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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사람이다 (겔 34: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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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사람이다 (겔 34:25~31)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고, 그 땅에서 해로운 짐승들을 없애 버리겠다. 그래야 그들이 광야에서도 평안히 살고, 숲 속에서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과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려주겠다. 내가 때를 따라 비를 내릴 것이니, 복된 소나기가 내릴 것이다.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은 그 소산을 내어 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평안히 살 것이다. 그들의 멘 멍에의 나무를 내가 부러뜨리고, 그들을 노예로 삼은 사람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하여 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다른 나라에게 약탈을 당하지 않으며, 그 땅의 짐승들에게 잡혀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평안히 살고, 놀랄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기름진 옥토를 마련하여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흉년으로 몰살을 당하지도 않고, 다른 나라에게 다시 수모를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나 주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과, 그들이 내 백성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너희는 양 떼요, 내 목장의 양 떼다.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 뒤집힌 세상

주전 59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굴복시키고, 그의 삼촌 시드기야를 꼭두각시 임금으로 세웁니다. 그리고는 유다 사회의 상류층 대부분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갑니다. 에스겔은 그 때 사로잡혀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발 강가에 정착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이제 곧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자기들을 꿈에도 그리는 고국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그건 헛된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들이 그리워하는 예루살렘은 그 죄로 인해 곧 망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자연히 그는 사람들의 꺼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헛된 희망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들이 잡혀간 지 12년이 지났을 때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유다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발 강가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부터 에스겔은 희망의 예언자로 탈바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움을 입었던 이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34:2)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악한 목자들은 자기를 위해 양을 희생시킵니다.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습니다.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고, 병든 것을 고쳐주지도 않고,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주지도 않고, 흩어진 것을 모으지도 않고, 잃어버린 것을 찾지도 않습니다.

강도로 변한 목자들로 인해 양 떼는 흩어지고,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예언자의 말을 듣는 백성들의 마음이 착잡했을 겁니다. 그런 지도자들을 믿고 살아온 지난날의 회한 때문이었겠지요. 이제 해방의 꿈은 버려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이제 하나님께서 손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실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34:16)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전쟁의 참화로 나라가 잿더미로 변한 상황에서도 제 잇속이나 차리는 힘센 자들을 미워하십니다. ‘살진 양들’로 지칭되는 그들의 행태는 이렇습니다. 초원에서 풀을 배불리 뜯어 먹고는 남은 풀을 발로 짓밟아 남들이 먹지 못하게 하고, 맑은 물을 맘껏 마시고는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혀 놓습니다. 병든 것들을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뿔로 받아서 그것들을 바깥으로 내보내어 흩어지게 합니다. 그림이 그려지시지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제 눈에는 일터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서민들의 삶을 더욱 막막하게 만들 각종 정책들이 떠오르고, 약소국가들의 등골을 빼먹는 강대국들의 파렴치가 떠올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을 갖는 것이 가능할까요?

• 두려움 없는 세상의 꿈

에스겔의 대답은 아주 간명합니다. “희망은 위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임금, 다윗 왕과 같은 새로운 목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해로운 짐승과 사나운 짐승을 없앨 것입니다. 그는 힘이 아니라 사랑이, 미움이 아니라 연민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때 비로소 광야에서도 평안히 살고, 숲 속에서도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을 것입니다. 샬롬의 세상이 열리는 겁니다. 

삶을 돌아보십시오.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어떤 사나운 짐승이 위협하기에 우리 마음에 이토록 안식이 없는 것일까요?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근대화 이후 사회를 ‘위험사회'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산업화를 통해 기술문명이 도래했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요. 하지만 내재된 위험도 그만큼 커지게 되었습니다. 핵전쟁의 위협이나 환경파괴, 다중이 이용하는 시설을 향한 무차별 테러, 실업의 증가, 교통사고, 납치와 유괴…우리 마음을 뒤흔드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안심' 혹은 ‘평안'이라는 이 소박한 단어가 새삼스럽게 들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사나운 짐승과 해로운 짐승이 꼭 우리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작 무서워해야 할 사나운 짐승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병약한 양들을 어깨로 밀치고 뿔로 받고, 남이 먹어야 할 풀을 짓밟고, 물을 더럽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아닌지요? 위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도 점점 모질어지고 있습니다. 누구를 대하든 경계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우정이나 사랑보다는 경쟁의식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눈빛이 가파른 사람, 목소리가 거친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합니다. 믿을 것은 나 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우리 삶은 일그러집니다. 느긋한 평안을 누리고 싶지만 그것은 언제나 연기된 꿈일 뿐입니다.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 두려움 없는 세상의 꿈은 그저 꿈일 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고 말한다면 삶이 너무 각박해집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두려움 없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요? 모두가 친구인 세상, 모두가 가족인 세상이 아닐까요? 원수조차 사랑하기로 작정한다면 그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을 친구로 삼으면 죽음의 쏘는 가시는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바로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과 용서,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넘치는 한 우리 속에 있는 사나운 짐승은 머물 곳이 없게 됩니다. 예수의 마음이 아니고는 평화의 세상을 누릴 수 없습니다.

