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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녹슨 가마를 어찌하랴? (겔 24:1~14) - 음행,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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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가마를 어찌하랴? (겔 24:1~14)

1.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떠돌이 고행자가 절간에 와서 잠자리를 청했습니다. 그 가엾은 사람이 눈을 맞으며 떨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중은 내키지 않았으나 그를 들어오게 하면서 말했습니다. “좋아요. 하룻밤만 묵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는 절이지 여인숙이 아니오. 아침에는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그네가 묵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탁탁하는 이상한 소리에 중이 놀라 법당으로 갔더니,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나그네가 법당에 있던 목조 불상을 쪼개서 불을 지펴놓고 편안하게 쬐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이 소리쳤습니다. 
“정신이 나갔소?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나 알고 있소? 그건 불상이오. 당신이 부처님을 태우고 있단 말이요?” 
그러나 불이 서서히 꺼져갈 때까지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대기로 불을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또 무얼 하는 거요?” 중이 거듭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부처님을 태웠다고 하시길래 그 부처님의 뼈를 찾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유는 한 마디로 음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아내’로 여겼습니다. 

(호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바알 우상을 숭배했을 때, 이스라엘을 혼인관계를 더럽힌 음행한 여인으로 불렀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를 ‘영적인 음행’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내로써 남편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주변 강대국인 애굽이나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 등과 정치적인 동맹을 맺어 강대국의 막강한 힘을 의지하여 국가안보를 꾀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정치적인 음행’이라고 합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 유혹되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며,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고 왕을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행위, 하나님을 등지고 벌이는 정치적 행위를 ‘정치적 음행’이라고 합니다. 또한 “세상과 벗된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간음하는 여자”라고 부릅니다.(약4:4) “세상과 벗된 생활”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가까이, 더 좋아하는 생활, 하나님의 뜻보다 제 마음과 제 뜻대로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나라 민족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들 두 나라의 음행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어미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의 이름은 ‘오홀라’, 동생은 ‘오홀리바’라 불렀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오홀라’로, 남유다를 ‘오홀리바’로 비유한 것입니다. ‘한 어미’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본래 한 나라 백성이었다는 뜻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오홀라’로 부르신 이유는, 그 이름 뜻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홀라’는 ‘그녀의 장막(성전)’이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전이 아니고 자기가 제 맘대로 만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이 백성들이 편리하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실로 벧엘과 단에다 제멋대로 산당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 형상을 그곳에 세우고 바로 그 금송아지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제 맘에 드는 자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유월절 등 모든 절기도 제멋대로 비슷한 날자로 정하고 우상숭배하도록 했습니다. 

(왕상12:28-33)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남유다에 해당되는 ‘오홀리바’는 ‘나의 장막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남유다 예루살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전,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절기에 따라 드리는 예배드리는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가 사마리이고 남유다의 수도가 예루살렘이어서 사마리아를 ‘오홀라’로, 예루살렘을 ‘오홀리바’로 불렀습니다.

(겔23:2-8)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미의 딸이라.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진 바 되었었나니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 연애하는 자 곧 그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준수한 소년, 말 타는 자들이라. 그가 앗수르 중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스스로 더럽혔으며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진바 되며 그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바 되었더니 그가 그때부터 행음함을 마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 5절 이하에, 오홀라가 “행음하여 그 연애하는 자 곧 그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했다.”는 말은 바로 강대국 앗수르의 힘에 의존하는 친앗수르 정책을 펴 ‘정치적 음행’의 죄악을 범했다는 뜻입니다. ‘오홀라’, 북이스라엘의 이러한 친앗수르 정책, 즉 앗수르와의 정치적 음행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들이 의존했던 앗수르에 의해 수치를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겔23:9-10)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 정든 자 곧 그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붙였더니 그들이 그 하체를 드러내고 그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그 누명을 여자에게 드러내었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문을 행함이니라 

남 유다, ‘오홀리바’는 이렇게 북 이스라엘이 각종 우상숭배와 ‘정치적 음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한 사실을 분명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앗수르와 바벨론과의 정치적 동맹을 맺어 그들을 의존하는 정책과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겔23:11-2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 형보다 더 부패하여 졌느니라. 그가 그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말타는 자들과 준수한 소년이었느니라. 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것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용모는 다 존귀한 자 곧 그 고토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그가 보고 곧 연애하여 사자를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란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그가 이와 같이 그 음행을 나타내며 그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그가 그 음행을 더하여 그 젊었을때 곧 애굽 땅에서 음행하던 때를 생각하고 그 하체는 나귀 같고 그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연애하였도다.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진바 되었던 것을 오히려 생각하도다 

