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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갈 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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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갈 2:10~21) 
 
 
2008년 갈라디아서 강해ㆍ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안디옥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소개하고 그 사건을 배경으로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같이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바울과 교제의 악수를 함으로써 이방인도 할례 없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상호간에 확정했었습니다(9).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정죄 받을 일을 했고, 이 때문에 바울 면책한 일이 있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어떤 사람들이 오자, 할례자로부터 온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분리해서 물러났습니다(11-12). 그의 행위가 ‘위선’으로 지적받은 까닭은 복음에 대한 그의 내적 확신과 모순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28)이었지만 그 계시 때문에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납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34)는 줄 깨달았고 성령께서 이방인에게도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48). 그 후 베드로는 안디옥의 이방인 성도들과도 기꺼이 식탁에서 교제했습니다. 12절에서 ‘먹고 있었다’라는 미완료형 동사는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이 베드로의 지속적인 습관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교회가 기둥 같이 여길 만큼 큰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안디옥에 있었던 많은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지도자인 바나바도 그의 행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13). 바울은 이 사건이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간파했습니다. ‘참 성도라면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급속히 확산되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복음의 핵심을 뿌리째 흔드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자 앞에서”(14) 베드로를 면책함으로써, 그리고 이제는 그 사건을 편지에 공개함으로써, 복음을 왜곡하는 이 심각한 악영향을 단호히 차단하려 했습니다.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1세기 상황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통치와 이교도들의 영향 하에서 민족적 정체성 유지에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음식문화’를 고수함으로써 선택 받은 독특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애썼습니다. 바리새인들에 관한 랍비 전승 중에서 약 67%가 식탁교제와 관련되어 있을 만큼 음식문화는 유대인들의 정체성 보존에 있어서 핵심 사안이었습니다. 그만큼 음식문화에서의 일탈은 격렬한 저항을 가져왔습니다. 예수께서도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고(막 2:16), 제자들 또한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다가 비난을 받았습니다(마 15:2). 결코 음식문화에서 일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사상과 정서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문제였고, 유대 성도들 역시 그러한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두려움은 그 시대 상황을 알면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의 행동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성은 없었지만 베드로의 행동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수호를 복음 수호보다 중하게 여기는 행동이었습니다. 유대문화를 복음보다 우위에 놓음으로써, 마치 기독교를 유대종교의 한 분파처럼 만드는 행동이었습니다. 자기는 음식문화에 있어서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서도 유대인답게 사는 것이 옳은 것처럼 암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14). 그의 행동은 공개적으로 악영향을 미쳤으므로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고 교정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딤전 5:20). 

복음이 다른 문화권에 전파될 때, 복음 그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문화의 옷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도 미국의 성공주의 문화가 복음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획득과 성취를 성공적 삶으로 규정하는 서부 개척 시대 미국인의 문화는 마치 복음처럼 한국 교회에 확산되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목회의 성공여부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획득과 성취라는 업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목회의 초점은 복음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보다 빨리 교인수를 늘리는데 관심을 두게 되었고, 성경적이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성공적으로 큰 예배당을 건립하려고 애쓰는 형태로 변형되었습니다. 

또한 제2차 대각성 운동은 찰스 피니 때부터 왜곡 현상이 심해져서 알미니안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도입되어 한국교회의 기독교 사상은 알미니안적인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구원이 감동적인 설득을 통해서도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확산 되었고, 교회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기보다 사람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 세상적인 지혜들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설득에 의해 변화된 사람들은 더 강한 설득에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이단들의 달콤한 설득에 매우 취약하며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신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한국 교회가 전수받은 복음은 우리 민족의 문화로 한 층 더 옷 입혀진 채 재 전파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샤머니즘과 결합하여 기복적인 형태로 확산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나를 부인 하는 형태로부터 나를 위해 주님을 부인시키는 형태의 기독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에서 나의 행복을 위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닌 예배자들을 위한 예배로 그 중심의 왜곡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상명하복의 질서를 중히 여기는 유교의 영향을 잘못 받아들여 교회의 직분들을 계급상의 차이로 이해하고 직분을 맡으면 승진한 것처럼 여기는 행태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많은 문화의 옷들을 덕지덕지 입고 있으면서, 그 악영향들은 그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문화가 중요하고,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문화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민족적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복음보다 더 우위에 둘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문화의 옷을 입지 않은 순수한 복음 그대로 고수되어야 하고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현상들이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다시금 성경을 기초로 복음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선포하는 일들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안디옥 사건을 소개한 이후에 ‘복음 진리의 핵심’을 밝힙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16a)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육체’가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16b).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조차 의롭다함을 받을 만한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시 143: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므로(렘 17:9),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을 뿐입니다(사 64: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구출 된 이후에 율법을 수여받았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있어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 되었기에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지되는데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범죄한 인간은 어떤 육체라도 율법의 행위에 온전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각종 제사제도를 통해서 율법을 정죄가 보류되는 길을 마련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들을 사하실 메시아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 방법을 시행하면서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옛 언약 하에서 살았던 구약적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오셨을 때, 당신님의 피로서 새 언약을 새우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동안 보류되었던 율법의 저주들뿐 아니라 앞으로 있을 모든 율법의 저주까지 몽땅 대신하여 받으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율법은 마침이 되셨고, 그분의 대속하신 은혜에 근거해서 그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율법의 행위와 무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선언은 저주 받을 죄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확증합니다. 한 순간에 신분이 변했으므로 내면적 성품까지 변화된 것은 아니지만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은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성품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고 칭하시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면,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전혀 복음을 따른 행동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사람의 우열을 결정하거나,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교제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행위도 정당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다는 점에서 동등하기 때문이며, 모든 성도는 오직 믿음을 통해 칭의를 받았다는 점에서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 가능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날 역시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육체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여 주심을 추구하다가, 율법적인 관점으로 보기에 범법자처럼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성도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17). 만일 성도가 무너졌던 율법의 요구를 다시 세운다면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들게 됩니다(18). 성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이며, 더 이상 율법 앞에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살려는 존재입니다(19).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바울과 함께 이렇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행위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고 ‘오직 믿음 안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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