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1~4)

  • 잡초 잡초
  • 1802
  • 0

첨부 1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1~4)


중국의 유머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침대를 샀습니다. 이 사람은 이 침대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기를 자기가 병이 들어 아프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게 되면 자연스레 자기의 고급 침대를 자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속바지를 샀는데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이 친구가 침대를 산 친구의 병문안을 와서는 한쪽 다리를 들어 침대 위에 올려 속바지가 보이게 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무슨 병이 들어 이렇게 누워 있나?”
그러자 침대를 자랑하고 싶던 친구가 한 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자네나 나나 앓고 있는 병이 다 같군.”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인간에게 누구나 있습니다. 현대처럼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물질중심의 사회는 더 그렇습니다. 내적으로 쌓는 정신적 수양이나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게 취급합니다. 반면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돈이나 소유, 학벌, 지위, 성공 등은 크게 생각합니다. 세상 풍조가 이렇다보니 자신의 생각이나 선택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인정이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줏대를 가지고 마이 웨이(My way)를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숫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길만 가려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향하여 주님은 너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안달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생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5장 13,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드러나게 되어 있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는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결코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추면 감출수록 더 드러나는 것이 또한 제자들입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감출 수 없습니다. 빛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데 빛이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실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과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말라는 말씀은 결코 모순된 관계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진정 세상의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여러 심리적 요인들이 있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처럼 강력한 것도 없습니다.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2절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심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내가 구제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선행을 하고, 내가 이만큼 멋있는 사람임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성공하려는 이유 중 하나도 사람들의 인정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없었는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다가 가난하게 된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해 주었으면 하는 은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제를 하면서도 시선은 사람들을 향합니다. 자기는 가난해도 다른 사람을 돕는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리에 서서 길게 기도합니다. 자신이 경건한 사람임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금식하면서는 노골적으로 슬픈 표정을 보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 안에 자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입은 옷이나 사는 집이나 자기에게 편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편하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하는 옷을 입습니다. 자기의 형편에 맞지도 않은 비싼 옷을 사고 빚이라도 내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명품이 질이 좋고 자기에게 맞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품은 질보다는 그 이름 때문에 자랑하려는 의도로 소유합니다.

자기답지 않은 것은 불편합니다.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짓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수준이나 자기 본모습을 감추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는 불평과 분노, 교만과 거짓이 있습니다. 불평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결국 그런 세상을 향하여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이렇게 노력해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단계에 이른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자기처럼 인정받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거짓으로 자기를 꾸며야 합니다. 얼마나 부자연스럽습니까?

