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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립에게 본받을 점 (행 8:4~8) - 제자,섬김,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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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에게 본받을 점 (행 8:4~8)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교회에 눈에 띠는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워드 스나이더라는 학자는 [21세기 교회의 전망]이라는 책에서 이 점을 잘 정리했습니다. 

그는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변화를 “교회의 중심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변화가 단순히 현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중심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중심 이동을 10가지로 정리했습니다. 

그 중에 한국교회에 관련해서 눈에 띠는 것 하나를 꼽으면 이것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에서 사역 공동체로의 중심이동입니다. 과거에 목회자와 평신도는 엄격히 구분됐었습니다. 목회자는 교회 사역의 주도권을 쥐고 평신도는 보조적 역할만을 하고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협력해서 사역을 펼쳐가는 틀로 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한국교회에서 침체를 면치 못하는 교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목회자들만으로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하고 떠오르는 교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결국 21세기 교회의 성패는 평신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사역에 참여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평신도를 깨우고,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그리고 평신도를 참여시키느냐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사람은 빌립입니다. 이 사람은 평신도로서 초대교회 부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입니다. 그는 목회자들과 사역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초대교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사역 공동체 안에서 평신도의 헌신과 참여의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사람입니다. 

이 빌립은 오늘 21세기 교회에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평신도들이 목회자들과 어떻게 사역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평신도들이 교회 사역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답을 찾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성경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네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사도 빌립입니다. 예수님의 12 사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주로 요한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1장에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 6장에서 오병이어의 이적 때 예수님께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둘째, 빌립 헤롯입니다. 헤롯대왕의 아들로 여조카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살로메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의붓동생 헤롯 안디바에게 영토도 아내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마 14:3) 

셋째, 빌립 헤롯 2세입니다. 헤롯 대왕의 다섯째 부인의 아들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렸습니다.(눅 3:1) 

넷째가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집사 빌립입니다. 

그러면 집사 빌립은 어떤 사람이고, 평신도 사역자로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1. 섬기는 사람 

전통적으로 행 6장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우는 이야기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집사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일곱 사람을 세웠다고만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가 아닌 일반 평신도들 가운데 일곱 사람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 사람들이 집사 직분의 효시처럼 여겨졌습니다. 우선 집사 직분의 기준의 효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집사를 세울 때 이 사람들을 그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다음으로 집사 직분의 역할의 효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집사에게 역할을 맡길 때 이 사람들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이 사람들을 집사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빌립은 바로 이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행 6:5를 보면 빌립은 두 번째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집사 빌립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이 세움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6:2를 보면 “접대”를 위해서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KJV에서는 "serve tables"라고 번역했고, NIV에서는 "wait on tables"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치 종들이 식탁에서 섬기듯이 교인들을 섬기라고 세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품격 있는 식당에 가면 웨이터들이 손님을 접대합니다. 입장하면 정중하게 인사로 맞이합니다. 활짝 웃으면서 음식 주문을 받습니다. 식사 도구들을 준비해 줍니다. 순서에 따라 음식을 제공합니다. 물이나 음료가 떨어졌나를 확인하고 채워줍니다. 뭔가 불편함이 없는지 부족함이 없는지 살펴보고 섬깁니다. 손님이 편안하게 그리고 맛있게 식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섬깁니다. 

그렇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은 식당의 웨이터들처럼 교우들이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교회 생활할 수 있도록 섬기라고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웨이터 정신”입니다. 늘 “나는 웨이터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늘 “나는 웨이터로 섬길 것이다”라고 다짐해야 합니다. 

행 6: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초대교회 당시 접대하기 위해 일곱 사람을 세울 때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평신도 사역자들이 갖춰야 할 두 가지 덕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끈기”입니다. 

빌립이 해야 할 일은 교회 안의 과부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저들의 생계를 돌봐주는 일입니다. “매일의 구제”라고 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입니다. 게다가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부흥해서 교인이 늘어났습니다. 돌봐야 할 과부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야말로 갈수록 태산입니다. 그래서 끈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내의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끈기가 필요합니다. 힘들다고 손 놓고, 피곤하다고 맡겨주신 일을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웨이터 정신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끈기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은 “인내”입니다. 

