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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보아야 하나 (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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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아야 하나 (창 1:1~5) 


저는 여러 성도님들의 사랑과 기도로, 여행을 잘 다녀왔다. 이번 관광을 통해서, 보고 느낀 점을 같이 나누기를 원한다. 관광(觀光)은 '빛(光)을 보는(觀) 것'이다. 빛은 우리 삶의 비전이요 희망이다. 빛은 단순히 눈에 비치는, 물리적 광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올바로 보려면,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가 없는 광경은, 볼 가치가 없다. 단순히 보고 먹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영어로 관광은(sightseeing)인데, sight(발견하다, 조준을 잘 맞추다, 겨누다) + seeing(보기, 봄)이란 말의 합성어다. 잘 보고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여행객들은, 여행을 단순히 보고 먹고 즐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행할 때 차안에서 잠만 자다가, 아무 것도 보고 느끼지 못하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진만 찍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분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은,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는 말을 즐겨 쓴다. 어떤 분은 자다 깨다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차안에서 사물을 보며 생각한다. 또 하나님과 연관해서 생각한다. 이것이 올바른 관광이다. 

히브리원전 구약성서에는 '본다'는 동사가 여려 개 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달리 표현하고 있다. 우리 성경에는 모두 '본다'로 나오지만, 히브리어 동사에 따라 각기 다른 동사를 사용하여, 그 뜻을 명확히 드러낸다. 

9개의 '본다'라는 동사(라아(  ), 힌네(  ),  자(  ), 마짜(  ), 나카르(  ), 샤바르(  ), 쉐카 (  ), 나바트(  ), 솨아(  )가 있지만, 여기서는 3가지 동사, (솨아, 나바트, 라아)만 살펴보고자 한다. 

1. 솨아(  ) - (창4:4-5)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카인과 아벨의 제사가 시작되면서, 최초로 나오는 동사는 '솨아'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열납하다'에 사용되었다. "아벨과 그 재물은 열납(  )하셨으나, 카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셨다." 이들 두 형제가 드린 제물은 민하(    )인데, 희생제물이 아니다. 

단순히 자기들의 생업에서 얻은 것을, 예물로 드렸다는 뜻이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들(복수형)과 그 기름 중에서 드릴 때, 자신도 믿음으로 함께 드렸다. 그런데 카인은 장자의 특권을 누리면서도, 단순히 땅의 소산물(단수형)을 드렸다. 이것으로 인간 행위는 끝났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으며, 옳고 그름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형제간의 불화를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이들에게 통고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나오는 동사가 솨아인데, '(도와주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보다, 놓치지 않고 지켜보다, 순식간의 일도 정확히 보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과 함께 예물을 정확히 보셨다. 그들의 정체가 투명하게 드러났다는 뜻이다. 인간은 물질에 관심이 더 많지만, 하나님은 물질이 아닌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고, '솨아'로 보신다. 카인은 이것을 몰랐기에, 예물을 드리면서도 죄를 지었다. 이 죄를 종교적인 죄, 하나님을 기만하는 죄로, 핫타(    )라고 한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고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보신다. 그러나 순간이지만,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살펴보신다. 욥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솨아)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치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하였다(욥7:19). 

침을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시고, '솨아'로 살펴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을 속이거나 기만할 수 없다. 하나님은 솨아로 보시기 때문이다. 카인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올바로 쳐다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17:7-8) "그 날에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솨아),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솨아)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즉, 종말의 날이 올 때에,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솨아'로 쳐다보아야 구원에 으르게 된다"고 솨아를 강조했다. 이번에 여행한 나라들은 솨아가 부족하였다. 러시아는 국교가 정교회고, 북유럽은 루터교회가 국교인 나라들이었다. 러시아는 5층 이상을 세우지 않았다. 성당이 제일 높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신 곳보다, 더 높이 세울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새는 더 높이 세웠다. 러시아는 사람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이기에, 자연적으로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인스턴트 식품이 적다. 맛은 없지만, 사람의 몸에는 다 좋다고 하면서, 도시락을 주었다. 

