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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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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8~15)


아주 악한 일만을 행하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부자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했고 마약과 여자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 독실한 성도로 보이기 위해 교회에 누구보다도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교회의 목사는 항상 양심에 걸렸지만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두 형제에게 말 한 마디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교통사고를 죽음을 당했습니다. 

장례식의 진행을 목사가 맡게 되었습니다. 
동생이 목사에 다가와서 거만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형이 성자라고 말하슈?” 

목사는 장례식 전까지 계속 고민을 했고 시간이 되어서 장례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목사는 설교를 했습니다. 

“고인은 마약과 여자에 푹 빠져 살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였으며 돈을 평생 나쁜 데만 사용하였습니다.” 

동생이 깜짝 놀라 눈을 부라리며 목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인은 그 동생에 비하면 성자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스갯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다가 설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는 선포입니다. 
설교는 주님의 기록된 말씀을 주의 성령의 조명을 받아 말씀을 해석하여 선언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는 절대로 타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설교가 어떻게 타협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십자가가 사라지면 타협이다.” 

『 지난주에 아내가 지구촌교회에서 실시한 셀 컨퍼런스를 참석하고 돌아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지구촌교회가 23,000명 정도가 모이는 대형교회인데 그렇게 부흥한 이유를 담임하고 있는 이동원목사가 설명해 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이동원 목사는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답니다. 

선교사가 이동원목사와 함께 대화를 하는 데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밖으로 나오면 그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이 많은데 왜 교회 안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경직된 얼굴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이동원 목사 궁색하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십자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그 답변을 듣고 이렇게 말을 이어답니다. 
“왜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십자가는 보면서 부활의 기쁨을 보지 못합니까?” 

이 말을 들은 이동원 목사는 다짐하게 된 것이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교회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목회철학으로 나름대로 한국에서 가장 설교를 잘 하는 목사, 영향을 막대하게 끼치는 교회를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이번에 컨퍼런스를 통하여 했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전해 준 이 말을 듣다가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영광은 부활의 주님을 소망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활의 기쁨에 목적을 두고 성도들에게 그 은혜가 흘러넘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함도 인정합니다. 
저 역시 우리 교회가 부활의 기쁨을 볼 수 있는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십자가를 주목하였습니다. 
이동원 목사처럼 부활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목회가 빠듯해서 그런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니면 너무 십자가에 몰입해서 인가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집중적으로 머물러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위안을 받은 것이 이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위안이었습니다. 
이 말은 아직도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십자가가 왜곡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십자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상당히 중요한 요절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바울은 오늘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가 승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상당수 많은 교인들이 십자가는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패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불편하고, 거북하고, 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여깁니다.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승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설이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인데 바울은 그 십자가가 승리하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그 분은 역설적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승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 여성들이 악서사리로 하고 있는 십자가의 목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십자가가 우리에게 승리가 되기 위해서 몇 가지의 절대적인 조건을 구비할 때 가능합니다.
무엇입니까? 

본론) 

1. 캐리그마적인 십자가를 믿을 때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알기 쉬운 말로 다시 표현하면 ‘사도행전적인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해석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고 난 뒤에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서슬이 시퍼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광야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광야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행 2:22-24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했고 그를 통하여 많은 자들에게 구원과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도행전 2:36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유대인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모든 자들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케리그마적인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케리그마적인 예수를 영접하고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이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들의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지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후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시기 위해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 땅의 심판의 주를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캐리그마적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전술했듯이 캐리그마적인 예수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구속을 참되게 믿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구속을 나의 십자가로 링크하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부활의 영광이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이동원목사의 간증 가운데 말한 외국선교사가 말한 부활을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보지 못한다는 말을 그래서는 저는 일면 인정하지만 또한 일면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치열한 목회 현장에서 직접 목회를 하는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외국선교사가 감히 볼 수 없는 영적인 전투를 봅니다.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는 외면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차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기쁨이 부활임을 200% 믿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의 은혜를 내 십자가의 은혜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은 2000% 믿습니다. 

서울 강남의 유수한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담임목사가 심방을 갔습니다. 
이유는 짝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 위로 차, 권면 차 심방을 간 것입니다. 