• 욕망으로부터의 해방

소망이 절실하다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멍에를 부러뜨리고,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는 이들의 계획을 무산시키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참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祈禱)는 기도(冀圖,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거나 그 계획의 실현을 도모함)입니다. 즉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멍에를 벗겨주실 분은 주님이시지만, 우리도 그 멍에를 벗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도한 욕망이 아닐까요? 과도한 욕망이 우리를 종으로 만듭니다. 풍요로운 삶, 안락한 삶의 꿈은 신기루와 같아서 우리를 더욱 목마르게 하고, 지치게 만들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위험 사회는 바로 우리의 욕망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풍요로움과 편리함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동안 초록별 지구는 중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야기하는 기상 이변은 그 빈도와 규모가 날로 확대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구의 한편에서는 엄청난 홍수로 피해를 입고, 다른 편에서는 가뭄으로 땅이 사막으로 변해갑니다. 엄청난 규모의 싸이클론은 마치 아이들이 개미집을 허물어버리는 것처럼 가난한 이들의 생존의 터전을 순식간에 허물어 버립니다. 지구의 허파라는 열대우림 지역은 사료용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파괴되고, 광우병·조류 인플루엔자는 지구촌을 불안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지구의 부존자원, 그 중에서도 화석연료는 고갈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풍요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멍에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은 생태적 삶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은 가급적이면 자가용 대신 버스나 전철 혹은 자전거를 탑니다. 웬만한 거리는 걷습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하면 끝까지 사용합니다. 육류에 대한 소비를 줄여 나갑니다. 환경을 심하게 파괴하는 기업의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반생명적이고 반환경적인 정책에 대해 반대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 스스로 욕망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성스러운 반역자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과도한 욕망 위에 세워진 세상 질서에 틈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짙은 욕망의 구름을 찢고, 하늘의 빛을 세상에 끌어들이는 이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캄보디아에 우물을 파주는 일에 힘을 모았습니다. 이제는 그 방향을 조금 돌리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우물 헌금을 봉헌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3세계 어린이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하는 일과 몽골·중국·인도의 황량한 땅에 나무를 심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십시오. 나는 이것을 ‘푸른 희망을 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인들의 정성으로 저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척박한 땅이 초록빛으로 변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사나운 짐승, 해로운 짐승에게 받혀 쓰러진 이들을 일으키는 일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이 아니겠습니까?

• 은혜의 복된 비

에스겔은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복된 소나기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복된 소나기가 내리면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은 그 소산을 내고, 그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평안히 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소나기가 뭘까요? 여러분은 어떤 소나기를 기대하십니까? 돈 벼락? 출세? 뭐, 잘만 활용한다면 그것도 나쁠 것은 없지요. 묵상 중에 문득 우리가 맞아야 할 소나기는 눈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메말랐습니다. 연속극을 보면서는 울지만, 다른 이들의 구체적인 아픔은 외면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과 연루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연루되기를 꺼리는 순간 우리는 참 사람이 될 기회를 잃게 됩니다. 세상의 고통을 보며 울어보셨습니까? 

저는 6월 10일 자 <<한겨레 21>>에서 오태양 씨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인도 동북부에 있는 둥게스와리에 있는 달리트 마을에서, 40도가 넘는 더위를 견디며 2년 가까이 우물을 파고 마을길을 닦아주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지금 긴급구호가 필요한 여러 나라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특히 그가 애를 태우는 것은 북한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북한의 식량난은 아주 심각합니다. 지난해 추수해서 비축해둔 식량은 이미 다 떨어졌고, 씨감자 등은 7~8월이나 되어야 수확을 하게 되는 데 벌써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요즘 가슴이 많이 아프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도 난다”고 말합니다. 그가 북한의 실상에 처음 접한 것은 1996년 대학 3학년 때였다고 하는 데, 그는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기사를 보면서 거의 매일 울었다고 합니다. 어떤 날은 신문을 보다가 너무 눈물이 나서, 타고 가던 지하철에서 내려 역 벤치에 앉아 한참을 혼자 울기도 했답니다. 그러다가 친구·선후배와 함께 모금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내가 한 끼 줄이고 한 숨 덜 자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면, 동포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마음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형편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는 지금 일부러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음식을 먹으며 구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타인의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태우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은 은혜의 소나기를 맞은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곧 세상에 내리는 은혜의 소나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삶으로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뜻을 받들기만 하면 됩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몽당연필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무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붙드시면 우리도 이 척박한 세상에 복된 소나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성스러운 반역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세태를 거스르며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순례자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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