도시락에는 사과 하나, 오이 하나, 계란 2개, 검은 빵 2조각, 그리고 물 1병이었다.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이 없기에, 그렇게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전 이름은 소비에트연방으로 우리나라 남북한의 120배였다가, 체제붕괴로 15개의 나라가 독립해 나가고, 지금 러시아만 남았다. 

지금의 땅은 남북한의 78배나 되며, 인구는 1억 5천이 살고 있다. 그 나라에서만 11시간의 시차를 가지고 있는 엄청난 땅이다. 그 땅을 파면, 없는 것이 없이 다 있다. 90년대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은 많은 석유를 높은 가격에 팔아, 외화 보유국 3위가 되었다.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종교를 사용하면서, 수많은 아이콘(정교회에서 모시는 예수, 마리아, 성도, 순교자의 초상)을 사용하였기에, 미신적인 신앙이다. 그래서 아이콘이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북유럽은 모두 루터교인데, 올바른 복음을 받아들이기보다,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한다. 

이들은 평생 교회에 10번도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신자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헌금을 하지 않고, 나라에서 40-50%의 세금으로 걷어서, 복지와 교회를 운영해 나간다. 성직자는 공무원으로 나라에서 월급을 준다. 그래서 영혼을 전도하려는 모습이 없었고, 깨어 있는 영혼이 아니다. 

또한 결혼은 6개월 정도 살아보고, 결혼을 한다. 어떻게 살아보지도 않고 결혼을 할 수 있느냐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성경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자.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올바로 알고, 믿는 성도들이 되자. 


2. 나바트(  ) - (출33: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며(나바트)" 

(창15:5) "그를(아브라함)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나바트),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원문은 '하늘 방향을 우러러 보라 뭇별을 셀 수 있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별들을 셀 수 있는지 나바트로 바라보라고 하시면서, 지상에서 자손들의 번영을 약속하신다. 땅에서 아이를 낳는데도, 하늘을 향해 '나바트'로 바라본다면, 하늘의 복이 땅으로 이어진다고 하셨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진영에는 '모임의 장막'이라는 회막이 등장한다. 이 회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며, 중재자 모세만이 그 회막에 들어갈 수 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쉐칸야'(    , 하나님의 임재, 거하심) 현상이 일어난다. 가시적으로 구름기둥이 회막을 감싼다. 

백성들은 이 장엄하고 거룩한 광경을, 경외심으로 나바트(바라보다)하였다. 시선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자손의 약속을 위하여 하늘 쪽을 나바트로 바라보았으며, 백성들은 모세를 나바트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쉐칸야를 감성적으로 체험하였다. 

나바트(  )는 '바라보다, 내다보다, 주의 깊게 바라보다'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느끼는 현상으로 바라보고,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는 행위를 의미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면 안 된다. '나바트'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관심을 가지고 카인과 아벨을 지켜보셨다. 그리고 카인의 죄성과 아벨의 의로움을 아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적인 사실을 '나바트'로 바라보아야 한다. 앙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롯에게 소돔 성에서 이끌어 내신 후 (창19:17)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나바트)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소돔 성의 물질을 나바트로 바라보았기에, 망하고 말았다(창19:26). 

하나님을 '나바트'로 바라볼 때만, 인간은 자기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아벨은 '나바트'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물을 드렸기에, 하나님 역시 아벨과 그의 예물만 쳐다보신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이 하나님을 '나바트'로 볼 때, 놀라운 예술적 작품이 나오고, 문화가 발전했다. 

그러나 물질을 '나바트'할 때는,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시119: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나바트)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세상과 물질과 과학에 구원이 있지 않다.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자. 


3. 라아(  ) - (창1:4)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지으신 것을 보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창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라아)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라아(  )는 "보다, 이해하다, 선택하다, 준비하다"의 뜻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고 받아들이시는 행위요, 하나님께서 보고 선택하셨기에 준비하신다는 말이다. 예언자는 라아로 바라본다. 예언자를 나비(    )라고 하는데, 제사장과는 달리 세습적으로 물려받지 않는다. 대물림이 아니다.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예언자가 된다. 그래서 대체로 예언자는 소명에 응하게 되면, 그의 과거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모스와 예레미야는, 과거가 언급되어 있다. 평민 출신 아모스는 유다 남방 드고아 출신이며, 목자이자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부름 받아, 유다 최고의 예언자가 되었다. (렘1:11)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로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로에)". 아모스에게도 하나님은 오셔서 물으셨다. 

