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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하여 기도하라 (살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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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기도하라 (살후 3:1~5)

너무도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향하여 행진을 시작할 때의 기쁨도 잠시 시내 광야 길은 차라리 애굽의 노예 생활이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날마다 만나로 먹여주시고 또 메추라기를 주셨으며 또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셨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나오느니 원망이요 불평뿐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고생길도 다 끝나갑니다. 저 산만 넘으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인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 생각을 사로잡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멋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왔지만 막상 가나안 땅이 눈앞에 있다 싶으니까 한번쯤 미리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란 말입니다. 어차피 들어갈 땅이지만 그래도 미리 확인이라도 해야 더 신나게 들어갈 수가 있지 않겠는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한번 들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 모세에게 요청을 합니다. 우리로 미리 그 땅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는 그들의 불신이요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했으면 그대로 믿고 따를 일이지 정말로 그러한지 미리 살펴보겠다니 그럼 하나님이 거짓말쟁이라도 된다는 뜻입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뜻대로 허락하라고 하십니다. 그래 각 지파에서 대표자 한 사람씩을 뽑아 가나안 땅을 살펴보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가 대표들이 돌아와 보고합니다.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여기 그 증거로 우리가 그 땅에서 가져온 과dlf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곳에 이미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민족들이 참으로 덩치가 산만해서 우리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그들 앞에서 마치 메뚜기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에 빠져서 밤새 통곡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기 위해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 아닌가 하며 하나님이 원망스럽다고 합니다. 함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갈렙과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그들은 우리의 밥일 뿐이라고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 민수기 14장 28절의 말씀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신 지침입니다. “죽겠다, 죽겠다”하면 정말 그렇게 해주겠다는 것이며 반대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면 역시 그렇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놀랍습니다. 비록 어려운 상황에 있을지라도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절망 중에도 소망의 찬송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바울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유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먼저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주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 말씀이 세상 가운데 영광스럽게 퍼져나가기를 기도하고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은 곧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어진 말씀을 들은 대로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며 실제 삶을 통해서 그 말씀대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 그 당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박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칫하면 붙잡혀가서 목숨까지도 잃게 됩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대 놓고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사회가 혼란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엄격하게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인과 노예의 신분 차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엄청납니다. 그런데 노예도 들어가는 하늘나라에 주인이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신분의 고하를 벗어나서 서로가 형제요 자매라고 부른다고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종자로밖에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결국 뭐냐 주인과 노예가 서로 형제자매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기반 사회를 무너뜨리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고 하는 데야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섬겨온 모든 것들이 다 우상 종교요 가증한 것이라고 하는 데는 아주 질려 버렸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숨어서 쉬쉬 하면서 믿고 있지만 그 세력이 커지게 되면 언제 그들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바울이 옛적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 감옥에 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우리의 기준이지 세상 사람들로 볼 때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사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사람들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복음은 세상으로 퍼져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 예수쟁이들 하고 손가락질 받을만한 그런 모습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래도 칭찬을 받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도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욕먹을 짓이나 하고 있다면 어찌 말씀이 세상으로 그것도 영광스럽게 퍼져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끼리도 정말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사랑을 주고받아야 하지만 세상을 향해서도 이런 사랑을 유감없이 펼쳐 나가야 합니다. 일을 해도 조금도 불평하는 모습이 없이 솔선수범해서 앞장서서 일하며 일터의 분위기를 항상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손가락질 받을만한 그런 일은 하지도 말고 믿는 사람들이 무언가 달라도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세워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표정도 항상 싱글벙글 이어야 하고 말 한 마디를 해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요? 우리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유쾌한 말을 하면 우리의 삶을 유쾌하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것이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격려하면 우리 역시 격려를 받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씨를 심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가 네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돌려대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주며 겉옷을 벗어달라고 하거든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주쳐 싸우려고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더하여 그들이 기가 질리고 오히려 감동받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돼 못해가 아니라 안 되는 것도 될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긍정적인 믿음의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부정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법과 불의가 아니라면 끊임없이 베풀어주며 상대방을 나보다 더 세워주는 그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양보하면 다음에는 두 걸음 앞으로 갈 수 있는데 그것을 막무가내로 싫다고 할 이유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견뎌내야 합니다. 그것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비결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영광스럽게 퍼뜨리는 비결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부당하고 악한 사람이 다 사라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가면 갈수록 더욱 설쳐댈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고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노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따지지 마십시오. 끝까지 져주세요. 