국 쇠고기 먹기 싫으면 자기가 안 사먹으면 될 것 아닙니까?
  안 먹겠다는 것을 누가 억지로 먹이겠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우리나라에 수출해 봐야 팔리지도 않는 쇠고기를 계속 어디에다 냉동시켜 두고 유통기한만 더 늘어나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FTA'는 빨리 체결해야 할 국가적 대사가 아닙니까?
  지금 그것을 반대하고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야당 대표가 바로 그 'FTA'의 열렬한 주창자가 아니었습니까?
  저 봉하마을에서 “나는 국민 건강을 생각해서 쇠고기 수입만은 막았다.”라고 생색내고 있는 분이 자기 대통령 시절에 미국 방문했을 때 그렇게도 ‘FTA’를 성사시키려고 안달이 나서 부시 대통령에게 ‘쇠고기 수입’을 직접 약속하고 왔던 당사자가 아니었습니까? 
  현재로서는 미국의 차기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후보인 오바마 같은 사람은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한국과의 FTA가 미국에 불리한 조건이기 때문에 다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늘 같은 지구촌 시대에 무슨 대원군 시절 같은 ‘쇄국정책’으로 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소리입니까?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했던 나라가 이상하게도 미국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무 근거도 없는 일을 두고 반감만 키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침략한 공산독재자는 사랑하고 그 마수로부터 이 조국과 국민을 지켜 준 우방을 미워한다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국군포로나 서해교전 전사자들보다도 김정일 눈치를 더 본다는 것은 이것 정말 정상적인 사람 낯짝 가지고서는 못할 일 아닙니까?

  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고 대한민국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합니까?
  왜 이런 말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수구 꼴통’의 소리로만 들리고, 그 대신에 ‘휴교 데모’한다는 유언비어를 아무나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30분 안에 전국 학생들에게 다 퍼지게 되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촛불만 들고 거리에 나가면 다 ‘애국소녀’가 되고, 폴리스라인을 돌파하려 하는 데모 대원을 방패로 막는 경찰은 ‘과잉진압’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조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고 그렇게도 가난했던 이 나라에 지금도 모든 개발도상국가들이 부러워하며 모델로 삼고자 하는 기적적인 경제부흥을 눈물과 땀으로써 이룩해 놓으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지금 바로 이 예배당 안에서도 여러분들과 나란히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눈앞에서 친북반미 데모 따위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대한민국의 국권을 지키고 우리의 생명을 구원한 이 ‘구국 신복’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고 그들의 공을 ‘멸시’하겠다는 것입니까?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다 죽었더라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라는 요압 장군의 한탄대로, 정말 국군과 유엔군이 다 죽고 공산주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여러분들도 ‘마땅히 여기실 뻔’ 했다는 말입니까? 

  특히 우리 기독청년들과 기독학생들은 이런 기만에, 이런 선동에, 이런 ‘역사 뒤틀기’에 제발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민족이 한번 속고 한번 당했으면 됐지, 또 여러분 세대까지 공산주의의 손아귀에 걸려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일말의 가정조차 하기 싫은 일입니다.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이 조국의 후손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들이 알지 못했던 남의 나라의 자유 수호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쳤던 구국 영웅들과 우방국의 귀중한 희생을 최소한 잊지는 아니하는, 아니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8절 이하 10절에 보면, 다윗 왕도 그제야 ‘반역한 아들’과 ‘구국의 신복’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세를 바로잡고서 민심 수습과 국가 재건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역시 ‘민족의 반역자’가 누구이며 ‘조국의 구국 영웅’들이 누구인지를 똑바로 깨닫고 기억해야만 진정 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대하고 민족통일의 앞날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한국전쟁 미군참전용사의 기념비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자유란 그저 ‘평화’만 외치고 ‘반전데모’만 한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은 그런 자유를 박탈하려는 공산독재자의 마수를 겪어 본 사람,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리면서 싸워 본 사람만이 그 의미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저 휴전선 북쪽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 남쪽에서 태어나게 해 주신 것에 대하여 자다가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2차 대전 후의 모든 신생국가들이 다 공산화되든지 아니면 사회주의로 전락해 버렸지만 오직 대한민국만이 유일하게 민주주의 국가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과 그렇지 못한 북한이 이제 와서는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릅니까?
  우리는 몸매 관리 때문에 식사량을 줄이려고 애쓰면서 살게 될 정도이지만, 저쪽은 산에서 풀뿌리 캐어 국을 끓여 먹으면서도 거기에 넣을 된장 한 숟가락이 없는 형편입니다.
  이쪽은 명백한 정치적 데모까지도 ‘문화제’라는 미명으로 자유롭게 모여서 서울 도심 한 가운데 교통을 마비시켜도 기껏해야 ‘훈방 조치’로 끝나는 사회이지만, 저쪽은 요즘 같은 시대에도 인터넷이나 유선전화는커녕 편지로도 자기 나라 밖으로 마음대로 소식 한번 전하지 못합니다.
  여기야 술주정뱅이에게까지 지나칠 정도로 인권을 보장해 주느라고 지구대에 유치장까지 없애 버렸지만, 북한은 한 명이 걸리면 온 가족이 함께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서 한 끼에 강냉이 ‘낱알’ 29개를 먹으면서 죽을 때까지 중노동만 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겨우 휴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거의 ‘천국과 지옥’ 같은 차이라고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지 이래도 고마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세워 주셔서 이 나라가 공산주의로 시작되지 않고 민주주의에 기초하게 해 주셨습니다.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선을 세계 각국에서 유엔군을 움직여서 우리를 도우도록 섭리하시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지혜를 주셔서 기사회생의 역전을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누가 뭐래도 북한보다는 몇 십 배, 몇 백 배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대한민국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이런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자를 미워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매국노이며 반역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동족상잔의 원흉을 더 사랑하고 구국 희생자들을 멸시하면 ‘조국과 민족이 지금까지 당한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한 화’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민족애’를 공산독재자 김정일이 아니라 오직 북한의 2천만 동포에게 꼭 베풀고, 우리의 ‘나라사랑’을 이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를 위하여 몸 바쳤던 선조들에게 감사하고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반드시 나타낼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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