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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적을 구하는 신앙(2) (요 2: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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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을 구하는 신앙(2) (요 2:23~25)


신앙생활을 모태적 부터 시작 한 분이 있는가 하면, 전혀 신앙과는 관계가 없던 분들이 어떤 큰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생의 큰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경우, 혹은 큰 병이나 사고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겠고, 또 평범하게 자발적으로 또는 부모나 가족의 신앙을 따라 호의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다양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동기는 사람에 따라 다양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일주일 동안에 많은 표적을 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병든 자를 낫게 하는 등 예수님의 신적 행위를 보고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요 2:23,24)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위의 구절은 사람이 어떤 동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에 대하여 깊이 만족치 아니했고, 그 사람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깊은 속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1. 세 가지 신앙 

성경 전체의 흐름은 모든 믿음이 구원을 동반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성적인 신앙입니다. 이는 머리로서 예수님을 아는 외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결국 그 분이 우리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논리적인 생각에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머리의 지식 즉 이성적 신앙입니다. 

둘째, 외적 신앙입니다. 어떤 표적을 경험적으로 보고 믿는 신앙이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예수를 믿고 큰 문제가 해결이 되고 죽을 병에서 나았습니다. 또 기적을 보았다고 합시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단계와 같은 것으로 이것은 경험이 중시되는 외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셋째, 참 신앙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신앙 즉 내적 신앙입니다. 이것은 어떤 지적인 동의 뿐 아니라 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인정을 하고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이런 자의 믿음은 자신의 머리나 이적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신앙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신앙입니다.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또는 어떤 표적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부합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어떤 이적과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성경 말씀을 그 진리대로 받아들일 때에 그 사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 표적의 의미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나타나는데, 이런 기적적인 일들에 대하여 성경에는 크게 세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기사(奇事)’입니다. 헬라어 ‘테라스(τέρας)’로 영어의 ‘Wonder’입니다. 기사는 놀랍고 신비하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테라스라고 하는 말은 요술과 같이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 일들로, 성경에는 사람의 호흡이라도 멈출 듯한 신기한 기적을 우리 마음 속에 느끼게 하는 기이한 일이 많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깜짝 놀라게 할 일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초인적인 이런 일들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는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꼭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권능(능력)’이다. 헬라어의 ‘듀나미스(δύναμίς)’로 영어의 ‘Power’입니다. 듀나미스는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의 어원이 됩니다. 이것은 큰 초인적인 힘 권능이나 혹은 폭발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이 능력은 폭발하는 힘입니다. 

어떤 사람이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하나님이여 내 육신의 약한 질병을 고쳐 주옵소서’ 라고 할 때에 불치의 병도 나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개인의 큰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큰 능력에 의해서 기적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표적들이 우리들에게 오게 되면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죽을병이 나았는데 예수 안 믿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오는 신앙을 ‘외적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즉 육신이 경험한 사실에 대하여, 믿는 신앙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 영생에 이르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으러 다니는 것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셋째, ‘표적’입니다. 헬라어로 ‘세-메이온(σημείον)’으로 영어의 ‘Sign’이다. 표적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부분을 해낸 사실을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그 사건이 끝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표적을 행하니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1)고 말씀했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한 목적은 예수님이 인생을 변화시켜서 새 생명으로 새 사람으로 영생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영어 표현대로 싸인(Sign) 즉 하나의 ‘암시’입니다. 

이 비유에서 재미있는 것은 갈릴리 가나 잔치가 누구 집에서 했는지? 신랑이 누군지? 신부가 누군지? 몇 명이 모였는지? 연회장이 누군지? 모릅니다. 오로지 아는 것은 예수님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밖에 모릅니다. 이것이 표적의 특징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근원이 흥미나 관습이나 역사적이거나, 개인적인 가정의 교육에 의해서, 부모가 믿었기 때문에,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한 방편입니다. 


3. 표적을 믿는 신앙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십계명이 구원을 줍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계명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지키라고 합니까? 사람이 아무리 율법을 믿어도 구원은 얻을 수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입니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표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체험을 통하여 참 영생의 길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도록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육신적인 작은 경험으로 하나의 상징적 증표 즉 예시적 암시로 더 큰 것을 깨우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베다니 동네에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되자 그 동생 마르다는 큰 기적적인 사건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처럼 인간적인 기적의 한 부분을 가지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을 바로 찾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체험하였어도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요,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갖기 전에는 예수님을 바로 찾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들과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피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8:4)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호의적 감정이나 또는 체험을 가지게 되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영적인 문이 확 열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때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다 받아들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기적적인 사건을 많은 언급하고 있는데, 그 기록한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시던 사건이 성경에 나옵니다. 벳세다 뜰에 많은 사람이 이적을 보고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신 그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이후 그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잡혀 왔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문둥병자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열 명이 나음을 받았는데 예수를 믿은 사람을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기적을 보려고 하는 신앙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은 된다 할지라도 결정적인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어려운 시절의 과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배고픔과 가난, 고통과 질병을 이길 수 있는 표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의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서 그 표적의 요청이 긴박한 생존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되었습니다. 이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 되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교회 밖에서 더 좋은 것을 찾으려 합니다. 

(요 2:23,24)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기적만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기적을 보고 생긴다’는 그런 말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참 믿음, 내적 믿음은 성경 말씀을 보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영생의 진리의 길을 잘 들을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기적을 보지 않고도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니까 심적인 변화가 왔고, 예수님은 특별한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잘 믿어 보려고 해도 그 마음으로는 천국을 못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말씀에 뿌리를 두지 않는 외적 신앙은 완전치 않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든지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것만 먹고 맛없는 것은 다 뱉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오래도록 다녀도 참 기독교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결 론 

거듭남의 의미가 어떤 것일까요? 쉽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심장이 약해져 죽게 되었는데, 이 사람에게 건강한 심장을 이식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거듭남은 좀 착해지는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완전히 없어지고 예수님의 심장이 이식되고 예수님으로 접붙여지고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그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표적을 본 고로 주님을 믿는 믿음은 주님께서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감정과 감상에 치우쳐서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으로 교회에 찾아오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기쁨으로 왔으면 영생의 길이 어디 있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어떤 동기로 왔던지 간에 구원받은 백성이 되도록 그리고 아직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말씀이 길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진정한 표적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받는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말씀 자체가 표적을 동반한다면 말씀을 믿고 상고하는 자에게는 이적이 일어날 수 있고 표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읽을 때,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때 기도가 응답되고,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열심히 기도할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표적이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표적을 본 곳에서부터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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