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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보시는 하나님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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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시는 하나님 (눅 7:11~17)


간식이 귀했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그 땐 왕눈깔 사탕 하나 손에 쥐면 천하를 얻는 겁니다. 참 대단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요 간절한 눈빛으로 삥 둘러섭니다. 한번씩 빨아먹게 해주길 얼마나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평소 잘 지내왔다면 좀 오래 빨아먹을 수 있고, 잘 하면 두 번도 빨아먹을 수 있습니다. 두 번 빨아먹도록 해주면 큰 특권입니다. 다들 부러워합니다. 

그 땐 껌도 쉽게 버리는 거 아닙니다. 우선 단물부터 빨아 먹고요. 어디에 붙여 놓았다가 다시 떼서 씹곤 했습니다. 지금은 껌이 흔합니다. 쉽게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난 4월 12일 토요일 오후,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남산 길바닥에 붙은 껌 떼기에 참여했습니다. 앞만 보고 살다보니 아래 바닥은 그리 살피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줄곧 바닥을 내려다보아야 했습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길바닥에 버린 껌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건 나쁜 습관입니다. 싱가포르처럼 고액 벌금 물려야 합니다. 단물 다 뽑힌 후 길바닥에 버려진 지 오래된 껌들. 숱한 사람에게 밟혀 물기하나 없이 바닥에 납작 붙어버린 찌꺼기들. 먼지와 뒤범벅된 채 새까맣게 남겨진 지저분한 덩어리들. 

저희들은 한 손에 비닐봉지를, 또 한 손엔 칼을 들었습니다. 짧은 시간 일부 구역에서만 작업했기 때문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몸 낮추고 쪼그려 앉는 약간의 불편함만 감수하면 되었습니다. 딱 붙어버린 껌을 이리저리 쳐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약간의 수고에도 보람은 컸습니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 날 수고하신 분들 눈에는 남산길이 조금은 깨끗해진 듯도 했습니다. 최소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껌 뱉지 말자는 메시지는 전한 셈입니다. 

그런데 껌 떼는 내내, 뜬금없이 바닥인생 사는 사람들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절망으로 말라붙은 삶을 삽니다. 길거리 껌같이 말입니다. 딛고 일어설 힘은 물론 살 의욕조차 없습니다. 예배 직전 묵상영상에 나온 한 장면처럼 납작해져 그냥 땅바닥으로 꺼져버린 삶이지요. 사정 들어보면 참 딱하고 측은합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살아내셨는지. . . 

오늘 말씀에도 바닥에 곤두박질쳐진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12절에서 그 인물을 정리해주는 한 마디를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외아들마저 잃은 과부! 이젠 완전히 혼자라는 뜻입니다. 한 때는 단란한 가정을 꾸렸을 여인입니다. 든든한 남편과 사랑스런 아들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을 가정주부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와 외아들만 남겨둔 채 남편은 세상을 떠납니다. 질병 때문인지 사고를 당했는지 성경은 분명한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이 여인은 과부가 됩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은 꺼집니다. 남한테나 있을 것 같은 그 일이 바로 자신에게 닥친 겁니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남편이 귀가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지금이라도 문이 열리며 “여보!” 라고 소리칠 것만 같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남편의 죽음이 현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도 남편 좋아하는 음식 보면 여전히 남편 생각 많이 납니다. 남편과 함께한 추억의 장소에 가노라면 더욱 그리워집니다. 해마다 남편 돌아가신 날 돌아오면 외로워 눈물 바람하고요. 

그런데 더 기막힌 비극이 닥칩니다. 외아들마저 죽은 겁니다. 자식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부모 마음은 견딜 수 없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더 그렇습니다. 더 잘 지켜주지 못해서, 더 잘 도와주지 못해서 죄책감에 사무치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더욱이 남편이 남기고 간 텅 빈 공간 어느 정도 메워 온 아들입니다. 남편 없는 외로움과 서러움도 이 아들이 달래준 겁니다. 청년으로 장성한 아들은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죽다니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가슴 쥐어뜯다 실성할 지경입니다.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이걸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유대인은 곧장 장례를 치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조적인 두 행렬이 마주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슬피 울며 호곡하는 과부의 장례 행렬이고, 또 하나는 천국 소망으로 기뻐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렬입니다.    

흔한 장례 행렬 그냥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 가득한 인류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습니다. 사망권세 앞에서 속수무책 유린당한 과부의 고통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 것입니다. 길바닥에 말라붙은 껌 같은 과부를 예수님께서 먼저 주목하십니다. 파리한 그 영혼을 측은히 여기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우리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어 세우십니다. 마치 인류에게 밀려드는 사망 권세의 조류를 온몸으로 막아내시듯 말입니다. 그리곤 먼저 다가가 갈대로 엮어 짠 관에 손대십니다. 마음으로만 말로만 불쌍히 여기신 것 아닙니다. 고통에 함께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하십니다. 생명의 주님께서는 곧바로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놀랍게도 청년은 사망권세를 이기고 일어납니다. 과부가 얼마나 놀랬겠으며 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다시 살아나다니요? 말라붙은 과부의 영혼에 생명수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과부의 눈물은 변하여 기쁨이 되고, 슬픔은 변하여 환희의 춤이 됩니다. 과부와 외아들은 생명의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말합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예수님 통해 자기 백성 돌보시는 하나님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으로 퍼져갑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돌보셨다’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원형은 episkeptomai(에피스켑토마이)입니다. ‘방문하다,’ ‘권고하다,’ ‘심방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episkeptomai입니다. 온 인류를 심방하신 것이지요. 

