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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순교자의 삶을 살아야 할 때!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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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순교자의 삶을 살아야 할 때! (단 3:13~18)

 
우리는 오늘 종교행위를 하려고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한 민족의 불행도, 한 집안의 불행도, 한 개인이 불행도 결국 하나님의 남다른 인도를 받는 일에서 실패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탐내고 열망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작업입니다.  무엇보다도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만을 정직하게 받겠다고 열망하는 사람은 지금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그 권능을 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목사의 눈에 비친 안타까움은 신앙을 가졌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 받기를 정직하게 열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인도만을 기다리며 가는 길,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성경을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걸음까지도 정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드는 자를 일평생 인도하십니다.  우리 인생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것은 이 연약한 생명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는 끝없는 고백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시간부터 하나님의 인도를 사모하십시오.  열망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인도는 언제나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합한 자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제대로 믿으십시오.  확실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비서새'가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곧잘 날면서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벌레를 잡기도 하고 또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날개가 꽁꽁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생활을 하는데 꼭 비서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감사도 하고 찬양도 하고 곧잘 예배도 드립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 신앙생활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먼저 삶이 너무 평안할 때에 우리는 영적인 무관심과 영성 마비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도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등반가의 진가는 야산을 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험산 계곡을 지날 때에 비로소 발휘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탄할 때는 그 신앙의 진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극심한 환난과 시련, 그리고 도전에 부딪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도전과 결단이 필요한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도전과 결단입니다.  신앙생활은 고통을 잊게 하는 마약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군병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병정 놀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영원한 신혼의 밀월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을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곧 전투요, 목숨을 건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영적 전쟁의 때입니다.  한 번의 실패에 포기해서도 안되고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 방심해서도 안 되는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봉독한 본문은 오늘 우리들에게 한 가지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수 많은 교회가 있고,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위해 내 생명이라도 드리고자 하는 순교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정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어떤 도전이 와도 당신은 당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가?
어떤 유혹이 와도 당신은 당신의 신앙에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가?

본문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에 바벨론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벨론은 지금의 인도에서 중동 전체와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까지 다스렸던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나라를 만들고 대단한 권세를 누렸던 왕이 본문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왕입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면 어느 날 느부갓네살왕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두라 평지에 세웁니다.  높이가 30미터요 넓이가 3미터나 되는 거대한 우상입니다.
 
왕이 왜 갑자기 금으로 만든 신상을 세웠을까?  2장을 보면 잘 이해가 됩니다.  하루는 느부갓네살 왕이 기이한 꿈을 꿉니다.  아무도 그 꿈을 풀이해 주지 못했을 때 다니엘이 그 꿈을 풀이해 줍니다.  꿈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현재 느부갓네살왕의 왕국이 천하를 호령하고 왕의 권력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져 가고 있지만 언젠가 왕의 왕권이 끝날 날이 오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이 꿈의 내용이었습니다.

왕이 꿈을 꾼 것은 왕의 자리에 있은 지 2년째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로부터 약 16년이 지난 이후의 사건입니다.  지난 16년 동안의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의 왕국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강성해져 갔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의 마음도 점점 더 교만해져 간 것입니다.  왕은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신상을 세웠습니다.  바벨론에서 모든 도를 다스리는 관원들을 다 불러모읍니다.  수 천명의 관리들이 왕과 우상 앞에 열을 지어 섰습니다.  왕은 궁중에서 음악을 하는 수백 명의 악사들을 다 불러모읍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왕의 명령이 들려옵니다.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라!  만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어 죽이리라!"