저는 자연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기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가끔 천혜의 비경이나 태고의 신비라는 수식어를 가진 아름다운 자연이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됩니다. 주로 석회동굴들이 그렇습니다. 삼척에 가면 환선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바위들이 샹들리에처럼 펼쳐져 있고, 폭포형태의 석주도 있습니다. 거대한 동굴 광장에 갖가지 모습을 한 만물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어떤 곳에는 에그프라이라 하여 마치 계란을 프라이한 모양의 석순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회동굴이 이런 모습을 형성하는 데는 5억 3천만 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바위는 수만 년에 1mm씩 자란다고 합니다. 이 굴은 너무 커서 미처 다 발견되지 못했는데 최근에도 발견되어 개방된 동굴도 있습니다(대금굴 2003년). 그러면 이 석회동굴은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위해서 이 수 억년을 기다려 온 것인가? 아닙니다. 자연은 단지 자기 길을 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지구 땅덩어리 속에는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천혜의 비경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다만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더 이상 사람 눈치 보는 인생을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 생각이 무엇이며, 자기 길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맹자 편에서는 대장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며,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며, 지지를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그 도리를 행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부귀의 유혹도 그 마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가난의 어려움도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고 한다.” 대장부는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생각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는 사람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구제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돈을 구제함에 넣으면서도 시선은 ‘이런 착한 나를 누가 보지 않나?’ 하는데 있습니다. 2절 말씀에서는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분다고 말씀합니다. 실제 유대교 회당에서는 큰 액수의 돈을 기부하면 뿔나팔을 불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주목하고 칭찬하도록 하였습니다. 구제의 순간 이 사람 마음 가운데는 자기 영광으로 가득 차 있지 하나님은 없습니다. 금식하면서도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경건한지 누가 봐주길 원합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면서도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누가 알아주길 바랍니다. 그러니 그 안에 어떻게 하나님이 거할 틈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행위의 동기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사람의 인정에 있는지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이 열매로 맺게 마련입니다. 그 열매가 감사와 섬김이요, 그리스도의 인격이라면 그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불평과 교만, 탐욕이라면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주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는 겸손과 사랑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자기 자랑에서 나온 것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시작했을지라도 죄와 사단은 우리 마음속에서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를 그릇된 길로 틀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이런 자들을 2절에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원어로 ‘휘포크리테스’라고 하는데 원래는 배우, 광대의 의미입니다. 배우나 광대처럼 자기 본모습을 속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위선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우리 목회나 우리 일이 잘못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일에서는 성공하고  자기 자신은 정작 버림받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여기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느냐라는 우리 신앙관을 보여줍니다. 다이아몬드를 캐러 간 사람에게는 금이나 은은 더 가볍게 보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너무 소중해서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를 알고 그와 함께 하는 이것이 가장 소중하기에 세상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태양만 바라보고 있으면 주위의 사물은 다 어두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런 존재가 되어 있습니까? 혹시 성공과 부흥, 성장과 규모 여기에 취해 그리스도의 빛은 형편없이 희미해져 버린 것은 아닙니까?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삶을 살 때 우리 인생은 중심이 잡히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잊고 내 안에 그리스도로 가득할 때 우리는 오히려 내 자아에 충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자기를 잊고 그리스도만을 위할 때 오히려 우리는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자가 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6:8-9)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태양을 더 집중하여 바라볼수록 우리 또한 빛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거울과 같습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향할수록 우리 더 반짝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자기 상을 받았다는 것(아페케인)은 상업적인 용어입니다. 그 뜻은 이미 계산을 다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다 받았기에 영원한 세상에서 받을 상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명하게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영광을 받는 순간 하늘의 영광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른손으로 구제하는 순간 그 사실을 왼손이 모른다는 게 가능합니까? 한 몸인 이상 모를 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자선을 행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요청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누가 구제하겠습니까? TV나 신문에서 광고될 때 사람들은 더 많이 자선을 행하는 것이 실정 아닙니까? 아무리 무명으로 하려고 해도 세상은 그것을 널리 알려 더 많은 후원자를 얻으려 하고 또 이렇게 대접을 받을 때 무언가 보람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아닙니까? 이유야 어쨌든 이렇게라도 하면 그 재물로 가난하고 어려운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차라리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즉각 알뿐만 아니라, 그 순간 나팔을 불더라도 자선을 행하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손이 너무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선과 나눔은 너무 적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부자들이 자기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자선을 하는 것은 하나의 미덕처럼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과 같은 기업가들이 한국에도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우리 소득의 몇 프로는 이처럼 나눔과 자선에 사용했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구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 동기가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전반적인 삶의 태도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선을 부지런히 행하되 하나님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에는 주님의 여러 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밀하게 행하는 자선만이 상대방을 제대로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이런 동기로 은밀한 자선에 대해 주로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랍비는 “은밀한 자선을 베푸는 자는 모세보다 크다”고 말했습니다. 자선은 사망에서 자신을 구하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하며 사망에서 구하는 자선은 “받는 자가 누구에게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주는 자가 누구에게 주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선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선하고자 할 때 누가 그것을 줍는지 모르기 위해 돈을 고의로 떨어뜨린 랍비도 있었습니다. “누구에에 무엇을 주어서 그로 부끄럽게 하기보다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말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은밀한 자선은 도움을 받는 자를 생각하는 자선이라 할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자기를 도운 사람에게 매이게 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자선은 상대방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게 만듭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자선이 거래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 되도록 만듭니다. 성경에 나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선행이라 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안 인은 강도 만난 자를 위험을 무릎 쓰고 도와주었습니다. 자기의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시간을 바쳤고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자기 물질을 드렸습니다. 하룻밤을 묵어가며 정성껏 간호하였고 떠날 때도 그 이후의 치료비까지 계산하는 배려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이름 한자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는 단지 어떤 선한 사마리아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울 뿐입니다.  

둘째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은 선행이 생활화된 사람의 선행을 말합니다. 선행도 가끔 하면 쑥스럽고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습관화되면 자연스럽습니다. 무의식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마지막 날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아버지의 복을 누릴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런 영광이 주어졌을 때 그들의 한결 같은 반응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지 몰랐다는 점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25:37-39)

이들은 구제와 선행이 일상화되어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주님을 대접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2) 주님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오십니다. 평소에 선행을 베풀던 사람이 이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할 때 그렇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면 얼마나 신경이 쓰입니까? 억지로 하면 이렇게 되지 못합니다. 자기가 선행했던 돈의 액수를 일일이 기억합니다. 그 날짜와 장소까지 기억합니다. 억지로 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기 시간과 물질을 다 바치는 선행을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기 집을 팔아서, 또 파출부를 해서라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 투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행을 행하는 것이 이처럼 좋아서 행하는 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도, 봉사하거나 헌금을 하는 것도 좋아서 해야지 마지 못해 하면 괴롭습니다.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우리가 자연스런 선행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는 선행은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분명히 알며 행하는 선행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흘러 보내는 통로에 불과합니다. 청지기가 매일 창고에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헤아립니까? 누구에게 얼마나 썼는지 일일이 계산하고 있습니까? 청지기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베풀 뿐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소유를 주장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계산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오른손이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미리 왼손이 알아 버립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선을 행할 때도 우리의 만족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이 순종을 통하여 우리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 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늘의 기쁨과 은혜로 갚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과 명예를 주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