‘오홀라’의 음행 결과 패망한 사실을 보고도 똑같이 음행을 서슴지 아니한 ‘오홀리바’의 죄악이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입니다. 형의 음행 결과 멸망당한 사실을 통해 역사적인 하나님의 교훈과 뜻을 저버리고 형과 똑같이 음행했기 때문에 형의 죄악보다 더욱 더 악한 음행이었습니다. 이처럼 음행한 ‘오홀리바’, 남유다 역시 ‘연애’하던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겔23:22-23,35)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의 연애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격동시켜서 그들로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소년이며 다 방백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 다 말 타는 자들이라...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보다 앞서 영적 음행인 각종 우상숭배와 정치적 음행을 경고하며 하나님의 분명한 징계와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렘1: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2.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남유다의 ‘정치적 음행’을 비롯하여 각종 우상숭배와 부정부패, 그리고 타락과 사치 향락에 대해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2년전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경고했지만 그같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남유다의 음행에 대해 심각한 경고(본문 2절, 임박한 바벨론의 침공)를 다시 한번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겔24:2-5)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 너는 이 패역한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한 가마를 걸라. 건 후에 물을 붓고 양떼에서 고른 것을 가지고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

‘가마솥을 걸고 양떼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잡아 고기의 제일 좋은 부분인 넓적다리와 어깻죽지를 가마에 넣고 뼈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골라 그 가마에 가득 채워라. 그리고 가마 밑에 나무를 쌓고 물을 펄펄 끓여 뼈가 물렁물렁할 때까지 삶아라.’는 것입니다. “양떼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잡아 고기의 제일 좋은 부분인 넓적다리와 어깻죽지”는 왕과 왕족, 최고위층 관리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을 가마솥에 넣고 진국이 나오도록 삶으라는 것은 그 이유를 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겔24:6)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피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 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일일이 꺼낼지어다 

“피흘린 성읍”이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부정부패를 서슴지 않았고,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그 대상을 가리지 아니하고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온갖 음행과 범행을 일삼았다는 뜻입니다. “제비 뽑을 것도 없이”라는 말은 제비 뽑아 죄인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우상숭배하며 온갖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를 흘린 성읍”을 9-11절을 보면, 가마솥에 넣고 땔감나무를 무더기로 쌓아놓고 불을 피워 고기가 녹아내리도록, 그래서 국물이 졸도록, 그 뼈까지 태울 정도로 가마솥을 달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가마솥의 녹을 달궈서 녹을 없애고자 하는 것입니다. 

(겔24:9-11)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화 있을진저 피를 흘린 성읍이여, 내가 또 나무 무더기를 크게 하리라. 나무를 많이 쌓고 불을 피워 그 고기를 삶아 녹이고 국물을 졸이고 그 뼈를 태우고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하게 하라

사실 “피흘린 성읍”을 진무르도록, 그 뼈까지 태워지도록 삶도록 한 가마는 ‘녹슨 가마’였습니다. ‘녹슨 가마’에 좋은 양고기 넓적다리와 어깨고기, 뼈들을 가득히 담고 물을 부어 가마솥의 뼈가 무르도록 삶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마솥의 녹이 없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무를 더 많이 하여 가마솥의 국물을 졸이고 뼈들이 모두 태워지기까지 뜨겁게 가마솥을 달궈 녹을 없애보라는 것입니다. 양고기와 뼈들이 무르기까지 가마솥을 달궈도, 가마솥을 벌겋게 달궈도 결코 녹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삶을수록 우러나는 녹물과 더불어 더욱 더 역한 냄새만 진동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12)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곤비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어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 

‘녹슨 가마’솥의 녹은 예루살렘의 죄악, 음행한 ‘오홀리바’의 죄악, 최고위 지도계층들의 죄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양고기를 가마솥에 넣고 삶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뼈까지 다 태워 아주 역한 냄새가 진동하고 가마솥을 녹일 정도가 되더라도 녹이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지은 죄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마솥의 녹, 즉 온갖 음행과 죄악은 어떻게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 중요한 답을  13절에서 보겠습니다. 