빌립이 상대한 과부들은 두 종류입니다. 헬라파 과부들과 히브리파 과부들입니다. 이민 가서 살다가 돌아온 과부들과 토박이 과부들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습니다. 자라온 배경도 다릅니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있습니다. 자기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서로 경쟁합니다. 빌립은 그 사이에서 늘 원망과 불평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내의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기저기서 불평합니다.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고 원망합니다. 잘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욕이고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그래서 웨이터 정신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어떤 소리를 들어도 어떤 욕을 먹어도 참아야 합니다. 


2. 전하는 사람 

행 21:8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아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여기서 빌립을 “전도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전도자라고 불린 사람은 빌립 혼자입니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했기에 전도자라고 불렸을까요? 스데반이 순교한 뒤 예루살렘 교회에 섬김을 위해 세움 받은 일곱 사람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교도들의 박해가 스데반과 빌립과 같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에게 집중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과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행 8:5를 보면 빌립은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날 때 우선 사마리아로 갔다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이후에 남쪽 가사로 갔다고 했습니다.(26) 그리고 40절을 보면 아도소 여러 성을 지나서 가이사랴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는 곳 마다 전도했고 또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박해를 피해서 도망치듯 예루살렘을 떠나는 상황입니다. 일단 목숨을 부지해야 합니다. 정착해야 할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빌립을 전도자라고 부르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은 교회 밖에서는 “전도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늘 그 마음 속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국 주요 고속도로를 차타고 달리다 보면 “Jesus Loves You"라는 대형 광고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나 선교단체가 세운 간판이 아닙니다. ”고려은단“이라는 회사가 세운 것입니다. 자기네 회사 이미지를 홍보하거나 ‘은단’과 ‘비타민’ 같은 주력 상품을 광고한 것이 아닙니다. 회사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답니다. “고려은단은 기독교인들만 상대로 사업할 것이냐? 그 많은 불교신자나 타종교인들 안티기독교인들 저들은 고려은단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그렇지만 조창현 사장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회사가 민족 복음화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광고 후에 회사는 더욱 성장해서 국내 시장 70-80%를 점유하는 최대의 은단회사가 되었답니다. 

그렇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은 전도자 이미지를 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지위, 내게 주신 재능, 내게 주신 상황 그 모든 것을 활용해서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빌립은 전도자로서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녔다는 점입니다. 

빌립은 전도를 위해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사마리아로도 갔습니다. 예루살렘 남쪽 블레셋 땅 가사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해안을 따라 아소도 지역 즉 블레셋 여러 성을 다녔고, 가이사랴에까지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은 전도의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전도의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둘은 벽을 넘었다는 점입니다. 

빌립은 전도의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만남의 장벽이 있습니다. 서로 상종하지 않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지 않습니다. 전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방인입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만남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전도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인위적인 전도의 장벽을 과감하게 뛰어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은 전도할 수 있는 사람만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의 장벽, 언어의 장벽, 상황의 장벽을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3. 성령의 사람 

행 6장을 보면 빌립이 일곱 사람의 하나로 세움을 받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2 사도가 일곱을 선택할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3) 첫 번째 기준이 성령 충만입니다.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일곱을 선택했습니다. 그 일곱을 살펴보니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5) 

빌립이 세움 받은 이유는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성령의 사람이었기에 평신도 사역자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은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하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한 청년 사업가가 상담을 청하며 경건한 수도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도사님 왜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힘이 듭니까? 사업도 잘 안되고 인생이 이토록 고달픈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도사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서 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인 자네도 이 세상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네. 물고기가 물로 돌아가야 되듯이 자네는 성령께로 돌아가야 되네” 

사업가는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사업을 그만 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수도사가 답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자네가 사업을 하되 언제나 자네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야 늘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면 성령님께서 자네의 앞 길을 인도하신다는 것이야” 

그렇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이 주님의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려면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과 함께 귀한 역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두 가지 중요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습니다. 

   주의 사역은 그야말로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도, 우리가 가진 경험으로도, 우리가 가진 갖가지 능력으로도 안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늘 마음은 원이어도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면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립은 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사람이 되면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그 능력으로 주님께서 맡기신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둘은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주의 사역은 사람의 뜻대로 안 됩니다. 사람이 꿈을 꾸고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사람이 그 계획을 실행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갈 바를 알 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헤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 되면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행 8:29을 보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사람이 되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바야흐로 평신도의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습니다. 잠자고 있던 평신도들을 깨워야 합니다. 뒷짐지고 있던 평신도들을 앞 장 세워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주의 사역에 활기차게 나설 때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평신도들은 빌립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빌립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웨이터 정신으로 무장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주의 백성들을 섬겨야 합니다. 다음으로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의 이미지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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