그냥 내 성질 다 죽이세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가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이 사라지길 바라지 마시고 그들의 부당하고 악한데 우리가 휘말리지 않기를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이 세상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사람만이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구주로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또한 부당하고 악한 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가 아니고서는 결코 참을 수가 없고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이기고 싶은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데 오히려 내가 먼저 져주게 되면 지금은 진 것 같은데 나중 보니까 오히려 이겨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지고도 이기는 비결이 바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능력으로 오늘을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최후의 승리자 마지막에 웃는 자로서의 귀한 삶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주께서 우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여 주시도록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지키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욱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인도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을 어디로 이끌어주셔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살리는 디딤돌을 놓으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마지막에는 자기 목숨마저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무엇으로 지으셨습니까? 바로 흙입니다. 금이나 은으로 우리를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흙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깨지지 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흙이 뭉쳐지지 않으면 그냥 먼지로 변해 풀풀 날릴 뿐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흙먼지로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흙으로 빚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흙으로 빚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흙을 잘게 부서뜨려야 합니다. 고운 가루가 되도록 부수고 또 부숩니다. 그리고는 채로 걸러낸 다음 물에 담가 놓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몰에 담갔던 흙을 꺼내 반죽을 친 다음 그것을 마구 짓밟고 짓이깁니다. 아주 떡이 되도록 짓이깁니다. 그리고 난 다음 물레에 돌려 모양을 만들어 나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선 그늘에 놓아 잘 말린 다음 유약을 칠합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 속에 집에 넣어 굽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꺼내 식힌 다음 유약을 다시금 바르고는 또 다시 불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때서야 예쁜 도자기로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도자기는 쉽게 깨집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흙을 반죽한 때 거기에 뼛가루를 섞습니다. 그래 가지고 굽게 되면 가볍고도 잘 깨지지 않는 본차이나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도자기 중에서도 최고인 청자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더 정성도 들이십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내가 철저히 부수어지고 짓밟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손에서 빚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도 유약이 발라져야 하고 불 속에서 구워져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뜨거운 불 속에서 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렇게 구워지되 조금도 금이 가거나 깨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부당하고 악한 자들이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부당하고 악한 일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부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맞서겠다고 내가 돌덩이가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수실 때 부수어져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부수어져야만 하나님이 나를 빚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도 불 시험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견디기 힘든 시험이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를 값비싼 최고의 명품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티가 들어가게 되면 그래서 도자기에 작은 점이라고 하나 박히게 되면 그 가치는 아주 떨어지게 됩니다. 심지어는 도공들은 그런 그릇을 가차 없이 깨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흠도 점도 없이 살아가도록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수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입술입니다. 그런데 그런 불평과 원망이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우리 마음의 생각으로부터입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그 자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과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큰 믿음을 바라지 마십시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역사는 일어납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말씀대로 살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할 때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먼저 말의 씨앗을 심고 그렇게 발걸음을 내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을 믿고 가다가 그들이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니 깨끗하여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친구를 위하여 내 목숨까지도 버리는 사랑으로가 아니고서는 어찌 견딜 수가 있겠으며 십자가의 고난까지 참으신 그리스도의 인내가 아니고서는 그 고통스러운 불시험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견디십시오. 정말 힘들고 지쳐서 나도 모르게 불평과 원만이 터져 나오게 될 때 얼른 감사의 말로 바꾸십시오. 왜요? 불시험은 곧 내가 질그릇으로 바꾸어지고 도자기로 바꾸어지는 마지막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자기에 유악은 누가 바르던가요? 바로 도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도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유약을 바를 때는 이게 뭔가 싶은데 불에 구워내고 난 다음 보면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 거기에 아롱거리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내가 부서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부수실 때 그냥 내어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불 가운데로 집어던지실 때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 불시험을 견뎌내게 되면 예쁘고 귀한 도자기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의 부르짖음처럼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닙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게 은혭니다. 너무 힘들다고요? 아니요 감사하십시오. 고지가 바로 눈앞입니다. 그러니까 성질낼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할 일입니다. 그 감사와 찬송을 따라 더욱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삶으로 하나님이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네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우리의 삶이 놀랍도록 바꾸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혼한 지 8년째, 여인의 얼굴은 어두움이 가득했습니다.
남편은 회사를 부도내고 도망중이라 연락이 되질 않는데 법원집달관은 매일같이 남편이 어디에 있느냐고 닦달하고, 아이들은 창피해서 학교를 못 다니겠다며 방안에서만 있었습니다. 여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 친정어머니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어느 날 무작정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엄마, 너무 힘들어요.”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갑자기 부엌으로 가서 냄비 세 개에 물을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는 달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고는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불을 끄고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사물이 다 역경에 처하게 되었단다. 끓는 물이 바로 그 역경이지. 그렇지만 세 물질은 전부 다 다르게 반응했단다. 당근은 단단하고 강하고 단호했지. 그런데 끓는 물과 만난 다음에 부드러워지고 약해졌어. 달걀은 연약했단다. 껍데기는 너무 얇아서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끓는 물을 견디어내면서 그 안이 단단해졌지. 그런데 커피는 독특했어. 커피는 끓는 물에 들어간 다음에 물을 변화시켜 버린 거야.” 
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으며 물었습니다.
“힘드니? 힘든 상황에서 너는 당근이니, 달걀이니, 커피니?”

누가 나를 부서뜨렸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나를 짓이기고 짓밟았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나를 불 속에 던지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왜요? 귀히 쓰는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부서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짓밟히고 짓이겨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불 가운데 있습니까?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나를 쓰고자 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고자 지금 나를 연단하고 계십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주시기를 위해서 또한 주께서 우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심으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고백한 욥기 23장 10절의 욥의 고백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신 시편 126편 5절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심으로 우리의 말한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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