(겔24:13)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오홀리바’ 예루살렘, ‘피흘린 성읍’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죄를 없이하고자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지은 죄악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해도 그 죄를 없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끊임없이 불타는 심판을 받는 이유는 그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져야만 정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무리 강력한 세제, 잿물을 쓴다 해도, 아무리 많은 세제를 풀어 세탁한다 해도 결코 “스스로” 그 죄악을 씻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렘 2:22)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욥도 마찬가지로 “눈 녹은 맑은 물로 씻는다 해도, 잿물로 깨끗이 한다 해도”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죄악을 씻어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욥 9:29-31)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인간 스스로 죄악을 씻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이나 행위도 헛수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서야 죄에 대한 분노가 그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예수를 믿고 마음에 받아들여야만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지고 죄사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그치고 사랑과 용서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고 의롭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과 행복은 바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김 받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감옥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하나님 앞에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세상 법을 모두 다 지켰다고 해도 역시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법을 어겨 세상 법에 따라 형기를 마쳤다고 해도 그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 여전히 죄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할 때만 죄 없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죄를 범한 죄인이라도 예수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죄 없다 하시면 그는 의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은 깨끗하다며 의롭다고 여기며 회개하지 아니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화, 하나님의 분노가 머물러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분노를 풀고 영원한 생명, 구원의 축복, 의인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황태자가 죄인들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을 시찰하게 되었습니다. 황태자를 만난 죄인들은 하나같이 억울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모두 억울한 사람을 잡아 가둔 게 틀림없었습니다. 황태자는 실망했습니다. 마지막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가 “무슨 죄로 들어 왔느냐?”는 황태자의 질문에 자신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를 짓고 들어와 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황태자가 그 중 가장 무거운 죄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죄수는 대답하기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죄가 가장 큰 죄였습니다.”고 했습니다. 황태자가 그 죄인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모르는 큰 죄인었소.” 황태자는 북받치는 눈물로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 죄인을 곧 석방시켜 자신의 비서로 삼았습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의 분노 아래 사는 것입니다. 

결국 ‘녹슨 가마’의 녹은 제아무리 많은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가마솥에 구멍이 나도록 불을 피운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녹슨 가마’는 때려 부수고 ‘새 가마’를 사용하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만 합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습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기우게 되면 기운 것이 그 옷을 잡아당겨 더 많이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되는 것입니다.”(마9:15-17)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의미합니다. “새 포도주”는 인간의 죄를 씻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뜻합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는 거듭난 사람의 마음과 믿음을 의미합니다. “새 부대”는 예수 믿고 새롭게 변화된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영, 성령이 함께 해야만 합니다. 이 성령은 예수 믿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십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낡은 옷”은 깨끗한 의의 옷이 될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옷, 낡은 옷은 죄를 상징합니다. 아버지 집을 뛰쳐나가 재산을 탕진한 탕자라도 회개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그 아버지는 아들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히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고 하셨습니다. 죄의 옷을 벗고 의의 새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의 옷이 마치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았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들을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하셨습니다(슥3:4). 이 낡은 옷을 입고는 아버지 집에서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입혀주시는 제일 좋은 옷,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낡은 옷”은 아무리 노력해도 새 옷 구실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좋고 값비싼 옷일지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결코 ‘아름다운 옷’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깨끗한 옷이라야만 아름다운 옷, 거룩한 옷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입혀주시는 옷을 “흰 옷”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이 ‘흰 옷’ 입은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물질적인 부요함에 만족하여 신앙생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활에 게을렀던 사데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계 3:3-5)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게을렀던 신앙생활을 회개하므로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만이 “흰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니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하는 무리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 7:10-12)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에 하나가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하고 묻고 그 흰 옷 입은 자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고 알려줍니다.(계7:13-14) 세상에서 예수 믿고 온갖 핍박과 환난을 겪는 중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어진 사명과 직분을 다 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묵은 밭은 갈아엎어야 되고,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 ‘흰 옷’을 입어야 하며, 낡은 부대는 버리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만 합니다. “새 포도주”는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새 포도주”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 성령입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온갖 음행으로 더럽혀진 가정과 사회, 온갖 음행으로 더럽혀진 이 땅, 이 나라 민족, “녹슨 가마”의 운명에 처한 이 땅을 새롭게 하는 길은 오직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 뿐입니다. 

“녹슨 가마”는 부숴버리고 ‘새 가마’를 받아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녹슨 것은 없습니까? 회개하고 성령으로 ‘새 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를 담는 복된 성도, 이 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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