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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울타리 (창 2:15~17, 창 3:1~9) - 믿음,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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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울타리 (창 2:15~17, 창 3:1~9)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아마 독일 통일 이전에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동독에서 베를린 장벽을 넘어 개 한 마리가 넘어 왔습니다. 서독의 개가 물었습니다. “얘, 너는 어떻게 목숨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넘어 왔니? 동독에는 먹을 게 없나보지?” 동독 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서독 개가 되물었습니다. “그럼 왜 온 거야? 집이 없어?” 동독 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진짜 궁금해진 서독 개가 계속 묻습니다. “정말 궁금하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거야? 먹을 거 있고 집 있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 참 이상하네.” 그러자 동독 개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모르는 소리 말아. 그런 건 견딜 만해. 모름지기 개는 짖고 싶을 때 마음대로 짖어야 되는 거란 말이야. 어디 마음 놓고 짖을 수가 있어야지. 답답해서 넘어 왔지.”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자유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속박을 당하고 갇혀서는 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by Patrick Henry)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게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필요하지만, 인간은 결코 무제한의 자유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베를린 장벽을 예로 들어보죠. 베를린 장벽이 동독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박탈하는 ‘속박의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서독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뭡니까? 정반대로 자유를 지켜주는 ‘보호의 울타리’였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물고기의 자유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물고기의 자유는 ‘물 속에서의 자유’입니다. 만일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면 자유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음입니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데 무슨 자유입니까?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고 행복할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100% 착각입니다. 무제한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에게 고유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만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요 죽음입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마약을 합니다. 자유입니까? 자기는 자유라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요?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은 겁니다. 계속 그러다 보면 자신이 마약을 하는 게 아니라 마약 중독으로 속박되는 겁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요 방종이며, 그 결과는 죽음이요 멸망입니다. 

인간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울타리를 넘어감으로 오히려 자유를 박탈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돌진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요 기쁨이요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거함으로 가장 복된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에덴 동산 : 하나님의 울타리   

본문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순서로 인간을 창조하신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가장 존귀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 에덴동산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울타리였습니다.

2:15절을 보시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서 ‘동산’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성경 원문을 보면 ‘간’(@g)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울타리를 치다’ ‘보호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동산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으로 보호하기 위해 조성해 놓으신 울타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라는 겁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에덴동산은 강이 흐르며 각종 나무 열매가 풍성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입니다. ‘에덴’이란 이름은 그 뜻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Vulgata)을 보면 에덴동산을 가리켜 ‘낙원’ 즉 파라다이스(‘에덴 동산에’ → in paradiso voluptati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에덴동산에 거주하게 하신 후 하나님께서 딱 한 가지를 제한하셨습니다. 2:16절~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나무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라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에는 한 가지 제한조건이 있었는데,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善惡果)는 먹지 말라는 겁니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과 외에도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이건 얼마든지 먹어도 됩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일종의 신호(signs) 즉 표지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 어디서나 잘 보이도록 중앙(center)에 위치시킨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인간의 자유를 의미하고, 선악과는 자유의 제한 범위를 표시합니다. 그 제한 범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게 마땅합니다. 그것이 생명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짐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은 ‘행위언약’(行爲言約)입니다. 순종의 행위를 통해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명령의 형태로 주어졌지만 분명히 약속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명령하면 그것은 약속이 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아이가 나갈 때 엄마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얘, 세상이 험하다. 밤 10시까지 들어와! 늦으면 혼난다!” 이것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약속입니다. 밤 10시가 넘어서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약속을 어긴 겁니다. 혼이 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식을 사랑해서,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약속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악과 금지명령을 주신 것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겁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그 영혼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생명입니다. 육체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품 안에 사는 영적인 생명은 더욱 중요합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품, 하나님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2] 인간의 배반 : 에덴의 상실(실락원)   

그런데 안타깝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여자가 그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비극의 근본 원인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이 등장하죠. 사단(마귀)을 가리킵니다. 사단은 본래 천사장(천사(天使長)이었지만,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악의 원조가 되었습니다.(이사야 14장 참조) 사단은 육체가 없는 영적 존재로 뱀 속에 들어가 활동한 겁니다. 간교한 동물인 뱀이 사단에게 이용당한 겁니다. 뱀이 여자에게 접근해서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모든 열매를 먹지 말라더냐?” 그 말은 들은 여자가 헷갈립니다. “글쎄 ... 다 먹을 수 있는데, 선악과는 아마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그랬나? 죽는다고 그랬던가?” 빈틈이 보이자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결코 죽지 않아!” 그러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간질합니다. 3: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새빨간 거짓말이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피조물인 인간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어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자신이 그렇게 되려고 헛꿈을 꾸다 저주를 받고 쫓겨나 사단이 된 거 아닙니까? 마귀 사단은 항상 이래요. 끌고 들어가서 같이 멸망합니다. 이른바 물귀신 작전이죠.   

이런 사단의 흉계에 속지 말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여자가 속아 넘어갑니다. 3: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지나친 욕망이 여자로 하여금 사단에게 넘어가게 했습니다. 결국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담조차 함께 따먹고 만 겁니다. 

