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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은 어디서 오는가 (욘 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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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은 어디서 오는가 (욘 3:5~10)


어느 심리학자가 극한 위기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조사한 적이 있다. 위기를 겪기 전과 위기를 겪은 후에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고 달라졌는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전체 응답자 중에 15% 정도는 위기 전이나 위기 후나 별로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답했고, 그 나머지 85% 정도의 사람들은 위기를 통해서 종래 가지고 있던 삶의 습관이나 태도가 바뀌었으며, 더 나아가 인생관이나 가치관조차 백팔십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로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위기라고 해서 다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위기야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전환을 시도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품도록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그가 설문 내용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원리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기가 닥칠 때 그 속에서 누가 개입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개입하면 그의 의견이나 충고를 따르게 되나 하나님이 개입하면 자연스럽게 그가 원하시는 뜻대로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낸 단어가 ‘위기개입crisis intervention’이라는 말이다. 위기를 만났을 때 그 위기 속에 하나님이 개입해 들어옴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운행하시는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멸망 직전의 위기에 처해있던 니느웨 성에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깜짝 놀랄만한 부흥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선교학자는 이 사건을 가리켜 ‘이러한 부흥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이 부흥은 참으로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이자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인위적으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흥의 범위부터가 남다르다. 어느 일부 계층이나 지역에 국한된 부흥이 아니라 전국가적이고 전민족적인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단 한사람이 기껏 하루 동안 돌아다니며 메시지를 전한 결과임을 감안한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혹자는 이 니느웨 부흥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우리는 왜 니느웨 성과 같은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부흥을 위해서는 일정한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이 법칙을 충실히 따를 수 있다면 우리도 놀라운 부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악독하고 불의하기 이를 데 없었던 니느웨 성이 부흥을 했다면 우리라고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안 되는 것이 기적이 아닌가. 저주 받아야 마땅했던 니느웨가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고 복을 받았다면 우리라고 그렇게 하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이 본문을 읽어가면서 이러한 기도제목과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니느웨 성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물결이 우리 교회와 또 이 나라 위에 흘러넘치게 하소서.’ 


한 사람의 힘

주님은 니느웨 성의 부흥을 위해서 요나라는 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성경에 기록된 부흥 사건들을 살펴보면 주님은 나라의 부흥이나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이 즐겨 쓰시는 방법은 분명하다.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보다 훈련된 한 사람에게 더 관심과 비중을 두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부흥계획을 알리시고 그를 도구로 삼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주님의 일은 언제나 명령에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은 순종하는 노아, 한 사람을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해내시고 새 시대의 지평을 열어나가신다. 바벨탑 사건 이후 모든 민족이 세계로 흩어지고 말았을 때,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신다.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져버린 참으로 어둡고 불행한 시대에 사무엘이라는 한 젊은이를 택하여 그 민족과 그 시대를 일깨우시고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도록 하신다. 

오늘도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 각자임을 명심해야 하리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절대 순종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로 설 수만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손에 위대한 부흥을 일으키는 주인공들로 쓰임 받게 되리라. 순종하는 한 사람이 불순종하는 천인이나 만인보다 더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고, 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이 시대를 변화시켜 나아가는 부흥의 주역들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돌려야 하리라. 


부흥의 기초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 성에 전할 메시지를 그 입에 담아주신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 성이 뒤집어지리라’ 이는 짧은 메시지에 불과하나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담겨있다. 주님은 이 메시지를 니느웨에 가서 그대로 전하라고 분부하신다. 그러나 문제는 요나가 받은 메시지는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렇게 쉽고 편안한 마음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전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듣는 자 또한 상당한 부담이 뒤따르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사십 일이면 망한다’는 이 메시지가 어찌 반가운 소식일 수 있는가? 따지고 보면 얼마나 섬짓하고 불길한 소식이란 말인가. 듣는 자나 전하는 자나 할 거 없이 마음이 심히 거북하고 찜찜했을 것이다. 

만약 이 메시지를 우리가 들었다면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아마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지적해주어 고맙다. 전에는 우리도 모르고 있어 조용히 지나갔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준 자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싫어할까봐 알고도 모른 체할 뿐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솔직하게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주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선지자다.’라고 인정을 했거나 아니면 반발심을 앞세워 ‘저 친구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야. 우리의 원수 나라 출신이라며. 저가 뭔데 주제파악도 못하고 함부로 저런 소리를 하고 다니나. 문제가 생기면 신상에 안 좋을 줄 알아.’라고 협박을 하거나 귀를 틀어막았을 것이다. 