그들 앞에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풀무불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듯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천지를 울리는 음악소리가 들려오자 참석한 수 천명의 관리들은 일제히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경배를 우상 신 앞에 절하는 순간.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상상의 눈을 떠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느부갓네살 왕의 눈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온 천하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듯이 교만으로 타오르는 왕의 눈.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가장 고귀한 모습으로 창조한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절하는 순간, 찢겨져 가는 하나님의 가슴, 피 눈물 나는 하나님의 눈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온 세상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무릎을 꿇는 듯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8절에서 '그 때에' 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절하는 바로 그 때에, 왕이 만든 금 신상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그들은 존귀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살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세 가지 이유로 이들을 왕에게 고소합니다.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왕은 분노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며 다스리는 왕인데 포로로 끌려온 하찮은 세 유대인이, 그것도 관직을 주었더니 왕이 만든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  이것은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평소 이들의 충정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왕이 그들을 불러 세워서 묻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로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그러하냐?"
왕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했다가 음악이 울리면 절하라.  그리하면 살려주리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들을 내 손에서 건져내어 줄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세 친구는 이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놓였습니다.  이대로 한 번 절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절대적인 신앙을 위해 이대로 비참하게 인생을 끝낼 것인가?  왕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는 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조금의 요동도 없이 왕의 호의를 거부하고 금 신상에게 절할 수 없음을 밝힙니다.  계속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풀무불로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데 그들이 가진 신앙은 어떠한 신앙이기에 죽음 앞에서도 이처럼 위대한 고백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까?  단 한번 살아가는 땅 위의 인생입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 젊은 날이요,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시 한번 헌신을 다짐하고자 주님의 말씀 앞에 서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세 사람의 순교자적인 신앙을 살펴보면서 주님을 향한 거룩한 헌신을 다시 한번 다짐하여 일생 주님을 위해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첫째, 그들이 보여준 순교자의 신앙은 타협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을 들어야만 했던 사람들입니다.  정복자의 땅에서 당시에 천하를 호령했던 왕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신인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은 마치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세 사람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연약한 계란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바위를 무너뜨리는 힘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약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연약한 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에게는 왕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이유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왕의 명령을 거부해야 할 이유보다 왕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이유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것이 왕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요, 생명을 살리는 길이요, 미래를 기약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유혹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신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대답은 짧고도 즉각적이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절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의 뜻은 양보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말로 대화해서 문제를 풀어갈 때가 있고, 행동으로 말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여, 이것은 탁상공론을 하거나 타협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말로 대답할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양심과 신앙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결의는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 청년의 선택의 기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시시때때로 부딪히는 갈등과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좌도 잃지 않고, 바벨론의 왕좌도 버리지 않는 회색지대가 없을까? 눈치를 살피곤 합니다.
이에 대해 '라블레'라는 신앙인은 이렇게 경고를 합니다.
"두 의자 사이에 함께 앉으려 하다가 땅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큰 길로 달려갈 때 신앙의 양심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아니요' 라고 하면서 묵묵하게 좁은 길을 가는 것, 이것은 결코 쉽지 않는 삶입니다.  특히 그 길에 죽음의 위협과 핍박이 기다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생명 여기에 있다'며 그 길을 가겠습니까?  더구나 오늘 잘못된 물질주의 문화의 유혹 앞에 쉽사리 굴복해 버리는 이 땅의 나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 앞에 헌신을 다짐하고자 나온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정녕 나를 따라 오려느냐?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걸어가라."
누가 이 좁은 길, 외롭고 고단한 길,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갈 사람일까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의 저자인 윈 형제가 쓴 [백 투 예루살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도행전과 같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책 가운데 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중국 상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유엔이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죄목으로 감옥으로 잡혀갑니다.  갖은 수단으로 회유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자 아이들을 감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11살짜리 아들 그리고 동생을 둔 어머니입니다.  아이들이 소리칩니다.
"어머니, 돌아와 주세요.  어머니 그리워요."
 
공산당국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꺼낸 큼직한 종이 위에 유엔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자식이라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단 한번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유엔 자매는 그로부터 23년을 차가운 고통의 감옥 속에서 젊은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967년 불과 4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23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유엔 자매가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아들이 티벳에 공무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티벳으로 찾아갑니다.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본 아들은 차갑게 그녀를 거부합니다.
"나에게는 당신 같은 어머니가 없소."
그 뒤로 다시는 자식을 보지 못한 유엔 자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 아닙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 자녀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데 그냥 한번쯤 예수님을 부인하고 집에 돌아가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우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 넓은 중국 땅에서 저 멀리 도망쳐 살아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녀의 가슴속에 계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그 고귀한 23년의 젊은 날을 고통 속에 보내야 하고 자식에게까지도 외면 당하는 어머니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유엔 자매의 가슴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은 유엔을 위해 하늘 나라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이셨습니다.  유엔 자매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바로 그 예수님이셨습니다.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들이었지만 이 예수님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런 핍박과 유혹이 더 이상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사탄은 끊임없이 믿음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타협을 요구하면서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듣되 말씀대로 행하지는 말아라.  믿기는 하되 순종하지는 말아라."
이것이 악의 세력이 믿음의 백성들을 유혹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순종의 거리가 마치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만큼 멀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한국교회가 큰 교회 목사님들의 정신을 먹고 산 것이 아닙니다.  부자 장로님들의 양식을 먹고 산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 총칼에 굴복하지 않았던 손양원 목사님과 그 아들 동인이 동신이의 피를 먹고 산 것입니다.  일제 신사 앞에 절하지 아니하고 대못이 박힌 송판길을 당당히 걸어갔던 주기철 목사님의 피를 먹고 자라온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길을 가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좁은 길을 가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양보해야 할 것은 양보하지 않고, 당연히 양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너무나 쉽게 양보해 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보지는 않습니까?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성질과 자존심을 죽이지 못해서 우리 자신을 쏟아내는가 하면, 반대로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순결, 하나님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둔감해질 데로 둔감해진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을 봅니다.  우리를 유혹으로 이끌 때에, 우리를 타협의 광장으로 몰아갈 때에, 우리는 여기 세 청년의 단호한 결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속에서 타협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만 가지요,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신앙적 이유가 한 가지라면 우리는 그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부름 받은 교사 여러분, 어떤 자세로 어린 심령들을 섬기십니까?  셀리더 여러분들, 어떤 마음으로 셀 가족들을 섬기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교회와 이웃을 섬기십니까?
 
