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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적을 구하는 신앙(1) (마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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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을 구하는 신앙(1) (마 16:1~4)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며 살아갑니다. 이후에 부자나 거지가 다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올려 가는데,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멀리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보고 물 한 방울이라도 줘서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지만 거절당하게 됩니다. 부자가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눅 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여 주어도 믿지 않을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믿음으로 생깁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 주어야 믿겠다.’, ‘이것이 해결되면 믿겠다.’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증거를 보면 믿겠다고 하지만 그런 믿음의 자세는 의심만 가중 시킬 뿐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1. 시험하는 자들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당시 종교와 정치면에서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주의자들로 비정치 색깔을 가진 단체였으나, 사두개인들은 당시 지배자인 로마와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 강한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둘은 항상 적대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대립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함께 온 것은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연합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시 2:2). 이것은 마치 서로 당시에 원수처럼 지내던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갑자기 친구가 된 것과 유사합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 ‘시험하여’라는 말은 여기서 ‘유혹하다’의 뜻으로 이것은 사단이 예수 광야에서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던 말과 같은 것입니다(마 4:1).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습니다. 랍비들은 당시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각종 이적들은 사단에 의해서도 능히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대신 하늘로부터 이루어진 이적들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심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표적’(shmeion, 세메이온)이란 결정적이고 놀라운 증거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들은 모세의 때에 내려졌던 만나 사건(출 16장, 요 6:32)이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인해 해와 달이 멈춰졌던 사건(수 10:12-14), 사무엘 시대의 우뢰 사건(삼상 7:10) 및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 사건(왕상 18:30-40)과 같은 초자연적인 하늘의 기사들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 깊은 저의는 그러한 이적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어떻게든 예수를 넘어지게 하려는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눅 16:31). 따라서 그들이 구한 표적은 그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과연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야인지 당신 스스로 입증해 보라는 식의 지극히 올무를 걸기위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 많은 도전으로 시험하였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경우(마 4장), 바리새인들이 아내를 버리는 경우의 질문(마 19:3), 누구에게 세금을 바칠까? 라는 질문(마 22:17),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마 22:36), 표적을 구하는 질문(마 8:11) 등이었습니다. 문제는 모두 진지한 질문이 아니라 넘어뜨리려는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3장에서 관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거듭남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의 영적인 갈급함을 아시고 진지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표적이나 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하고도 온전한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에 대하여 호전적인 질문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겸손함과 죄인임을 고백하는 참 신앙이 요구됩니다. 


2. 시대의 표적 

(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마가복음 8장 12절에는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악하고 편협한 질문의 의도를 깨달으시고, 그 악함에 대해서 심령 깊숙한 곳에서 탄식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뻔히 아는 질문, 가르쳐 주어도 믿지 않을 태도, 이해시켜주려 해도 끝까지 믿지 않으려는 태도에는 진지한 답변보다는 오히려 탄식뿐입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에서 저녁하늘이 붉으면 맑은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열대와 극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된 현상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의 변화를 통해 때의 징조를 예측했으며, 각종 생활의 지혜를 얻었으며, 강우량을 예측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연계의 제 현상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여기에 나타난 ‘시대의 표적’(signs of the times)은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 등을 나타내시기 위해 특별히 보여주시는 것으로 영적 차원의 여러 가지 나타나는 현상들을 가리킵니다. 세계는 영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이 있는데,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의 세계는 중요시하면서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날씨에 대하여 아무리 유능하고 박식하다고 하더라도 영적 세계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결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 12:37,38)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대적들이 아예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어떤 표적을 보여주어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을 아신 것입니다. 즉 그들은 증거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 즉 앉은뱅이, 귀머거리, 소경, 혈루증환자, 문둥병 등 죽은 자까지 살리는 많은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바다위로 걸어가시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때로는 깊은 데로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현대인들은 성경말씀이나 역사를 통해서, 개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기적적인 일들은 통하여 그 분의 전능하심을 발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된 편견으로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핑계할 수 없는 교만이며 죄입니다. 믿음은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3. 표적을 구하는 세대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헛된 교만으로 표적을 구했던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육체적인 음란을 질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음란을 규탄하신 것입니다(사 57:3-10). ‘음란’이라는 말은 특히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범죄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지만 생각에는 육체적인 욕심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때마다 각종 표적을 때에 맞게 주어서 확신시켜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미 그 마음에 순결성을 상실하고 편견과 독단에 의하여 진리를 통찰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충분한 표적과 가르침이 주어졌음에도 그들은 악한 의도로 표적만 계속 구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그들에게 다시 표적을 보여 준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시비꺼리를 만들어 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만 이해되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표적을 안보여 주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모든 표적 중의 표적, 즉 요나처럼 자신도 3일 동안 죽으셨다 살아날 것을 강력히 암시한 것으로서(욘 1:17), 분명 결정적 표적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어찌되었는지 예수님의 이 대답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일종의 회피처럼 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표적 즉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부활의 진리는 확실한 증표가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오히려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교제를 끊으시고 멀리 하신 것을 뜻합니다. 이런 교제의 단절은 1차적으로는 인간관계의 단절이지만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축복과 교훈의 기회의 박탈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시어 가르치셨지만 그들이 끝내 거절할 때에는 그들을 떠나시곤 했습니다. 우리가 갖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은 영·육간의 축복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결혼한 사람이 서로 믿음을 가지고 사랑하기보다 돈을 생각하고, 평안하고 좋은 것만을 추구한다면 그 가정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은 저급한 삶을 불러일으킵니다. 


결 론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기적을 동반하는 표적이 아닙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무엇을 물으려면 참 신앙을 위해서 니고데모처럼 진지한 물음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약 1:6,7)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악하고 음란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되어 있지 않는 자, 말로만 예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지만 항상 그 눈은 자신의 유익과 육체적인 욕심에 집중되어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엉뚱한 표적이나 증거를 찾기 보다는 마음으로부터의 참 회개와 돌이킴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단절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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