도착을 해서 여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부군께서 신앙생활 안하시는 여러 가지로 안타까우시지요? 
그러나 더 기도하고 남편을 위해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집사님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입니다라고 위로를 했습니다. 

그러자 여집사가 반색을 담임목사에게 다시 대답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제 남편이 신앙생활을 하도록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남편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거든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우리가 다원화된 시대에 살면서 진리가 불투명해지도록 사탄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술, 담배 안하고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고, 아이들에게 훌륭한 아버지이고, 아내에게는 둘도 없는 사랑스러운 남편이고, 사회에서는 이웃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엉망진창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예수쟁이들보다 낫다는 논리가 어떻게 들리십니까? 

설득력이 있게 들리십니까? 
그러나 명심하십시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벽한 삶을 산다고 인정하더라도, 아무리 도덕적으로 세상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연결시켜 고백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가 왜 승리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고, 구주가 되시는 것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인 것입니다. 
적어도 그것을 믿는 나에게는 십자가는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496장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절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이렇게 찬양하는 자의 고백은 이 찬송의 4절 가사에서 클라이막스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4절입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게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십자가가 승리가 되는 무한 영광이 우리들의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2. 십자가는 율법을 뛰어넘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승리인 이유에 대하여 율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데 참으로 기막힌 선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받는 것을 할례로 정해놓았습니다. 
이방의 땅에 세워진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은 율법의 잣대로 생각하면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기에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불쌍한 존재들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골로새교우들을 어떻게 위로합니까? 
십자가의 은혜가 있었기에 무할례자인 너희 골로새 교우들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감동이 적을까 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4절 다시 봅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이 부분을 표준 새번역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 문서들은 지워버리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불리한 빚 조문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을 뛰어 넘게 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율법이 무엇입니까?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제 정형외과를 들렸습니다. 
지난 목요일 체육대회 연습을 위해 가서 발을 맞추어 보았습니다. 
배구를 해야 하는 데 공격수를 맡았기 때문에 안 하던 스파이크를 많이 해야 했습니다.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오른 쪽 손바닥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서 X-RAY 촬영을 했습니다. 

촬영 결과를 가지고 말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뼈에는 이상이 없고 아마도 근육통인 것 같습니다. 소견을 말해 주었고 처방도 내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X-RAY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과도 같은 것입니다. 

뼈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인대가 늘어났는지 아니면 근육통인지를 분별해 주는 것이 밝혀 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들이 죄인인지를 알려주는 영적인 X-RAY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질문해 보십시다. 
만약에 촬영을 했는데 제 손가락뼈가 부러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깁스를 해야 합니다. 뼈를 붙이기 위해 깁스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뼈에서 진물이 나와 뼈가 다시 붙을 수 있는 것입니다. 

X-RAY를 촬영한다고 해서 부러진 뼈가 다시 붙는 것이 아닙니다. 
X-RAY를 촬영을 하면 부러진 뼈가 다시 붙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극단적인 율법주의 인 것입니다. 

이 극단적인 율법주의가 당시 골로새 교회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을 가르쳐서 오늘 본문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 2:8절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지난 1장을 강해할 때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당시에 골로새 교회에 들어와 있던 이단 사상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율법주의, 천사숭배주의, 금욕주의 등이었습니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지은 죄를 알려주는 몽학선생이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갈 3:2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은 우리들의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을 강력하게 골로새교회의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13-14절 본문을 해석 뒤에 다시 음미합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이것을 명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율법을 뛰어넘는 승리이며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은혜를 알았기에 갈라디아서라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런 고백들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갈 2:19-21절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또 고백합니다. 

갈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전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십자가가 이긴다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승리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부활의 영광을 궁극적으로 목표하여 달려가는 기쁨의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이는 결코 그 부활의 영광의 기쁨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고 먼저 십자가를 통하여 그 십자가가 나를 세상에서 이기게 하는 원동력임을 믿고 십자가를 사수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은혜롭게 부르는 찬양 가운데 ‘이제 내가 살아도’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함께 부른 후에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죽어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 군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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