한 영혼 한 영혼을 대할 때마다 잃은 양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가슴앓이로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의 양심과 말씀에 비추어 타협 없이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고 싶은 사람은 고난 받고 손해보는 일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그들이 보여준 순교자의 신앙은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그대로 믿는 신앙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죽음의 세력 앞에서 그들은 고백합니다.
"왕이여,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타오르는 풀무불과 왕의 권력은 눈에 보이는 세력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당당하게 신앙의 절개를 지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백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설령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상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만큼 충성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셔야 할 차례입니다" 하고 요구하는 거래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조금도 의심 없이 견고하게 지키겠다는 맹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생활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질병을 치료하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도 능히 건지시고 악마의 손에서도 능히 건져내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은 우리가 당하는 시련보다 더 크십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랑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문제보다 더 크십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손길은 우리를 해치려는 악마의 손길보다 빠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렇게 고결한 집사님에게 저런 고통을 주시는지, 저토록 헌신적인 목사님을 왜 저렇게 일찍 데려가시는지.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시는지.
 
사랑하는 여러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을 때 이 문제를 십자가 앞에 가져갑시다.  주님의 십자가를 무엇으로 이해하겠습니까?  죄인된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대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때에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고 위로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물어볼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바로 이 때가 입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보여준 순교자의 신앙은 희생을 각오하는 신앙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희생할 각오가 준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미 젊은 날부터 하나님을 위해 그들의 시간과 물질과 삶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금의 요동도 없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딘가에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기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누구에게 드립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다면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생명이라도 주님을 위해 드릴 수가 있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생명을 위해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살려낸 영혼이 저와 여러분이 아니십니까?  이 주님을 위해 여러분이 드리는 헌신과 희생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단 한번 살아다 가는 이 땅 위의 삶입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언젠가 이 땅을 떠나 우리 주님 만날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위해 흘린 희생의 흔적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흘린 눈물을 가지고 영혼을 향해 흘린 땀으로 온몸을 채우고 주님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죽음을 불사한 고백은 왕의 분노를 가중시켰습니다.  19절에 무엇이라 말합니까?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진실로 주님을 따르려고 하면 고난이 갑절로 찾아오는 법입니다.  분노한 왕은 병사를 시켜 세 사람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로 던져 넣었습니다.  얼마나 풀무의 불꽃이 뜨거웠던지 그들을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습니다.  세 사람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을 위해 불꽃처럼 살아간 세 사람의 마지막 순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느부갓네살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가 본 것은 형체도 없이 타 죽어야 했을 세 사람이 아니라 아무런 해도 없이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 네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킨 그들을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왕이 그들을 불러냅니다.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불에 탄 냄새 하나 없이 그들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느부갓네살왕이 무엇이라고 소리칩니까?  본문 2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왕은 이제부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몸을 쪼개어 죽이겠다고 조서를 내립니다.  그리고 왕은 바벨론 모든 지역에서 세 사람을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교자의 삶을 사는 신앙의 절개는 위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가 순교자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믿지 않는 세상의 교만한 왕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더욱 존귀하게 높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을 내리는 근본적인 요인이 누구십니까?  진실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맞습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맞습니까?  정녕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우리는 적당히 살다가 인생을 끝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적당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옥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지옥을 내려가는 길목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지옥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순교자의 삶은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순교자의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을 향한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합니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요, SBS 방송초기에 코미디 전망대를 진행했던 김경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 장로님은 말년에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죽기 전날 가족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터인데 죽음을 두려워 하리이까?
하오나 이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술로 범죄할까 두렵습니다.
못나도 장로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두렵습니다.
지난 몇 개월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시간마다 찾아오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가릴까 두렵사오니 이 고통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이 고통 가운데도 당당히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사랑스런 내 자녀들에게 우리 아버지는 그토록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도 당당히 아버지의 영광을 찬송하며 갈 수 있었다는 기억을 남기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주님 앞에 감사하며 눈을 감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곳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는 순교자의 삶을 살았던 이들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날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순교자들의 피 앞에, 우리 주님의 피 앞에 서시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흘린 눈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흘린 피의 흔적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한날이 주어졌다면 마치 이 날이 땅 위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기고 오직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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