(암8:2)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로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다고 했고, 아모스는 여름실과 광주리를 보고 있다고 했다. 국가의 운명이나 거대한 환상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을 보았다고 했다. 여름 실과는 이스라엘의 종말을 본 것이요, 살구나무 가지는 유다의 종말을 지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았다. 

예언자의 통찰력으로 보았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는 '라아'인데, 하나님의 신호가 들어있는 동사다. 이는 육안으로 단순히 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언자만 아는 언어의 비밀이다. 살구나무는 솨케드(  )이다. 

동사 솨카드(  )가 되면 '경계하다, 잠을 자지 않고 감시하다'가 된다. 예레미야가 사케드를 보고 있다고 하자, 네가 본 것을 하나님께서 쇼케드(잠을 자지 않고 지켜보겠다)고 하셨다. 네가 본대로 지켜보면서, 유다의 종말을 가져오겠다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일생을 예언자로 살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있었기에, 지켜보시면서, 유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BC 586년 유다는 멸망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본 '사케드'와 같이 지켜보셨다. 

이스라엘의 여름은, 이글거리는 태양열로 모든 식물이 죽어간다. 그래서 여름은 '종말, 끝'이라고 한다. 여름 실과의 여름은 히브리어로 카이쯔(  )이다. 그런데 종말, 끝은 케쯔(  )이다. 아모스가 여름(카이쯔) 실과를 보았다고 대답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끝(케쯔)가 왔다고 하셨다. 

아모스의 예언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다. 그때가 BC 721년 경이다. 이렇게 두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장래운명을 지각능력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 시대를 바르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종말이 다가오면서, 온갖 이단사설이 횡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온갖 이단들이 날뛰고 있다.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잘못된 억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에, 순수한 사람들도 있지만, 반미 감정으로 이끌고 가, 정치화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볼 때, 저들은 우리보다 훨씬 축복된 땅을 가지고 있다. 기름이 쏟아지는 땅, 쭉쭉 뻗은 나무들, 땅을 파면 수많은 지하자원이 나온다. 저들은 자연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자연을 잘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정말 우리나라는 땅도 작고,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저들보다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눈, 영적 통찰력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기본이 되는, 3가지 요소들을 먼저 창조하신다. "태초에" 시간을 창조하셨다. 그 이전은 영원이다. "하늘"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공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창조하셨음을 보여준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3가지를 창조하셨다. 시간, 공간, 물질을 창조하셨다고, 창조가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이 3가지는 천지창조에 필요한, 원초적 물질에 불과했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지구가 아름답게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를 설명한다. 3절 이하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신다. 말씀이 기준이 되고, 말씀대로 될 때 아름답다. 

하나님의 손이 아직 닫지 않았기에, 혼돈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째, 둘째, 셋째 날의 창조사역을 통해서, 혼돈 상태의 땅을 정돈된 상태의 땅으로 만드셨다. 아울러 땅은 공허했다. 텅 비어있었다. 아직 하나님께서 그곳을 채우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넷째, 다섯째, 여섯째 날의 창조사역을 통해서, 공허한 땅을 채우셨다. 

흑암은 깊음 위에 있었다. 아직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이전이었다. 창조된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흑암이 땅 위에 있지 않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왜? 창조된 땅의 원초적인 상태가, 깊은 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다. 그 위를 깊은 물이 덮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전체가 흑암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셨다. '운행하다'는 말은,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품듯이, 그 위에서 너풀거림을 말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살아가게 될 장소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수면에 운행하셨다. 어렵고 힘들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삶에 운행하시면, 삶이 아름답게 풍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되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거짓된 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무엇을 위하여 데모를 하고, 정치를 하는지 그들의 마음을 보아야 (솨아)한다. 하나님만을 우러러 보자(나바트). 물질이나 다른 어떤 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역사를 보는(라아) 통찰력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단의 밥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행위를 '솨아'로 바라보신다. 따라서 우리는 '나바트'로 주님을 응시하면서, '라아'를 통하여 역사의 종말을 내다보아야 한다. 올바로 볼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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