이 단어는 의사가 환자를 찾아 왕진할 때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병든 인류에게 의원으로 왕진해 오신 겁니다. 고통에 짓눌려 신음하는 과부에게도 왕진하여 고쳐주신 겁니다. 너무 힘든 환자는 병원을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병상에서 스스로 일어날 기력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껌처럼 말라붙은 인생을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 때 그랬고, 지금도 그런 분들 계십니다.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주목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가 붙어 있는 그 바닥까지 왕진해오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바닥까지 친절하게 심방해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사망 권세로부터 우리를 떼어내 일으켜 주십니다. 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도록 하시고, 이 세상 살아낼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사망 그림자 드리워진 우리에게 지금도 생기를 되찾아주십니다. 무기력과 절망의 덫에 걸린 우리에게 지금도 의욕을 되찾아주시고 소망과 감사로 자유하게 해 주십니다.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가 결혼하기 전부터 지금까지도 기도해주시는 권사님이 계십니다. 장손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나름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하셨습니다. 시동생들과 시누이들을 열심히 뒷바라지 하다가 어느덧 중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갱년기 우울 증세인지 식욕은 물론 모든 의욕이 사라지셨습니다. 밤에 잠도 잘 오지 않고, 쉽게 불안해하셨습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식은 땀 흐르며 손도 덜덜 떨렸습니다. 어떻게 이러고 계속 살아가누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 싶으셨습니다.  

이 빠짝 말라버린 영혼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아껴서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고 나인성 과부 외아들도 되살려 주었다. 하지만 정작 내 외아들은 죽게 했다. 너를 위해서다. 난 너를 사랑한다.” 이 말씀에 대성통곡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자마자 찬송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눈물 흐르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우울 증세는 차츰 사라졌고요. 

그 후 권사님께선 구역장으로 지역장으로 헌신하셨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구역식구들의 기도제목을 안고 작정 철야기도도 하고요. 심방하여 예배드리며 영혼들을 소생시키는 데 쓰임 받고요. 메마른 사막이 변하여 생명수 흘려보내는 수원이 되셨지요. 깊은 영적 경험에서 우러나는 조언 한 마디 한 마디가 권위 있고요. 대표 기도할 때면 함께 한 모든 분들의 마음에 지금도 깊은 감동이 전달됩니다. 구역식구들도 권사님 권사님하며 존경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진을 받은 권사님께서는 또 다른 사람을 왕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신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돌보심에 사용된 이 episkeptomai(에피스켑토마이)라는 단어가 성도를 향한 권고에도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약 1: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참된 경건은 고아나 과부와 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양과 염소를 가르는 종말의 심판에도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마 25: 34-36,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복 받을 근거가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돌아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 본받은 분들입니다. 쪽방 사람들과 노숙자들을 꾸준히 섬기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굶주린 북한 주민을 안타까이 여기며 돌보려는 분들이 있고요. 새로운 터전 잡기 위해 탈북한 분들을 보살피는 일에 뛰어든 분들도 많습니다. 이번에 재난 당한 미얀마와 중국을 돕기 위해 헌금하는 것이나 필요로 하는 곳에 물질을 나누는 것도 참된 경건에 힘쓴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업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 겪고 있는 순 식구를 찾아가 함께 기도했다는 순원들의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아픈 분들을 위해 쉴 새 없이 중보기도 하고 부지런히 심방하는 분들도 있고요. 암 수술 후 회복 중에 있는 성도를 돌아보는 권사님도 알고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의 눈이 되어주는 봉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성도님들도 계십니다. 틈만 나면 환자들을 찾아가 무료 진료해드리는 의사들도 우리 교회에는 많이 계십니다. 가정 문제로 어려움 겪는 분들을 친절하게 상담해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 본받아 서로 돌아보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그 삶 속에 참된 경건이 있으며, 틀림없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말라붙은 삶을 살고 계십니까? 왕진해 오시는 하나님께서 방문하고 권고하심으로써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는 것을 믿고 기대하십시다.  말라붙은 삶을 사시는 분들이 눈에 띠이십니까? 우리가 회복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메마른 영혼들을 살핍시다. 메마른 영혼들과 함께하기 위해 조금만 더 몸을 낮추고 조금만 더 수고하십시다.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를 통해서 전달되어가길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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