그 후에 인간이 어떻게 됩니까? 사단의 말이 맞나요? 하나님의 말씀이 맞나요? 3:7절~8절.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된 것도 아닙니다. 죄를 범함으로 생긴 죄책감, 수치심, 공포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던 그들이 하나님이 무서워지고 피하게 된 겁니다. 범죄자가 끌려갈 때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얼굴을 가리잖아요. 죄를 지을 때는 당당했어도 일단 범죄한 후에는 죄책감과 수치를 느끼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미리 경고한 대로 인간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3:16~19절 보면 뱀에게 대한 저주(평생 기어 다니고 흙만 먹고 살게 됨), 여자에 대한 저주(임십의고통, 남편과의 갈등), 자연의 파괴, 남자에 대한 저주(노동의 수고), 그리고 죽음 등이 나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3:23~24절) 낙원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른바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이죠.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류의 비극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것은 이른바 ‘대표와 엽합의 원리’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아담과 그 후예로서 혈통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죄(原罪)를 갖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원죄의 속성을 갖고 살면서 스스로 생각과 언행으로 짓는 자범죄(自犯罪)를 저지르게 됩니다. 원죄와 자범죄로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죽음은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생물학적인 죽음과 구별됩니다. 이를 가리켜 ‘영적인 죽음’이라 말합니다. 하나님 품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기쁨, 축복, 생명을 상실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세상에서 온갖 것을 소유해도 왜 허망합니까? 왜 초조하고 불안합니까? 울타리 밖에 있어서 그래요. 

어느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신설학교가 개교했습니다. 공기를 못 맞춰서 교사만 지어놓고 운동장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하고 담장도 없이 시작됐습니다. 아이들이 체육 시간이나 방과 후에 공을 차고 노는데 불안합니다. 공이 길거리로 굴러가면 자동차도 다니고 행인도 다녀서 위험합니다. 교사도 학부모도 불안합니다. 그런데 담장을 세우고 나니까 아이들이 신나게 활기차게 뛰어다닙니다. 모두 평안해졌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는 학교 담장과 같은 겁니다.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요 생명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는 교도소 담장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의 구원 : 에덴의 회복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이요 에덴의 회복입니다.   

아담과 여자가 하나님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하나님을 피했지만, 다행히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부르십니다. 3: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공간적인 위치를 지적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품, 하나님의 울타리를 떠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시 들어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저주하시고 심판하셨지만,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고 선언하십니다. 창3:15절 말씀이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합니다. 장차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겁니다. 발꿈치를 상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잠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지만, 머리를 파하는 것처럼 사단을 격파하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고통 가운데 살다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바꾸는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그래서 3:15절 말씀을 가리켜 원시복음(原始福音 Proto-Evangelium)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선악과 계명처럼 행위를 통해 생명이 주어지는 행위언약과 다릅니다. 은혜로 주어진 약속을 오직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은혜언약(恩惠言約)입니다. 

놀랍게도 아담이 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3:20절.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지어준 겁니다. 하와는 한 마디로 ‘생명’(生命)이란 뜻입니다. 자신의 아내를 통해 태어날 후손이 구원자가 될 것임을 믿은 증거입니다. 말하자면 신앙 고백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신앙 고백을 보시고 조치를 내리십니다. 3: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여자가 범죄한 후 죄의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런데 가릴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속죄가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하나님의 속죄 방법입니다. 이 가죽옷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과정이 전제됩니까? 짐승이 죄인 대신 피 흘려 죽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대속의 원리’입니다. 이래서 구약 시대의 피의 희생 제사가 나온 겁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원리를 잘 정리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5:18~19. “18 그런즉 한 범죄(=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예수님) 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심판받고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지게 된 것처럼,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모든 믿는 사람들이 죄사함 받아 의인이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앞서 말씀드린 ‘대표와 연합의 원리’입니다. 
  

[4]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살기 : 믿음, 순종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울타리, 하나님의 품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안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① 믿음 :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다른 길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게 중요합니다. 

또 요1:12 보면 무슨 말씀이 있나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아들인 것과 십자가 대속의 구주임을 믿으면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자녀로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품 안에,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는 겁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에게 나아오면 죄의 무거운 짐, 사망의 고통 다 해결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 품 안에 있는 참 평안, 기쁨, 행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울타리 품 안에, 울타리 안에 들어온 영혼에게 부어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곧 에덴의 회복입니다. 구원입니다. 복락원(復樂園 Paradise Regained)입니다. 이 세상는 낙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품 안에 들어오면 그 안에서 부어주시는 평안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이 세상은 떠날 때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천국, 에덴 동산보다 더 좋은 낙원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겁니다. 

어린 아기가 칭얼거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졸려서, 배고파서, 아파서, 쉬해서 ... 그런데 다 해결해 준 후에도 계속 칭얼거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엄마 품이 그리워서 그런 겁니다. 엄마 뱃속에서 듣던 심장 고동소리, 숨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럴 때는 아기를 안아서 품 안에 안아줘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오직 하나님 품안에 안길 때 참 평안을 얻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고대 신학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행복을 찾아 방황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천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학문과 종교를 섭렵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쾌락도 추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참 평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난 후 참회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품 안에 안기기 전까지 제게 참 평안이 없었나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하나님 품 안에,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 영혼의 방황이 끝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한두 분이라도 아직 하나님의 울타리 밖에서 배회하는 분 있습니까? 들어오십시오! 이미 들어오셨나요? 절대 세상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참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② 순종 :  

일단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고 그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머물 수 있습니다. 

갈5:1,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예수 십자가로 우리는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영적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죄 짓는 방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유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죠. 마11:29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멍에가 아닙니다. 가볍다는 것은 비유해서 말하면 날개라는 겁니다. 날개가 무겁습니까? 나름대로 무게가 있겠죠. 그러나 그것을 잘라 버리면 추락합니다. 날개가 달려 있기에 창공을 마음껏 나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의 날개를 달아야 은혜의 창공을 마음껏 나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죄악에 짝하지 말고 세상의 화려한 것들에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방황하지 마십시오. 부디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항상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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