아마 니느웨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저 친구 더위 먹었구먼. 이스라엘에서 건너왔다고 하는데 혹시 미친 거 아니야.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괜히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려 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민심을 혼란케 하려는 것 아니냐? 아무래도 사상이 불순하구만. 저런 자를 가만히 둬서는 안 되리라.’ 결국 참다못해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전했던 ‘사십 일이 지나면 망한다’는 메시지는 오늘날로 말하면 대한민국 목사님이 북쪽 김정일 앞에 가서 ‘너 사십 일이 지날 때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어!’라고 대놓고 경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원수의 나라에 가서 좋은 말이나 축복의 메시지도 아니고, 저주에 가까운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는 할 수 없으리라. 요나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고 어찌 그런 메시지를 전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한 마디 빼거나 각색하지 않고, 멋대로 바꾸지도 않는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다섯 마디 경고를 그대로 전할 뿐이다. 

부흥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부흥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수용해드릴 때 부흥이 시작되고 일어나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부흥은 거짓된 부흥과 다를 바가 없다. 일어나고 있는 부흥이 참이냐, 거짓이냐 라는 기준은 과연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파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의 원리이자 본질적인 요소는 오직 하나,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이 없이 일어나는 부흥은 부흥이라기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다분히 흥분된 상태일 뿐이다. 어떤 부흥도 말씀에 기초하지 않으면 사이비나 무속적인 것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부흥만이 참 부흥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부흥이 일어날 때 세상이 바뀌고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다. 

요즘 한국교회를 살펴보면 위태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말씀선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 그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인기라는 미명하에 인간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어 듣기에 무난하고 편안한 말씀으로, 재미난 말씀으로, 들어도 전혀 부담이 없는 말씀으로만 채워지고 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하는 대답이 있다. 성도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전하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기 때문에 일단 부정적인 요소들을 처음부터 생략하고 그들이 선호하고 만족해할 만한 주제들을 골라 편집한다는 것이다. 마치 재미가 없으면 과감히 잘라버리는 방송 프로그램처럼 설교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항간에 교인들이 좋아 한다는 이유만으로 설교인지, 만담인지, 재담인지 도통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단이 타락하고 있다. 물론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청중의 수준이나 문화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설교를 빙자하여 거룩한 말씀까지 밑으로 끌어내리거나 왜곡시키는 일은 금물이다. 요나가 받은 메시지는 전하기에 지나칠 정도로 부담스러운 말씀이었으나 주님이 주신 말씀이라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 있다. 

요즘 강남의 젊은이들이 ‘설교 들으러 가자’는 말을 ‘골마사지 받으러 가자’는 은어로 주고받는다고 한다. 가히 코메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충격을 느껴 ‘이래선 안 되겠구나’ 결단하고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날 정도가 돼야 살아있는 말씀이 아닐까. 그 말씀을 듣고 ‘아, 편안하고 좋구나’ 그 수준에만 머물러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말씀이라면 주님의 말씀도 그 무엇도 아님을 기억해야 하리라. 

설령 메시지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불편하게 하더라도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맘에 들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고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누가 손해를 입겠는가. 결국은 자기에게 손해가 돌아오고 말리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라도 유익이 있어야지 손해가 된다면 무엇 하러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단 말인가? 말씀이 나의 삶속에 들어와 부흥이 일어나고 주님의 은혜가 넘쳐서 진정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예배드리고 나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신경질이나 부리고 원망이나 늘어놓는다면 도대체 그런 예배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주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아멘’하고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을 통해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다면 말씀을 통한, 말씀에 의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리라. 


경청

부흥은 주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본문 6절이다.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요나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니느웨 왕의 귀에 들렸다고 말한다. 이 ‘왕에게’라는 말을 ‘나에게’로 바꿔서 읽어보면 더 실감이 나리라. 주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 순간, 그 말씀이 자신에게 심각한 도전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들린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충격을 안겨준다’ ‘생동감을 일으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말씀이 들려오자 그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여 듣는 이에게 충격을 일으키고 생동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들었는지 말았는지 알 수가 없고, 아무런 감동도, 충격도, 감격도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 말씀은 그냥 바람처럼 스쳐지나가고 말 것이다. 

니느웨 왕은 말씀을 듣자마자 강한 충격을 받고 주님 앞에 엎드린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이 입고 있던 권위의 상징인 왕복과 보좌를 벗어버리고 땅에 내려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일인가.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바로 부흥의 첫걸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심령이 부흥하고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과 함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하면 뭐하나? 그 말씀이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청종할 때, 그 심령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주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롯의 가정에 전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식을 들은 롯은 지체 없이 자기 사위들을 불러 차종치종 설명하면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오늘 주님의 사자들이 와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주님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듣고 보니 너무 끔찍해 아직도 심장이 떨릴 정도다. 심판이 내리기 전에 어서 이곳을 피해 달아나야 한다. 각자 보따리 싸들고 모여라’ 이때 사위들이 취하고 있는 반응을 보라. 한심해서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성경에는 ‘농담으로 들었더라They thought he was joking.’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 메시지를 무시하고 가볍게 받아들인 결과는 무엇인가?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망하는 것과 동시에 같이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언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가? 언제 깨어나는가? 언제 부흥하게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때이다. 우리 주님은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하시면서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서 55장에는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나를 청종하라 그러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요, 너희 마음에 즐거운 것으로 항상 넘치리라’고 약속하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소유하기를 기대하는가? 위로부터 오는 주님의 축복을 맛보기를 원하는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큰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길 바라는가?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성경에는 말씀을 읽으라는 명령도 있지만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들으라’, ‘청종하라’,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교회가 살고 이 나라가 살고 우리 개개인이 살아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생명의 말씀에 청종해야 한다.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길이 오직 듣는데 있기 때문이다. 


회개

우리가 부흥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한다. 본문에 보면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자 그 말을 듣는 즉시 바로 통회자복하고 있다. 요즘 한 나라의 대통령의 권위도 보통을 넘지만 예전 왕의 권위가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라. 우리의 이해를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위치다. 왕은 말 한 마디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런 그가 그 보좌에서 내려앉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 자신이 더 이상 그 보좌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만이 주인이시라는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 뿐만 아니라 조복을 벗어던지고 재를 뒤집어쓰고 통회자복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만큼 철저히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요나의 말씀에 자신을 조명해보고 나라를 비추어보는 순간, 그동안 어둠 속에 숨어있던 죄악들이 낱낱이 들어났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청종할 때 그 후에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점검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말씀에 조명해보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존재이며 주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 말씀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우리의 죄를 자각하도록 해준다. 부흥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하나있다. 바로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부흥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부흥의 조짐은 나타날지 모르나 진정 부흥으로 연결될 수는 없으리라. 

1907년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그때의 부흥이 재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공여부는 우리가 얼마만큼 자신의 죄를 통회자복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죄인임을 깊이 인식할 때 그 문제의 해결자를 찾게 되고, 만나기 위해 갈망하며 그 앞에 나아가 잘못을 뉘우침으로 새로운 부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참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 야단하나?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별히 모자란 것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남보다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건만 회개하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한, 결코 진정한 부흥을 체험할 수가 없으리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사랑의 주님, 잘못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죽을 죄인입니다. 이 진노에서 나를 거두어주소서.’ 자복하는 자에게 회복의 은혜를 내려주신다. 설령 우리에게 진노를 계획하셨더라도 뜻을 돌이켜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회개야말로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고 이 세상이 부흥할 수 있는 첩경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을 위해서는 날마다 순간마다 회개하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얼마 전에 신문에 보니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사과하는 자세를 놓고 우리나라 대통령들을 간략하게 평해놓는 글이다. ‘YS는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자기의 할 일을 한다. DJ는 잘못하면 즉시 잘못했다고 말하고 사과를 하고 큰 과오를 저질렀을 경우, 눈물까지 흘리면서 성명을 발표한다. 

DJ 시절, 대국민 사과성명이 제일 많이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나중에 보면 사과만 했지 바뀌는 것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MH는 잘못했어도 빌기는커녕 발끈하면서 ‘내가 뭘 잘못했느냐?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고 오히려 큰소리치고 신경질조로 대들고 본다는 것이다. 이 니느웨 왕과 비교해볼 때 과연 누가 복 받을 자요, 누가 좋은 지도자인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누가 성공하고 누가 축복받느냐? 회개하는 자이다. 결국은 회개하는 자가 복 받고, 은혜 받고, 용서받고, 능력까지 받는 것이다. 

최근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을 뽑아 어떻게 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는가를 조사했더니 하나의 공통점이 나타났다고 한다. ‘I am sorry.’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고소득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가 돈도 더 많이 벌고 잘 된다는데 하물며 주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갈 때 더 큰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지 않겠는가. 본문에 보면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설 때 주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성경에 주님께서 자신의 뜻을 돌이켰다는 부분은 여기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주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기에 한번 정하신 일은 이루어질 때까지, 끝까지 밀고 나가신다. 그러나 뜻을 돌이킬 때가 있는데 바로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떠나면 우리에게 내려질 심판까지도 즉시 거두시고 저주 대신에 축복을, 죽음 대신에 생명을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니느웨의 부흥은 순종하는 한 사람 요나로부터 일어난다. 부흥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주의 말씀이 들려오자 겸허히 귀기우려 듣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진정으로 뉘우치기 시작한다. 이것이 부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흥이 오면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임한다. 새로운 역사,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난다. 심령이 바뀌고 가정이 변하고, 사회가 거듭나고, 나라가 개혁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부흥을 꿈꾸며 열망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 기도 >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니느웨 성의 부흥을 통하여 부흥은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깨닫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부흥을 위하여 
우리 모두 주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전하라 하신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는 가운데 말씀을 
통한, 말씀에 의한 놀라운 부흥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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